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설-장애-여성-섹슈얼리티라는 질문

그래도 여러 경로로 대한민국의 장애인 거주시설이 복지시설이나 인권적 기관이 아니라 오히려 반인권적 수용시설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 알려져 왔다. 이때 그러한 수용시설에 사실상 구금돼 각종 인권침해에 고통받아온 장애인에 대하여 비장애인 대중이 느끼는 감정이란 아마도 ‘불쌍하다’, ‘가엽다’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라고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 ‘불쌍하다’거나 ‘가엽다’는 소위 시혜와 동정의 시선이 문제적인 이유는 그러한 시선이 파악하는 장애인이란 매우 무기력하기만 한 존재, 비장애인인 타인의 호의나 악의에 의해 그 삶의 질이 결정될 뿐인 수동적 존재라는 점을 전제하기 때문일 것이다.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살아가는 장애인이 안락한 침대에서 잠들고, 좋은 식사를 하는 등 양질의 ‘돌봄’을 받고 있다면 시혜와 동정의 시선은 장애인 거주시설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장애인에게 행해지는 ‘돌봄’의 방식과 내용을 일방적으로 비장애인 전문가에서 결정될 뿐이라면, 장애인 당사자가 거주시설의 운영과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는 주체가 될 수 없다면 이는 여전히 장애인을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존재, 즉 장애인 복지의 대상으로 만드는 또 다른 방식이다. 결국 문제의 핵심에는 장애인 당사자의 주체성이 있다.

이렇게 시설에서 살아가는 장애인의 주체성이라는 문제를 중요하게 사고할 때, 가장 급진적인 의제 가운데 하나로 고민해야 하는 문제가 바로 장애인의 섹슈얼리티, 특히 여성 장애인의 섹슈얼리티이다. 하지만 ‘여성’, ‘장애’, ‘섹슈얼리티’, 그리고 ‘시설’이라는 각각의 항들만도 매우 복잡한 논점들을 형성하는 주제들인데 이를 묶어서 함께 사고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임을 인정하고 논의를 시작할 수밖에 없을 거 같다. 그래서 이 글은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 사고하기 위한 단초적 고민만을 풀어낼 수밖에 없다.

2. 시설은 시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고민은 우선 시설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내가 던지려는 질문은 하나의 역설을 포함한다. “시설은 과연 시설에만 있는가?” 이는 시설을 특정한 공간으로서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 장애와 비장애의 관계가 구조화되는 일반적 방식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시설이건 일반적 사회에서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맺는 관계의 저변에는 ‘시설의 효과’라는 것이 깔려 있지 않은가 하는 물음이다. 시설의 효과는 구체적 시설들을 넘어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 형태 일반에 작용한다.

탈시설 운동으로 인해 사실상 수용시설이던 장애인복지시설이 일정하게 인권화된 복지시설로 변모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지만 장애인거주시설은 본질적으로 비장애인에 의한 장애인에 대한 통제장치라는 성격이 강하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하나의 사회적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 불편을 느끼지 않고 공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이상,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바람처럼 보인다. 왜 그럴까? 현존하는 사회적 공간의 생활조건은 비장애인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이러한 생활조건을 장애인이 장애로 느끼지 않도록 하려면 매우 막대한 비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도로나 건물하나만 생각해봐도 분명하다. 모든 건널목의 교통신호체계가 장애인의 이동속도를 고려해 세팅돼야 한다. 모든 건물에 장애인 접근성을 보장하려면 그 비용이 매우 크다. 더욱이 자본주의 하에서 이렇게 공적복지를 위해 발생되는 비용의 많은 부분은 국가가 감당해야 하는데, 국가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비용지출을 낭비라고 파악한다. 그러니 국가는 장애인들을 특정한 공간에 모아놓고 생활하게 하고 그 공간에만 장애인의 삶을 위한 일정한 편의를 집중시키는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 장애관리비용을 최소화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장애인 관리방식은 사회적 장에서 장애인을 보이지 않게하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단지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일상에서 잘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보다 근본적 차원에서는 양자의 직접적 관계가 최소화되는 것, 혹은 양자 관계의 간접성을 최대화한다는 것을 뜻한다.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장애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라는 질문 자체를 던지지 않게 되는 것, 그러한 질문 자체가 비장애인의 일상적 삶에서 삭제되는 것을 뜻한다. 비장애인은 장애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까에 대한 고민도 특별한 노력도 할 필요가 없는 일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를 최소화하는 것, 장애인을 비가시화하는 장애인의 관리방식은 이들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문제들, 소위 장애인‘문제’들이라고 불리는 문제들을 전문가의 몫으로 축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해결 주체는 바로 전문가들이다. 때로 복지시설의 전문가, 장애학을 연구하는 전문가, 특수교육 전문가, 장애인정책 전문가, 의료전문가 등이 장애인문제를 ‘해결’하는 일차적인 주체로 등장하는 것이다. 장애‘문제’의 해결과정이 이루어지는 기본적인 장이 전문가적 영역으로 설정된다는 것은 전문가의 권력이 작동하는 공간이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장애인이 전문가의 통제와 관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장애‘문제’의 해결과정에서 장애인의 능동성, 문제 해결의 행위자이자 결정행위자로서의 참여가능성을 원초적으로 배제하는 것이다.

시설은 바로 이러한 효과를 내는 일종의 사회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장애인을 비장애인과의 관계로부터 축출해 비가시화하는 것. 장애인을 전문가의 통제대상으로 만들어 장애인의 주체성을 삭제하는 것. 비장애인 중심으로 구축된 사회적 삶의 공간을 ‘정상적인 것’으로 비장애인이 인지하도록 해 비장애인과 장애인 양자가 서로 공존하고 간섭하며 살아가는 관계에 대한 고민 자체가 필요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설의 효과는 그것을 아무리 ‘인권친화적 공간’으로 개선하더라도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시설은 단지 구체적인 공간을 점하고 있는 특정한 시설들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장애인을 비장애인들이 중심이 된 세계에서 비가시화하는 모든 방식이 사실상 시설의 효과인 것이다. 탈시설 장애인들이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지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형성해야하는 일상적 관계라는 문제를 공동의 의제로 만들어낼 수 없다면 이는 시설의 암묵적 연장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탈시설의 정치학은 시설로부터 나오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독립생활을 하는 것에 의해 확장되지만 장애와 비장애를 나누는 경계를 침식하고 장애와 비장애의 관계가 일반적 사회제도 속에 어떻게 기입하게 할 것인가를 사회적 쟁점으로 확대돼야 하는 과제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탈시설의 정치학은 단지 구체적인 시설로부터 독립하는 문제를 넘어서 장애인의 사회적 위치 자체,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형성하는 관계의 성격을 재규정하는 정치적 함의를 가져야 할 것이다.

3. 시설-장애-여성-섹슈얼리티를 말한다는 것

이러한 맥락에서 시설 내의 장애-여성-섹슈얼리티에 대해 묻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우선 장애인의 주체성과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성을 비장애인이 다시 생각하도록 만드는 담론적 실천의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즉 이러한 담론은 다수의 장애인이 아직도 사회적 관계의 영역에서 비가시화돼 있는 상황에서 장애인의 구체적 존재를 가시화하는 실천의 방식이다. ‘장애인이도 인간이다’는 구호를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비장애인들이 손쉽게 전유하는 것을 방해하는 효과를 일으킨다. 시설에 거주하는 여성 장애인은 성적 욕망의 주체라는 담론은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들을 인지하는 일반적 방식에 혼돈을 불러오게 만든다. 착한 장애인, 불쌍한 장애인, 순수한 장애인 등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존재로서 장애인이라는 일반적 이미지를 위협하는 것이다.

이는 장애인을 사회적 관계성의 영역에서 배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비장애인들의 감각체계를 교란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에 의해 비가시적 존재로 규정된 위치를 거부하는 주체화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시설 안에서 살아가는 장애인들, 더욱이 가부장제의 성적 규범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다시 한 번 주변화된 여성 장애인의 섹슈얼리티를 인권화한다는 것은 단지 그이들의 성 생활 위한 모든 편의를 마련하는 것으로 ‘장애 여성의 성적 복지’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이들이 성적 욕망의 주체로서 실천하고 그러한 성적 실천을 위한 환경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주체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런 편의는 시급하게 마련돼야 한다. 성교육, 성관계나 연애의 프라이버시를 보장할 수 있는 공간과 문화적 분위기, 임신 및 출산과 임신중지에서 자기결정권 등은 확보돼야 한다. 한국사회의 시설에서 이러한 편의 보장도 너무나 요원한 문제다.

그러나 장애 여성의 성적 욕망을 위한 일체의 편의보장이 여전히 시설 내의 문제로 끝난다면, 기존 시설을 섹슈얼리티의 차원에서 보다 인권친화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에 그친다면, 시설이 가지는 근본적인 정치적 효과가 크게 달라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설 내부에서 여성 장애인의 섹슈얼리티를 묻는다는 것은 이들의 성생활을 잘 보장하기 위한 정책에 대한 고민이라기보다는 시설에 의한 고립화와 수동화를 넘어서기 위한 길을 찾으려는 모색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설 거주 장애인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말들이 더욱 많이 공론영역으로 침범해 들어와야 한다.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그이들의 경험들, 그것이 통제의 경험이건, 위반의 경험이건, 사랑의 경험이건, 그러한 경험들에 대한 당사자들의 담론들이 보다 더 많이 시설 밖의 사람들에게 들려야 한다. 이러한 말들의 확산, 담론적 실천은 장애인을 비가시적 존재로 만드는 사회 속에서 장애인의 주체성을 가시화하는 하나의 정치적 실천인 것이다.

4. 탈시설의 성정치학을 위하여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물음의 또 다른 의미는 그 동안 투철하게 전개되어 왔던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재구성에 관한 고민을 촉구하는데 있다. 장애운동이 당면한 권리구제를 넘어서(물론 이것도 매우 시급한 과제이고 반드시 수행되어야 하는 활동이지만), 장애해방을 고민한다면 그 해방의 의미를 또한 이론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이다. 다시 말해, 구체적 이슈에 대한 정책적 솔루션이 마련되어야겠으나 이를 위해서도 각 이슈들을 관통하는 이론적 입지점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시설 내 장애 여성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고민은 정책적 고려 이전에 ‘시설’, ‘장애 여성’, ‘섹슈얼리티’ 등 각 항에 대한 개념 규정과 각 항들이 맺고 있는 관계 및 이와 결부된 사회적 조건에 대한 이론적 해명을 요청한다. 그러할 때 진보적 장애인운동이 장애인의 섹슈얼리티에 대해서, 성적 욕망의 주체로서 장애인에 대해서, 특히 여성 장애인의 성적 주체성의 문제를 운동의 의제로 얼마나 고민해 왔는지에 대한 성찰이 유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진보성이 비장애인들의 남성중심적으로 형성된 진보성과 얼마나 다른 종류의 것인지를 묻게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진보적 장애운동에 성차와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기입될 때 진보적 장애운동의 이론은 어떻게 변용될 것인가라는 효과를 말이다.

또한 이 질문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것인 만큼 기존의 성정치학에 대한 비판적 질의를 포함하기도 한다. 비장애인의 성을 중심으로 사고되고 실천돼 온 성정치학에 장애의 관점을 기입할 때 그것은 어떤 것이 돼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 말이다. 장애인 여성의 관점에서 사고되고 구성되는 성정치학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이론적 모색이 요청된다. 장애인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물음은 성정치학과 진보적 장애운동이론 양자가 서로 맞물리면서 상호 변용을 촉발하게 하는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을 통해 형성 가능한 진보적 장애운동의 한 이론적 입장을 ‘탈시설의 성정치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성정치학과 진보적 장애운동이론의 상호 변용은 장애인을 세계와의 관계로부터 배제해 고립시키는 시설의 효과, 그렇게 고립된 이들을 전문가의 통제권력 하에 종속시키는 시설의 효과를 해체하고 장애인이 세계 속에서 비장애인 및 다른 장애인과 어떤 사회적 관계를 구축할 것인가를 모색하는 정치학, 그런 관계에 대한 고민과 구성활동에 장애인 역시 비장애인과 평등한 주체로서 참여하는 정치학에 성차와 섹슈얼리티의 입장이 개입되는 이론으로서 탈시설의 성정치학이라는 틀을 말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