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 특별검사팀은 10일 박근혜 대통령이 일부 문예지에 지원 예산 삭감을 지시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특검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2015년 김상률 당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비서관에게 "창작과 비평과 문학동네 등 좌파 문예지에만 지원을 하고, 건전 문예지에는 지원을 안해 건전 세력의 불만이 많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의 진술 이후 문화체육관광부는 이들 출판사에 대한 지원을 대폭 줄였다. 정부는 우수도서지원사업에서 창비의 책을 2014년 18종에서 5종으로, 문학동네의 책을 2014년 25종에서 2015년 5종으로 줄였다.

이 출판사가 '블랙리스트'가 된 이유는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한 책을 출간했기 때문이다. 창작과 비평(창비)은 2015년 1월 '금요일에 돌아오렴: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을 출간했고 문학동네는 2014년 10월 '눈 먼 자들의 국가'를 출간했다.

창비는 현재 세월호 1000일을 기하며 '금요일에 돌아오렴'을 인터넷 서점 알라딘, 예스24 등에서 전자책으로 무료배포하고 있다.

문학동네의 '눈 먼 자들의 국가'는 세월호 참사에 대해 김애란, 김행숙, 김연수, 박민규, 진은영 작가 등이 쓴 글을 모은 책이다. 박근혜 정부는 이를 두고, '좌파 문예지'라고 선정하고 지원을 끊은 것이다. 다음은 문학동네의 '눈 먼 자들의 국가'를 발췌한 내용이다.

박민규, '눈먼 자들의 국가'

-한 여당 의원은 말했다. 유가족에게 수사권과 기소권을 준다는 것은 피해자에게 칼자루를 쥐여주는 것과 같다고. 나는 그에게 묻고 싶다. 그럼 가해자에게 칼자루를 쥐여줘야 하냐고. 공공의 적이 공공일 때 공공의 적인 공공에게 어떤 혐의가 있을 때 그 공공을 심판할 수 있는 건 누구냐고 묻고 싶다. (53p)

-선박이 침몰한 ‘사고’이자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 사전적 해석을 빌리자면 ‘사고’는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을 의미한다. 반면 ‘사건’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주목받을 만한 뜻밖의 일을 의미하는데 거기엔 또 다음과 같은 해석이 뒤따른다. 주로 개인, 또는 단체의 의도하에 발생하는 일이며 범죄라든지 역사적인 일 등이 이에 속한다. (57p)

-(대한민국은) 내릴 수 없는 배다. 일본이 36년간 운항하던 배였고 우리가 자력으로 구입한 선박이 아니었다. 일종의 전리품이었다. 

배는 늘 통제되고 관리되어왔다. 2층 객실에서 3층 객실로, 이어 4층 객실로 올라가는 계단은 언제나 좁고 미어터졌다. 붐비는 통로에서 또 복도에서 우리는 늘 방송을 들었다. 잘살아보자는 방송, 하면 된다는 방송이었다. 올라가기 위해, 한 층이라도 더 올라가기 위해 우리는 노력했다. 발전과 번영은 종교가 되었고 배가 왜 이렇게 기울었지? 의혹을 제기하면 종북이란 이름의 이단으로 몰려야 했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기울어야 했던 국민이다. 기울어진 배에서 평생을 살아온 인간들에게 이 기울기는 안정적인 것이었다. (64p)

진은영,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니체는 인간이 빨간 뺨을 가진 짐승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너무 자주 부끄러움을 느끼는 존재이기에 그렇다. (...)니체에 따르면, 수치심은 외적 권위에 대한 고려에서 비롯되는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자긍심과 명예가 충족되지 못했을 때 그 결핍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로서 작용한다. 따라서 수치심은 자기 고양을 욕망하는 고결한 존재가 갖는 감정이다. (72p)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연민은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73p,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가운데 인용)

-정치가 있어야 할 곳에 연민과 시혜의 언설이 난무하는 사회가 어째서 뻔뻔스러운 사회인지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다. (75p)

황정은, '가까스로, 인간'

-조금도 상처입지 않으면서 보답받고 응답받는 신뢰같은 거, 나는 믿지 않겠다. 조금 더 상처입어도 좋다. 그것을 감내하고 믿어보겠다. (93p)

-세월은 돌이킬 수 없게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버렸다. 나 역시 그 세계에서 발을 뺄 수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만들어버렸다. 어른들을 향해서, 당신들은 세계를 왜 이렇게 만들어버렸습니까, 라고 묻는 입장이 더는 가능하지 않게 된 것이다. (93p)

-얼마나 쉬운지 모르겠다.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은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으니 더는 기대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이미 이 세계를 향한 신뢰를 잃었다고 말하는 것은. 고백을 해보자. 4월 16일 이후로 많은 날들에게 나는 세계가 존나 망했다고 말하고 다녔다. 무력해서 단념하고 온갖 것을 다 혐오했다. 그것 역시 당사자가 아닌 사람의 여유라는 것을 나는 7월 24일 서울광장에서 알게 되었다. (97p)

-그녀는 말했다. 엄마아빠는 이제 울고만 있지 않을 거고, 싸울 거야. 비통한 싸움에 비해 세상이 이미 망해버렸다고 말하는 것, 무언가를 믿는 것이 이제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9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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