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9명의 이사 중 MBC 출신 이사는 두 명이다. 기자 출신의 유기철 이사와 기술국 출신의 이완기 이사 모두 야당 추천 이사다. 유 이사는 대전MBC 사장을, 이 이사는 울산MBC 사장을 지내 상대적으로 MBC 사정에 밝고 방문진 이사들 중 MBC 구성원들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편이다.

유 이사도 2010년 김재철 사장이 MBC의 수장이 된 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지역MBC 사장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김재철 전 사장과는 개인적인 친분은 있었지만 가는 길이 달랐다. 김재철 체제 이후 MBC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과거엔 노사가 대립하고 생각이 달라도 서로에 대한 ‘존중’은 있었지만 2012년 170일 파업 이후 노사갈등은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

유 이사는 “나도 본사에서 보도제작국장을 하고 대전MBC 사장도 했지만 우리는 일할 때 인사상 경쟁자여도 아군과 적군을 편 가르지 않고 보수·진보적 생각이 달라도 모두 교류하면서 소통과 화합이 있었다”며 “지금은 일절 그런 게 없고 완전히 서로 척결 대상으로 여기고 감정적으로 대립하는 모습을 밖에서 보면 안타깝다”고 말했다.

공영방송에 대한 의식과 양심이 제대로 박힌 사람들이 MBC를 이끌어 가는 게 아닌, 오로지 청와대의 눈치만 보며 어떡하면 자리보전할 궁리만 하는 이들이 MBC를 장악하고 있다는 게 유 이사가 진단하는 MBC의 추락 이유다.

그는 MBC가 국민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선결 과제 역시 ‘인적 청산’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유 이사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 유기철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사진=강성원 기자.
- 방문진 이사로서 현재 MBC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방송사의 기본은 시청자의 신뢰와 시청률, 경영수지 세 박자가 맞아야 한다. MBC는 가장 중요한 시청자 신뢰도가 완전히 추락했다는 게 뼈아픈 대목이다. 청와대 낙하산 사장이 와서 철옹성을 구축한 결과 청와대 방송이 돼버렸다. 수구세력의 전진 기지화 된 거다. MBC는 가장 먼저 인적청산부터 해야 한다. 그래야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시청률과 경영수지는 단기간 회복되는 측면도 있으나 시청자 신뢰를 얻기는 어렵다. 공영방송 자체가 정권에 휘둘려선 불가능하다. 지금 워낙 공고하게 그들만의 리그가 형성돼 있어 외부로부터의 충격도 필요하다.”

- MBC 기자 출신이기도 한데 과거엔 어땠나?

“보도지침 시절보다 지금이 심하다. 보도지침 시절에도 낮에는 선배들이 부당한 지시를 해도 밤에는 미안한 생각이라도 있어 인간적으로 통하는 게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들이 100% 맞다는 것 아니냐. 그때도 노사가 다퉜지만 서로 원수가 돼 부당전보하고 그러진 않았다. 지금 MBC 경영진은 단지 보수여서가 아니라 자리 욕심이 있어서 그런 거다. 이들 앞에서 공영방송 얘기하는 것 자체가 현실성이 거의 없는 얘기다. 현 경영진 특징이 대부분 인정을 못 받다가 ‘김재철 시대’가 열리면서 발탁된 이들이다. 밀려 있던 사람들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권력의 부름을 받았으니 충성심이 강한 거다.”

- 본인도 MBC 간부와 임원을 지냈는데.

“지금 방문진 여권 이사들이 과거 MBC를 ‘노영(勞營)방송’이라고 하는데 겉으로 봤을 때 그 당시 사장들이 노동조합의 의견을 수용한 건 사실이지만 노조에 휘둘려서 그랬던 건 아니다. 그때도 공영방송은 정권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그런 점에서 노영방송이란 건 있을 수 없다. 최소한 그때는 청와대 홍보수석이나 대변인이 ‘좀 도와달라’는 정도였다. 지금은 그게 아니라 무조건 ‘넣어라’ ‘빼라’ 하는데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예전엔 방송 자율성을 해치고 제작에 노골적으로 개입한다거나 회사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직원을 좌천하거나 쫓아내진 않았다.”

-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보나?

“굉장히 어려움이 있겠지만 불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지금 상황은 리모델링(remodeling) 수준을 넘어 리빌딩(rebuilding) 수준까지 갔다. 창조적 파괴 다음 창조적 혁신을 해야 한다. JTBC가 생긴 지 5년이 지났는데 손석희 사장이 가서 금자탑을 쌓은 걸 보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몇 번의 고비에서 제대로만 하면 과거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지금 경영진은 자기 자리만 유지하면서 공영방송으로서 시청자의 마음을 살 만한 의지가 없다. 사람이 바뀌면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물론 시일이 걸리고 수구 기득권 세력이 그냥 물러나지 않고 반발하는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 지금 보도국에만 100명 가까운 경력 기자들이 들어와 MBC가 완전히 두 쪽 나고 경쟁력도 추락했다. 경영진 인적청산 후에도 아래에 남은 앙금이 해소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거다. 차기 경영진이 개선해야 할 시급한 문제다.”

▲ 지난해 2월18일 ‘MBC를 국민의 품으로! 공동대책위원회’는 방송문화진흥회 정기이사회에 앞서 서울 여의도 방문진 건물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백종문 녹취록’ 진상규명과 안광한 사장 해임을 촉구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방문진법 개정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건가.

“법과 제도도 중요하지만 그걸 운용하는 이들의 의식과 양심이 더 중요하다. 방문진법도 청와대가 공영방송을 장악하려고 악용했기 때문에 문제인 거다. 방문진법 개정안이 논의되면 지금보단 나아지겠지만 의식과 양심이 제대로 된 사람들이 와야지 법을 고쳐도 악용하려고 하면 대책이 없다. 공영방송 MBC를 권력의 품에서 국민의 품으로 돌려주는 게 중요하다. 청와대 홍보수석이 방송사와 신문사, 통신사 보도책임자에게 수차례 전화하는데 ‘KBS-이정현 녹취록’이 나온 건 빙산의 일각이다. 지금 국회에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이 논의되고 있는데 앞으로 새로 꾸려질 방문진 이사진은 공영방송 장악 책임이 있는 이들은 추천 권한에서 빠져야 한다. 근본적으로 청와대 관여 금지법 같은 게 있어야 한다. 모든 문제가 거기서 비롯된 거다. 청와대의 관여를 원천봉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 공영방송 정상화가 중요한 이유는?

“지금 지상파가 못한 걸 종편이 하고 있다. 지상파만 대망신을 당하고 이 모양 이 꼴이 된 게 공영방송 장악 기도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다. 결국 정권이 무너지는 데 도와준 셈이다. 공영방송이 살아서 권력의 편이 아니라 국민 편에서 방송을 하면 지금 벌어진 종편과의 차이도 없어지고 지상파 방송도 살 수 있다. JTBC의 신뢰도가 높은 게 기대 이상으로 최순실과 삼성에 날카로운 보도를 하기 때문이다. 공영방송은 시청률을 어느 정도 포기하더라도 해야 할 보도를 해야 하고 종편이 자본·인력 한계로 못 하는 것도 하고 한류 콘텐츠 제작 등 막중한 역할이 있다. 가장 중요한 건 국민의 신뢰다. 다채널 다매체 시대에는 시청률보다는 신뢰다. 그 신뢰도만 있으면 나머지 시청률은 엔터테인먼트로 올리면 되는 거다. 공영방송 시청률이 과거처럼 과점시대를 누릴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신뢰도 회복이 우선 과제인데 지금은 오히려 정반대로 가고 있다.”

- 현 경영진에게도 이런 지적을 했나.

“방문진 이사가 되고 나서 안광한 사장 업무보고 때 ‘낙하산 사장으로 온 거 다 안다. 체제 유지 위해 폭압 정치하고 자기들만의 리그 구축한 것도 안다. 그러나 노사 간 대립이 있으면 최종 책임은 사장이다. 지금이라도 소통하고 화합해라. 나눠 치는 경영이 아닌 합하는 경영을 하라’고 당부했다. 그 후에 안 사장은 되레 일부 이사들이 정치적 구태와 고질병을 일삼는다고 하더라. 그런 거 보면 안타깝다.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MBC 경영진은 지금까지 MBC에 무슨 짓을 한 건지 되돌아봐야 한다. 오늘날 MBC의 몰락은 이미 예견돼 있었다. 누가 충고하면 받아들일 자세도 안 돼 있는데 그 조직이 발전하겠나. 더 이상 경영진은 일 벌일 생각을 하지 말고 반성해야 한다. 역사적 심판엔 시효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 2월 주총에서 MBC 사장이 교체될 수도 있나.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 예년에 보면 2월 말에 선출했는데 방문진법이 국회에 계류돼 있어 여건상 연기하는 게 현실적으로 타당해 보인다. 조기 대선을 앞두고 있어 아마 다수를 차지한 방문진 여권 이사들은 무엇이 보수 정권 재창출에 유리한지 생각하고 있을 거다. 탄핵 정국과 정계 재편, 조기 대선이라는 세 가지 외부 변수와 맞물려 있어 MBC 사장 선출 일정 자체가 불투명하다. 차기 사장의 덕목으로는 공영방송에 대한 신념과 이념적 균형 감각 있어야 하고, 지금 내부의 비정상을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는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후배들이 따를 수 있는 카리스마도 필요하다.”

- MBC 기자 출신 방문진 이사로서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소수 이사로서 악을 써가며 버티는 이유는 후배들에게 희망이 되기 위해서다. 작은 불빛이더라도 나름 소수 이사로서 최선의 역할을 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MBC를 정상화하기 위해 가열하게 투쟁하고 있으니 후배들도 절대 희망을 잃지 말고 기다려 달라. 지금 MBC 구성원들은 구명조끼를 입고 차가운 바닷물 속에 있는데 포기하지 않고 견디다 보면 반드시 구조될 거다. 생활인이어서 어려움이 있지만 복원력 유지를 위해 참고 버티면 공영방송을 바로 세울 날이 온다. 역사를 길게 보면 항상 정의가 이겼다. 공영방송 이사로서 이 사태가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는데 미안한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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