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불평등은 소수의 이기적인 자들이 공유지에 금을 그으며 시작한다. 약자들을 ‘내 땅’에서 몰아내고 잉여물을 독차지한다. ‘내 재산’을 지키기 위해 법이 필요했다. 이를 ‘국가’라 부른다. 권력자는 한줌도 안 되지만 다수를 쪼개놓으면 특권을 유지할 수 있다. 법의 이름으로 서민의 자식들을 고용해 기득권을 방어하는데 사용한다. 경찰이 없는 상황을 혼란 상태로 규정하며 폭력을 독점한 것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한다.

권력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수험생활에 지친 고등학생은 억압적인 입시구조나 성적으로 차별하는 선생님들에게 강하게 저항하기 어렵다. 죄 없는 엄마에게 화풀이하는 쪽을 택한다. 불만과 분노는 커지지만 위쪽을 향하지 못할 때 그 힘은 상대적 약자에게 발산된다. 실업이 만성화되면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혐오가 생기고 왜곡된 정치구조에 상처입은 대중은 소수자를 찾아 혐오한다. 안타깝게도 그 혐오의 대상은 권력자들이 이미 배제하던 집단이다.

저항은 이 물줄기를 되돌리는 과정이다. 촛불의 시작은 저항이었다. 24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그알)는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편에선 2002년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미선이·효순이 사건에 책임을 묻기 위해 촛불집회를 제안했던 제종철씨의 의문사를 다루며 촛불의 역사를 살폈다. 하지만 2008년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저항하는 촛불집회를 실패로 규정하며 ‘운동권 혐오’ 프레임에 휘말려갔다.

여느 혐오가 그렇듯 혐오의 대상은 실체가 없다. 24시간 사치만 하며 남자를 등쳐먹는 김치녀나 대학을 졸업한 내국인의 일자리까지 부당한 특혜로 빼앗는 제3세계 노동자의 실체가 없듯이 폭력을 선호하고 시민들을 위협에 빠뜨려 민주주의를 망가뜨리고 싶어 하는 운동권의 실체는 없다.

그저 혐오에 노출된 약자다. 청와대가 강제해 국민의 지지를 받았던 정당을 산산조각 냈고, 생존권을 지키려 거리에 나섰던 노조의 지도자는 옥에 갇혔다. 한 사람이 가진 여러 정체성 중 하나만을 부각하는 짓, 호남이라는 이유로, 민주노총이라는 이유로,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배제하는 건 전체주의다.

기억은 변형되고 기득권의 언어로 기록된다. 그알은 2008년 촛불집회를 이렇게 규정했다.

▲ 24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화면 갈무리

“과거의 운동조직들이 광장에 참여를 하게 되고 그러면서 점차 폭력시위로 결부가 되면서 좀 좌절을 맛본, 이런 시위” (정한울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교수)

“정부가 폭력적 대응을 하더라도 이쪽에서 폭력적 대응을 맞대응을 했을 경우에는 결과가 나빴다라는 경험을 해봤단 말이죠.”, “2008년에 실패한 광장, 2014년에 실패한 광장”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책임연구원)

그알 진행자 김상중씨는 “학습효과”라는 표현을 썼고, 한 시민이 2008년에는 전문적인 시위 꾼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없었다고 발언한 내용도 방송에 등장했다.

2008년에 시민과 경찰이 충돌했고, 그래서 실패했는데 그건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운동권 탓인가? 많이 본 논리다. “비폭력, 비폭력” 2008년 8월10일자 조선일보 1면 톱기사 제목이다. 조선일보는 “아직까지 경찰을 비난하고 시위대의 폭력을 합리화하려는 추세가 여전히 주류”라고 촛불집회를 폭력집회로 규정했다.

‘폭력집회’라는 규정 자체가 비민주적인 언어다. 이번 집회를 폭력집회로 만들지, 평화집회로 만들지 결정할 수 있는 주체가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알에선 2008년 당시 경찰은 진압용 소화기 1400여개를 사용했고, 의경이 “시위자들이 너무 싫었고, 나가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발언을 전했다. 정부는 전의경들에게 특채를 주겠다며 시위대 공격을 명령했고, 실제로 다다음해 경찰 신입특채가 20여명인데 전의경 특채로 200여명을 뽑았다.

▲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를 다룬 조선일보 6월10일자 1면 톱기사

반면 2016년 박근혜 정권은 수명을 다했고, 청와대 근거리까지 행진을 허용했다. 1년 전 백남기 농민을 물대포로 쐈던 경찰이 이번엔 선택을 바꿨을 뿐이다. 2008년에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들이 ‘아동학대’를 했고, 불법집회를 주관했다며 남편 직업까지 캐묻던 권력, 집시법과 일반교통방해죄를 근거로 1476명을 입건하고 1258명을 기소했던 권력이 단지 이번엔 그러지 않기로 한 것뿐이다.

경찰은 방패를 갈아 맨몸으로 나온 시민들을 찍어 눌렀다. 같이 맞설 것인가, 물러설 것인가. 일부 맞섰던 시민들은 운동권 세력으로 낙인찍혀 과격분자가 됐고, 저항조차 못했던 시민들은 ‘선량한’ 피해자가 됐다. 피해자는 순수함을 증명해야만 피해자로서의 주장을 인정받게 된다.

그알은 2016년 촛불이 변화를 보이고 있다며 그 근거로 연행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연행 역시 주체는 경찰이다. 경찰이 연행하지 않으면 성공이고 경찰이 연행하면 실패인 셈이다. 전국에 230만이 모였다고 극찬하지만 그 뒤엔 트랙터를 몰고 여러 밤 서울을 향하다 가로막히고 경찰에 의해 피를 흘렸던 농민들은 배제됐다.

박근혜 이후를 고민하자는 지적이 빗발치는데도 그알은 그 요구를 진지하게 담아내지 못했다. 그알은 정치를 여전히 낭만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일반적으로 정치란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갈등이 전제된 개념이다. 좀 더 냉정하게 정의하면 정치는 적과 동지를 나누는 게임이다. 전선은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에 설정돼야 하는데 의경 한명 한명에 감정이입하는 방식은 싸움을 무력화한다. ‘대통령도 사생활이 있다’, ‘박근혜는 불쌍하다’는 시선이 지금의 사태를 만들었다.

이번 국면에서 놀라우리만큼 시민들의 자유를 옥죄는 집시법과 일반교통방해죄 철폐 또는 개정, 또 다시 발생할 경찰의 무력진압에 대한 대책,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의경제도의 문제 등은 이슈가 되지 않았다. 불편한 말이지만 ‘경찰 말 안 들으면 다치니까 조용히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여전히 촛불을 지배하는데도 ‘의경이 우리의 아들’이라며 개인에 감정이입한 채 정신승리로 마무리하는 건 무책임하다.

만약 헌재에서 탄핵을 결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시민들은 강하게 열망하고 있고 헌재가 민심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다. 정치는 ‘믿음’이 아닌 힘에 기초해있다. 박근혜 이후 질서에 대해 고민해야한다. 각종 제도에 대한 토론이 터져나오고, 촛불을 누구의 역사로 기록할지 고민해야한다.

2008년의 촛불의 역사를 ‘운동권이 망가뜨린 폭력집회’로 기록해선 안 된다. 2008년에 보수정권의 민낯을 봤고, 더 강하게 연대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명박 정부의 정책은 민심에 밀려 일부 지연됐고, 시민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제도를 바꿔내지 못한 한계도 있었다. 2016년 촛불의 의미는 2008년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치유할지, 시민의 자유를 어떻게 넓혀갈지 고민할 적기를 만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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