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국회에서 박근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국무총리 황교안이 대통령권한대행을 맡았다. 그로부터 열흘 남짓 동안 그가 보인 행동은 평화적 촛불혁명을 주권자혁명으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시민들의 격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는 행정부의 2인자로서 박근혜가 저지른 국정 농단에 대해 무거운 책임을 느낀다고 국민을 향해 사죄하기는커녕 ‘제왕적 대통령’에 버금가는 의전을 요구하거나 야 3당을 경시하는 듯한 행태를 되풀이함으로써 ‘박근혜 아바타’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가 권한대행을 맡은 지 나흘만인 13일 보수 일색인 ‘원로들’을 만나 대화를 나눈 것도 박근혜를 빼닮았다. 황교안은 주요한 국정 문제들은 외면한 채 13일 민생·교통 현장을 방문한 데 이어 구세군 자선냄비 성금 전달(15일), 한미연합사 방문(16) 등으로 ‘대통령 코스프레’를 한다는 비웃음을 자초했다.

황교안의 국회의장 정세균 면담을 앞둔 지난 14일 국무총리실이 “대통령에 준하는 의전을 갖춰 달라”는 뜻의 요청을 했다고 국회 관계자가 밝혔다. 황교안은 같은 날, 20~21일로 예정된 국회의 대정부 질문 출석 요구에 대해 “전례가 없다. 대통령권한대행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위중한 상황이라는 점 등을 고려해 고민 중”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국민의 대표들이 모인 국회에 가서 무정부 상태에 빠진 국정을 정상화하기 위해 대화를 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달리 있다는 뜻이었을까?

▲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황교안은 15일 이양호(전 농촌진흥청장)를 한국마사회 회장에 임명했다. ‘최순실·정유라 게이트’에 연관되어 사임한 현명관의 후임인데, ‘낙하산 인사’라는 비난을 벗을 수 없는 일이었다. 2004년에 노무현이 탄핵소추되었을 때 총리로서 대통령권한대행을 맡았던 고건의 진중하고 사려 깊은 행보와는 정반대였다. 같은 날 황교안은 야 3당 대표들이 제안한 ‘합동 회동’에 대해 개별적 면담을 주장함으로써 ‘야권 분열책’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황교안은 박근혜 정권이 국회에서 논의하지도 않고 강행한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사드 배치’도 “뒤집을 수 없으므로 그대로 현상 유지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박근혜의 독선과 오기까지 ‘대행’하겠다는 뜻인가?

12월 16일자 한겨레 1면 머리에는 ‘황교안(당시 법무부 장관), 세월호 수사 틀어막고 인사보복 했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랐다.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 현장에 가장 먼저 출동했던 해경 123정장에게 승객 구조 실패의 책임을 물어 처벌(업무상 과실치사 적용)하려는 검찰에 사실상 수사를 할 수 없도록 장기간 외압을 행사한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참사 당일 박근혜의 ‘행방불명 7시간’에 대한 의혹이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던 상황에서 해경의 구조 실패까지 불거져 여론이 악화하는 사태를 막으려는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황교안은 애초에 국무총리가 될 자격이 없는 인물이었다. 2015년 5월 박근혜가 그를 총리 내정자로 지명한 뒤 열린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는 부정과 비리에 관한 의혹이 꼬리를 물고 제기되었다. 징집 면제, 변호사 재임 당시 거액의 ‘전관예우’와 ‘전화 변론’, 법무부 장관 인사청문회 때의 ‘위증’, 법무부 장관 임명 축하금 논란,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검찰 수사에 대한 간섭, 총리 내정 뒤 세금 ‘지각 납부’ 등등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법조인’이 박근혜의 고집 때문에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은 야당 지도자들이라면 황교안이 대통령권한대행을 맡은 사실이 발표된 직후 당연히 ‘부당한 인사’라고 주장하면서 강력한 반대투쟁을 펼쳤어야 한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조선·중앙·동아일보를 비롯한 극우보수언론의 ‘황교안 체제 옹호’에 주눅이 들었던지 ‘협치’를 기대한다면서 어정쩡하게 열흘 이상을 허송하고 말았다. 그런 야당의 자세를 보고 분개한 ‘촛불 시민들’이 지난 토요일 “박근혜·황교안 퇴진”을 외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 박근혜 대통령이 12월9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총리 및 부처장관 간담회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박근혜는 지난 16일 탄핵심판사건 대리인들을 통해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24쪽 분량의 ‘답변서’에서 국회의 탄핵소추안에 열거된 위헌·위법 사항들을 모조리 부인했다. 그리고 “최순실의 국정 관여 비율은 대통령의 국정 수행 총량 대비 1% 미만이며, 이마저도 사회통념상 허용될 수 있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1%’가 아니라 ‘0.1%’라도 자연인 최순실이 국정을 농단했다면 박근혜는 그 한 가지만으로도 탄핵당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박근혜는 촛불집회에 나온 중고등학생들조차 명백한 탄핵 사유로 꼽는 위헌·위법 행위들을 깡그리 부인하고 있다. 황교안이 전문성을 갖춘 법률가라면 박근혜의 이런 답변서에 대해 그 부당함을 지적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박근혜의 ‘제1부역자’인 그가 그런 ‘용기’를 낼 리는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정권교체를 당연한 귀결로 여기며 대선 후보가 되기 위한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는 정치인들은 거창한 정책이나 집권 이후에 대한 구상을 발표하는 일보다 먼저 박근혜와 황교안을 동시에 ‘퇴치(退治)’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문재인, 이재명, 안철수, 박원순, 김부겸, 안희정을 막론하고 ‘촛불혁명’의 당연한 열매가 자신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돌아오리라고 기대하겠지만, 온갖 기득권과 국가 지배력을 독점하고 있는 극우보수세력과 조·중·동 등 언론이 호락호락하게 그런 사태를 손 놓고 볼 까닭은 전혀 없을 것이다. 

▲ 20일 오후 참여연대 회원들이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국정농단 공범 황교안은 즉각 사퇴하라'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그러니 이른바 ‘대권주자들’은 하루라도 빨리 한자리에 모여 ‘박근혜와 황교안을 동시에 퇴치하지 않으면 평화적 정권교체는 이루어 질 수 없으므로 우리가 하나가 되어 주권자들과 함께 그런 운동을 벌인 뒤, 그것이 성공하면 공정하게 대선후보 경쟁에 나서겠다’고 선언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오는 토요일의 9차 촛불집회에서 연단에 함께 올라 그런 발표를 한다면 ‘주권자혁명’을 열망하는 시민들은 기독교 신자든 아니든 간에 가장 소중한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아들일 것이다.

※ 이 글은 <뉴스타파>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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