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국민의 명예혁명’이라고 부른다 해도 결코 과찬이 아니다. ‘촛불혁명’에 마침내 국회가 탄핵안 가결로 응답했다.

앞 두 문장은 내 글이 아니다. 부러 따옴표 없이 인용했지만, 각각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설에서 따온 문장이다. 박근혜가 국회에서 탄핵 당한 직후, 가장 수구적인 두 신문조차 ‘혁명’이라 규정했다.

하지만 ‘혁명’은 도무지 실감나지 않는다. 탄핵 당한 대통령의 ‘공범’들이 여전히 ‘국정’을 장악하고 있다. 그 사이 박근혜는 탄핵사유를 전면 부정하고 나섰다. 아무 잘못도 없단다. 그렇다면 ‘임기 단축’은 왜 스스로 들먹였을까.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최대한 늦춰보려는 꼼수도 묻어난다. 최순실도 첫 공판에서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변호인 이경재는 “사회가 태극기와 촛불로 분열됐다”고 주장했다. 새누리당의 이른바 ‘친박’도 희희낙락이다. 자기정체성이 ‘친박’ 따위로 불리는 정치인은 한낱 우스개일 터인데, 전혀 아니다. 친박으로 원내대표가 된 정우택은 “진보좌파가 집권하는 것을 반드시 막아 내겠다”며 색깔론을 폈다.

▲ 12월17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8차 대규모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손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촛불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작태들이다. 그럼에도 언론권력은 반동의 조짐들을 비판하지 않는다. 제 입으로 ‘혁명’이라 ‘과찬’해 놓고도 그렇다. 아니, 정반대다. 보라, 조선일보의 고문 김대중은 아예 칼럼 제목으로 “혁명의 시작인가”를 묻는다. 그는 “다음 대권을 노리는 민주당 문재인씨의 본색이 드러나고 있다”면서 “사드 배치 반대, 한·일위안부합의 및 군사정보보호협정 재검토”를 가장 먼저 꼽는다. “박근혜표 외교를 거의 백지화”한다는 것이다. 그는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기각하면 다음은 혁명밖에 없다는 발언을 들어 “이제 촛불이 좌파 혁명의 길로 가고 있음을 확인해주는 것”이라고 쓴다. 천박한 친박의 색깔론과 무엇이 다른가.

김대중은 “결론적으로 ‘혁명’을 바란 것이 아닌 사람들이라면 더 이상 ‘촛불’에 동참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훈계한다. 같은 날, 조선닷컴은 큼직하게 “기업에 돈 뺏어 ‘농어촌 기금’ 1조 조성한다는 민주당” 표제를 내걸었다. 한·중 자유무역협정 체결에 따른 피해 보상을 위해 대기업 등에서 1조원 출연 받는 ‘농어촌상생기금법’을 처리하겠다는 민주당에 대해 “공익을 내세워 대기업 돈을 받아낸다는 측면에서 미르·K스포츠 재단 모금과 다를 게 뭐냐는 지적이 나왔다”고 쓴다. 정말 그러한가. 미르·K스포츠 재단 모금과 ‘농어촌 상생기금법’이 같은가. 언론계에 숱한 ‘김대중’들이 양산되는 꼴이다. 기사는 “야당 관계자는 내년 대선을 앞두고 포퓰리즘을 내세워 표 몰이에 나선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로 맺는다. 대체 그 ‘야당 관계자’가 누구인가? 야당을 분열시키려는 고문 김대중과 같은 수법이다.

조선일보가 착수한 ‘반동의 시작’은 다른 언론으로 퍼져갈 가능성이 높다. 이미 방송사들도 슬금슬금 ‘촛불-맞불’ 따위로 보도하고 있다. 최순실 변호인과 똑같은 틀이다.

나는 지금 신문과 방송사들이 촛불 앞에 금세 민주언론이 되리라 기대해서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언론이라면 논리적 일관성은 있어야 옳지 않은가. 탄핵이 ‘국민의 명예혁명’이나 ‘촛불혁명’이라 판단하고 그렇게 사설로 썼다면, 헌법재판소가 기각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해야 옳지 않은가. 모든 걸 그들 판단에 맡기자는 것은 옳지 않다. 헌법재판소는 대한민국의 최고주권기관이 결코 아니다.

촛불은 헌법재판관들에게 자신을 임명한 정파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 만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기각한다면, 정말이지 혁명 밖에 없지 않은가. 그것은 다음에 누가 집권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국정 공백과 민생 경제를 위해서도 빠른 심판이 답이다.

언론이 반동의 시작을 우려해야 마땅할 때에, 언론권력은 언죽번죽 ‘혁명의 시작인가’를 묻는다. 경계할 일이다. 저 물음은 반동의 신호탄이다. 노회한 반동의 선동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