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노동자의 책> 이진영 대표에 대한 구속은 촛불에 대한 공격이면서, 동시에 국가보안법이 얼마나 황당무계하고 시대착오적인 악법인지를 다시 보여 줬다. 서점이나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온라인에 올리고 판매했다고 구속되는 일이 언제든 가능한 것이다.

나도 10여년 전에 국가보안법으로 두 번 구속된 적이 있다. 당시 나에게 적용된 것은 국가보안법 7조였다. 내가 반국가단체, 즉 북한을 ‘찬양·고무’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북한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 관료들이 노동자를 억압하는 체제이며, 북한 노동자들은 관료집단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도 말이다.

두 번째 구속됐을 때 검찰이 나를 국가보안법으로 기소한 증거물은 이런 것들이었다. 대학 수업 때 제출한 ‘국가보안법 왜 문제인가’ 리포트, 한 잡지에 기고한 ‘조선일보의 제 몫은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글, 첫 번째 구속됐을 때의 최후진술문을 온라인에 올린 것.

이것이 ‘반국가단체(북한)를 찬양·고무하고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한 내용이라는 것이었다. 이진영 대표의 구속과 내가 겪은 경험들은 국가보안법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이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법?

보통 국가보안법을 옹호하는 지배자들은 이 법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법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되려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법이다. 헌법에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제19조),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제21조), ‘학문과 예술의 자유'(제22조) 등이 언급돼 있지만, 국가보안법은 이 모든 것을 부정한다.

특히 국가보안법의 7조에서 이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국가보안법 7조는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찬양․고무하거나, 또는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하고 “이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를 구성·가입”하거나 “이런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 수입, 복사, 운반, 반포, 판매 또는 취득”하는 행위를 처벌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7조로 인해 정부는 사상·표현의 자유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고,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손쉽게 구속할 수 있다. 정권과 체제를 비판하는 주장은 ‘반국가 단체 찬양·고무’라고, 정권과 체제에 반하는 조직과 활동은 ‘이적단체 구성·가입’이라고, 그런 내용의 책과 글을 쓰고 읽는 것은 ‘이적표현물 제작, 배포, 소지’로 옭아맬 수 있는 것이다.

토머스 제퍼슨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자유 중의 자유”라고 말했을 정도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인데 국가보안법은 이 권리를 원천적으로 부정·제약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웃지 못할 ‘블랙코미디’를 만들어 왔다. 예컨대 박정희 정권 때, 말다툼하다가 상대방을 “김일성보다 나쁜 놈”이라고 욕한 사람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됐다. 왜냐면 이 말대로 면 김일성이 ‘제일 나쁜 놈’이 아니라 ‘두 번째로 나쁜 놈’이 되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이 사람은 몇 년간 구속 생활을 마치고 나와서 홧김에 “그런 말도 못하면 이 나라가 북한보다 나은 게 뭐냐”고 했다가 다시 구속됐다.

노태우 정부 때는 화가 신학철 씨의 <모내기>라는 그림이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됐는데, 이유는 이 그림의 위 쪽(북 쪽)은 아름답고 평화롭게 그려졌는데 아래 쪽(남 쪽)은 더럽고 흉측하게 그려져 있다는 거였다. 북한을 찬양·고무했다는 것이다.

이런 블랙코미디가 단지 과거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은 몇 년 전 북한 공식 트위터를 비웃고 조롱하면서 리트윗했다가 구속된 사례에서 드러난 바 있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국가보안법 ‘악용’의 결과가 아니라 국가보안법 그 자체의 논리적 결과라는 것이다. 그럼 이런 희대의 악법은 어떻게, 왜 만들어진 것일까.

국가보안법의 기원과 목적

국가보안법은 1948년 12월 1일 제정됐다. 1948년은 제주 4․3 항쟁과 10월 ‘여순반란사건’이 있었던 해이다. 이처럼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 점령과 분단 시도에 저항하는 민중항쟁이 거세게 타오르자 위기를 느낀 이승만 정부는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치안유지법' 고스란히 베껴서 국가보안법을 만들었다.

당시 국가보안법상 ‘수괴’, ‘간부’로 지목돼 처벌받은 사람들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위원장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여성․학생․농민 조직 등 대중조직 위원장들이었다. 이처럼 처음부터 국가보안법은 국내의 저항세력을 표적으로 삼았다.

남북한 분단과 미·소 냉전이라는 상황에서 만들어진 냉전입법이지만 ‘북한의 위협 때문에 국가보안법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럴듯한 핑계였다. 이것은 남북한 지배자들이 경쟁하면서도 때로 내통하고 협력하는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어 온 것에서 반증된다.

대표적으로 김영삼 정부 때인 1996년 4.11 총선 때 신한국당이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북한 측에 판문점 근처에서 총격을 해달라고 몰래 부탁한 ‘판문점 총격 요청 사건’이 있다. 1997년 대선 이후에는 ‘북풍 사건’ 조사 과정에서 주요 대선 후보 모두가 북한 쪽과 거래를 제안하거나 거래했음이 밝혀졌다.

사실 고위관료와 재벌들(중앙정보부장 이후락과 장세동, 노태우 정부 때 박철언, 대우 김우중과 현대의 정주영·정몽헌)은 국가보안법은 아랑곳 않고 안방 드나들 듯 마음대로 북한을 ‘잠입·탈출’하고 ‘찬양·고무’ - 정주영 “예의 바르고 효심 많은 [김정일] 장군님” - 해 왔다. ‘북한 위협’은 주되게 국내의 반대자들을 탄압하기 위한 핑계였던 것이다. 사실 ‘내부의 적’을 치기 위해 ‘외부의 적’을 핑계 대는 것은 고전적인 수법이다.

러시아의 스탈린 정권은 자신들의 정적인 트로츠키를 공격하면서 그를 ‘제국주의의 첩자’로 몰았다. 1930년대 미국의 매카시즘은 국내의 노동운동가들을 ‘소련의 첩자’로 몰면서 공격했다. 북한 김일성 정권도 박헌영을 사형시키며 ‘미국의 첩자’라는 혐의를 씌웠다.

북한의 위협이 주로 핑계였다는 것은 지금까지 국가보안법 구속자 중 간첩죄인 3조 구속자가 거의 없다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들마저도 대부분 고문 등으로 조작된 것이었다. 구속자는 대부분 국내에서 정권과 체제에 반대해 투쟁한 노동자, 학생, 활동가들이다.

소련과 동유럽의 몰락 이후 1991년 국가보안법이 개정되면서 7조 1항의 “국외 공산계열에 동조[하는 자]”라는 문구가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하는 자]”라고 바뀌면서 국내 정부·체제 비판 세력 탄압이라는 이 법의 성격은 더 분명해졌다.

국가보안법의 역사: 독재 정권을 거쳐 민주화 이후까지

국가보안법은 이승만 독재 정부를 무너뜨린 4․19 혁명 이후 한때 무력화되어 거의 적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이 법을 다시 되살렸다. 박정희는 노동자 민중에 대한 초착취를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이루려 하면서, 거대한 탄압이 필요했다. 박정희는 집권 기간 동안 국가보안법으로 1천9백68명, 반공법으로 4천1백67명을 구속했다.

1980년 광주 항쟁을 짓밟고 광주학살로 등장한 독재자 전두환은 국가보안법으로 1천5백65명을 구속했다.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집권한 독재자 노태우 정부 때 국가보안법 구속자는 전두환 정권 때보다 더 많았다.

노태우는 1987년 항쟁 이후 터져 나오는 투쟁들을 억압하는데 국가보안법을 이용했다. 특히 ‘7·8·9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억압하는 데 주력했다.

국가보안법 옹호자들은 “민주화 이후에는 국가보안법의 남용이 없어졌다”고 말한다. 물론

87년 민주화 항쟁, 1997년 노동자 총파업, 2002년 여중생 촛불시위 등을 거치며 노동자 민중 투쟁의 힘과 성과로 국가보안법이 어느 정도 약화됐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였을 뿐 ‘민선/ 문민정부’들도 국가보안법을 휘두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김영삼 정부는 1996년 학생자치단체인 한총련을 이적단체 규정했고 집권 5년 동안 무려 1천17명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첫 1년 간 국가보안법 구속자 수(4백13명)는 심지어 전두환, 노태우 집권 초보다 더 많았다. 당시 법무장관 박상천은 “경제 위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이 필요하다”며 IMF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에 맞선 저항을 억압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이용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 국가보안법 구속자가 감소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운동의 성과라는 점이 다시 강조돼야 한다. 또, 국가보안법 구속자는 줄어든 반면 집시법과 노동악법 등에 의한 구속자가 늘어났다는 점도 봐야 한다.

참여정부 기간 동안 구속 노동자의 수는 다음 정부인 이명박 정부보다도 훨씬 더 많았을 정도였다. 더구나 참여정부는 ‘한총련을 이적단체에서 제외하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물론 참여정부는 2004년말에 “국가보안법을 이제 박물관으로 보내자”며 기대를 준 바 있다.

참여정부의 약속 파기와 되살아난 국가보안법

그러나 그것은 형법보완과 대체입법을 통해 국가보안법의 핵심을 살리겠다는 것에 그쳤다. 예컨대 ‘이적단체’를 ‘내란목적단체’나 ‘국헌문란목적단체’로 이름을 바꾸는 식이었다. 하지만 당시 한나라당과 보수우익들은 ‘한 글자도 고칠 수 없다’며 그것마저 결사 반대했다.

당시 한나라당의 김용갑은 국회에서 ‘국가보안법 사수’를 외치다가 졸도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박근혜가 ‘글자 한두개는 바꿀 수 있다’고 하자 조갑제는 “[박근혜가] 부친에게 누를 끼쳤다”고 열을 올렸다.

결국 참여정부는 한나라당 등 보수우익들의 압력에 굴복했다. 그해 연말에 국회를 통과한 것은 국가보안법 폐지안이 아니라 파병연장 동의안, 경제자유구역법 등이었다. 당시 국회 앞에서 탈수증, 근육경련까지 무릅쓰며 국가보안법 폐지 단식 농성을 하던 사람들은 항의하다가 참여정부 경찰의 방패에 찍혀 피 흘리며 쓰러져야 했다.

이렇게 살아난 국가보안법은 참여정부 정권 말기에 ‘일심회’ 조작 사건과 마녀사냥을 일으키는 데 이용됐다. 참여정부는 한미FTA와 파병 등에 맞서 싸우던 민주노동당을 분열·파괴시키는 데 ‘일심회’ 사건을 이용했다.

국가보안법은 이명박 정부를 거치고 박근혜 정부에 이르면서 더욱 더 그 악랄한 본질을 드러냈고, 종북몰이 광풍을 일으켜 왔다. 그 절정은 바로 ‘RO 내란음모' 조작 사건과 통합진보당 해산 공작이었다.

그때마다 항상 진정한 핵심은 북한에 대한 태도가 아니라, 정권과 체제에 반대하고 기득권 세력에게 위협이 되느냐의 문제였다. 국가보안법을 이용한 탄압은 항상 우파를 결집시키고, 진보좌파 진영을 위축·분열시키는 데 이용됐다.

촛불이 3달 가까이 타오르고 1000만 명이 촛불을 들면서, 저들이 국가보안법을 다시 집어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나라 자본주의 국가의 핵심에 자리잡은 공안세력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고, 몰락하는 박근혜와 흔들리는 기득권 구조를 다잡기 위해서 국가보안법이라는 낡고 더러운 칼을 꺼내들었다.

촛불혁명이 박근혜라는 꼬리 자르기에 멈추고 싶지 않다면, 박근혜 이후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이루고자 한다면, 국가보안법은 그것을 위해서 반드시 우리가 함께 힘을 모아서 뿌리뽑아야 할 독성 위험물질이다.

역사는 단지 민주당으로 정권교체가 된다고 해서 국가보안법이 없어지진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줬다. 자유민주주의조차 자유주의 세력의 위로부터 개혁보다 단결한 피억압 민중의 아래로부터 투쟁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폐지와 모든 양심수 석방은 촛불의 요구가 돼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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