“한국은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나라다. 3포·5포 세대가 (되는 것을) 저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

18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광주 조선대에서 열린 첫 공개강연에서 한 말이다. 애국심을 갖고 ‘노오력’하라는 뻔한 메시지를 던지는 반 전 총장이 왜 이렇게 높은 지지를 받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국민이 상당수 있다.

정치인은 언론을 통해 형성된다. 한국 언론은 결과적으로 유엔활동 10년을 ‘박정희식 경제발전을 전 세계에 전파한 애국행위’로, 이를 수행한 반기문을 ‘청년들이 꿈꾸는 우상’으로 만들었다.

‘국위선양’ 한국인

반 전 총장은 2006년 취임선서를 마치고 “6자회담에 도움 주는 역할 하겠다”고 말했다. 연임 확정 후 한국 특파원들을 만나 “회원국들의 이해와 갈등을 조정하는 가교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지 않고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역할에 적합했던 말이다. 그러나 한국 언론이 구성한 반기문의 모습은 다르다.

“아프리카는 한국 새마을운동 배우길”(서울신문 2008년 3월12일자) 이 신문은 반 전 총장이 “유엔본부 ‘빈곤·퇴치를 위한 새천년 개발 목표(MDGs)’에 참가중인 각국 대표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며 “반 총장은 경제성장 등에서 가장 성공한 사례로 꼽히는 한국으로부터 배울 점을 설명해 달라는 질문에 새마을운동을 예로 들었다”고 전했다.

반 전 총장 동정은 주로 갈등과 분쟁 조정 관련 소식이 아닌 빈곤·경제개발 소식이었다. 빈곤퇴치와 경제개발이 민족주의 관점으로 볼 때 한국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반 전 총장은 ‘새마을운동 전도사’로 불리기도 했다. 

▲ 2010년 11월15일 국민일보 사진기사

이런 언론에 편승해 반 전 총장은 새마을운동을 찬양하며 다녔다. 2015년 9월에는 “산불처럼 새마을운동이 번졌다”며 “사무총장으로서 여러 다양한 변화가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에서 일어나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특히 이 시점은 친박근혜 진영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고 있을 때다.

반기문은 한국 경제성장의 대명사로 포장됐다. 국민일보는 2008년 첫날 “폐허딛고 눈물과 땀으로 일군 ‘대~한민국’”이란 기사에서 정부수립 60년을 되짚었다. 키워드는 “세계 12위 경제대국의 기적”, “한강의 기적”, “수출”, “한류 열풍” 등이었고, 경제·사회·문화 뿐 아니라 외교역량도 강화됐다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언급했다. 한국경제는 2009년 12월30일자 “한국 이젠 원조하는 나라…UNDP 46년만에 철수”란 사진기사에서 굳이 반 전 총장의 사진을 정리하는 모습을 담았다.

2015년 11월28일 서울신문은 여야 주요 대선주자의 이미지를 분석한다며 “반 총장의 스마트하고 젠틀한 이미지와 유사한 역대 대통령으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며 “다만 반 총장이 대권주자로 나선다면 지나치게 완벽한 이미지는 오히려 대중 정치인으로서 ‘독’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지나치게 완벽한 이미지’는 상상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귀국 1주일 만에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는 행보, 특히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의 이름도 전혀 모르고 미수습자를 자꾸 생존자라고 불렀던 반 전 총장의 모습은 시민들을 분노하게 했다.

▲ 2010년 7월20일 동아일보 기사

언론에 비친 ‘한국인 반기문’의 행보는 노골적이었다. “한국 음식 권하는 반총장”(동아일보 2007년 7월26일자), “반기문 총장 ‘한지 세계화 앞장서겠다”(한겨레 2007년 10월23일자), “반기문 총장 ’국력신장에 기여할 것‘”(파이낸셜 뉴스 2008년 7월4일자), “반기문 총장, 우주인 이소연 만나다”(파이낸셜 뉴스 2008년 7월4일자), “반기문 가야금 사세요”(문화일보 2008년 10월7일자)

과유불급이다. 워싱턴포스트는 2007년 10월21일 반 총장의 ‘한국인 편애’에 대해 비판했다. 유엔 한 고위관리는 “한국인들에 의해 주요 결정이 내려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고 말했다. 반 전 총장은 취임 이후 유엔 내 한국인 직원을 20%나 늘리며 기존 지휘계통이 흔들렸다는 지적이 나왔다. 

제2의 반기문? 반기문 우상화

국민들은 대통령을 국민의 대표·대리할 사람을 뽑기보단 국민의 열망을 투영하는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의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 당선됐다. 이명박을 뽑았던 사람들은 ‘우리도 이명박처럼 돈 벌어보자’, 노무현을 뽑았던 사람들은 우리도 노무현처럼 ‘정의의 편에서 성공해보자’는 열망이 담겨있다.

반기문은 청소년들의 꿈으로 포장됐다. 사무총장 선출 직후 2006년 11월14일자 조선일보 “충북의 자랑 반기문 만세!”에 따르면 충북 음성군과 충북도교육청은 반 전 총장 마을 명소화 사업과 ‘제2의 반기문’ 육성을 위한 영어 말하기 대회를 개최하는 등 반기문 포장에 나섰다.

한겨레는 2008년 12월15일자 “슬픔이여 안녕…‘제2의 반기문’ 꿈꾸다”란 기사에서 사회복지시설 출신 이지용군이 서울대 합격한 소식을 전했다. 개천에서 용난 스토리를 반기문과 직접 연결시킨 보도였다. 서울신문은 2009년 7월11일자 “내가 제2의 반기문 총장”이란 사진기사를 보도했다. 부산에서 열린 ‘제2 유엔사무총장 양성 프로젝트’ 행사 보도였다. 아시아경제는 2012년 11월 “충주에 ‘반기문 교육프로젝트’가 인기”라고 보도했지만 실상은 보충수업 정도였다. 심지어 2015년 12월 “유엔총장 되고 싶은 사람들 하루 80분만 잘 각오하세요”(동아일보) 기사는 잠 줄이고 근면성실하게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60년대 박정희시대를 떠올리게 했다.

▲ 2015년 12월16일 동아일보 기사

반기문은 서울대 나와 외무고시 합격한 인물로 전두환 정권 시기 국무총리였던 노신영과 가깝게 지내며 성장했다. 참여정부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하던 중 김선일 납치사건 등의 위기에서 실질적인 조치조차 취하지 못해 비판받았다. 유력한 유엔 사무총장 후보였던 홍석현 주미대사가 삼성 X파일 사건으로 낙마하자 정부가 직접 힘써 반 전 총장을 당선시켰다. 그렇게 당선된 반기문의 첫 별명은 ‘기름뱀장어(Sloppery Eel)’였다. 청소년들에게 ‘제2의 반기문’을 강조하는 게 서울대 가서 고시에 합격하란 뜻이든 가치판단에 앞서 출세부터 하란 뜻이든 비판의 여지가 있다.

반 전 총장이 청년들에게 ‘노오력’이 부족하다는 식의 발언을 내뱉는 배경에는 반기문을 청년들의 꿈으로 설정해 우상화한 언론이 있다.

동아일보 2006년 2월 “‘반기문 마라톤대회’ 업그레이드” 보도에 따르면 충북 음성군은 반 총장 선출 1주년을 기념해 창설한 마라톤대회를 국내 최고 수준으로 키우겠다고 밝혔고, 2008년 1월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충북 음성군은 반기문 총장 생가 행랑채 등이 남아있는 원남면 상당리 윗행치마을 주변을 성역화하고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 생가마을 정비사업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음성군은 음성읍 진입로를 ‘반기문로(路)’라고 이름 붙였다. 그 외에도 2009년에 ‘반기문 평화랜드’ 조성계획, 2010년에는 ‘반기문 광장’을 착공, 2015년 ‘반기문 리더십 학교’ 운영 계획, 2017년까지 생가 옆 유엔평화관 지을 계획 등이 있다. 그 결과 충청에서도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며 반기문이 거론되고 있다. 민주적인 리더의 모습도 아니고 지역주의를 편승하는 결과만 초래했다.

▲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8일 오전 광주 동구 조선대학교에서 열린 초청 강연 및 토론회에 참석해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던 중 다른 참석자들은 모두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데 혼자 인사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박근혜 대통령 사례에서 본 것처럼 대통령이 되는 능력과 대통령직 수행 능력은 관계가 없다. 유엔사무총장을 ‘세계대통령’ 쯤으로 이해하고 ‘세계를 통치해봤는데 한국은 못하겠나’라는 생각이 퍼져있다. 리더십의 유형을 권위적인 리더십으로 한정짓고, 조직의 리더가 모든 걸 결정한다는 사고방식이 유엔 사무총장을 세계대통령으로 이해하게 했고, 이를 언론이 다양한 방식으로 홍보했다.

유엔 사무총장은 제한적인 자리다. 유엔헌장 97조는 사무총장의 역할을 행정책임자로 규정하고 있다. 이 자리는 냉전의 결과물이다. 2차 대전 직후 유엔을 세우며 미국은 세계의 중재자 역할을 맡기고자 했고 소련은 미국의 독주를 우려해 행정책임자로 역할을 더 제한하려 했다. 미국은 이런 요구를 받았다. 실제로 안보리를 중심으로 한 강대국들의 심부름꾼 역할에 가깝지 그들을 강제할 수 있는 권한 자체가 없다. 이 자리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강조한 건 적절했는지, 한국 언론의 태도는 적절했는지, 유엔 사무총장 퇴임 직후 박정희의 유산을 이어 대통령에 나가겠다는 건 적절한지 봐야 한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