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출근길. 지하철. 사람들은 움츠려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전화기 화면을 응시합니다. 화면엔 얼굴을 꽁꽁 싸맨 여인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집니다. 무겁게 지하철을 내립니다. 초겨울 추위가 닥친 아침, 고단한 밥벌이의 시작을 참담함으로 맞이합니다. 시민들의 절망에 대해서. 우리는 공범(共犯)입니다.”

지난달 2일 MBC 사내 게시판에 올라온 김희웅 MBC 기자협회장의 반성문이다. 김 회장의 글을 시작으로 그동안 침묵하던 MBC 기자들의 성명이 연달아 나왔다. MBC 기자들이 박근혜 게이트 촛불집회 현장에서 조롱받으며 쫓겨나고 마이크에 MBC 로고조차 달지 못하게 된 굴욕적 상황에서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외침이었다. 

12일 MBC 신사옥이 있는 서울 상암동에서 만난 김 회장은 당시 반성문에 대해 “새벽 출근길에 너무 쪽팔려서 썼다”고 술회했다. 그는 “지하철의 사람들 표정을 보니 ‘나라꼴이 개판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 MBC 사원증이 보일까 봐 두렵기까지 했다”며 “언론이 공범이라는 자각으로 주말에 함께 촛불을 들지만 우리가 촛불을 함께 들 자격이 있는지 자괴감이 너무 강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19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촛불집회 중계 중인 MBC 취재진을 발견하자 시민들은 “MBC는 물러가라”, “엠XX” 등의구호를 외쳤다. 그러자 취재진이 당황한 모습을 보이며 카메라를 철수했다. 출처=페이스북 유저 장은주씨 업로드 영상◀클릭
하지만 MBC 뉴스와 기자들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은 달갑지 않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로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치솟고 있지만 MBC 뉴스는 여전히 ‘청와데스크’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야 반성하는 척하느냐’는 비판이다. 시청률 3%대까지 추락한 MBC 뉴스가 이 지경이 되기까지 ‘너희들은 뭐했느냐’는 쓴소리가 주를 이룬다.

김 회장은 “처참하고 참담하다”고 토로했다. 

“뭐라 변명할 수도 없습니다. 추운 날 촛불을 들고 시민들이 직접 민주주의와 주권, 권리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된 데에는 언론이 가장 큰 책임이 있습니다. MBC는 아예 그런 책임을 언급하기 죄스러울 정도입니다.”

시청자들의 냉소와 비난에도 MBC 기자들은 매일 돌아가며 피켓을 들 수밖에 없다. 오직 청와대만 바라보는 보도국 수뇌부가 바뀌지 않는 한 MBC 뉴스는 시쳇말로 ‘답이 없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결국 우리 뉴스이고 우리 보도가 망가지는 것을 보고도 투쟁하다 쫓겨나고 전원 징계당하지 못했냐는 얘기”라며 “일부 댓글은 MBC 안의 사정들을 좀 이해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지만 원론적으로 부끄럽고 죄송하고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선배들이 해고당하고 쫓겨날 동안 동료들은 뭐했느냐’는 질타에 ‘경영진이 회사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직원을 찍어내며 인사 전횡을 일삼고 있어서’라고 토로조차 하기 어려울 만큼 2012년 파업 후 4~5년 동안 MBC 구성원들의 자조와 자괴감은 컸다.

김희웅 MBC 기자협회장. 사진=강성원 기자
김 회장은 “일부 사정을 아는 분도 있지만 파업 이후 시용·경력 직원이 100명 가까이 들어와 뉴스를 보면 나도 아는 얼굴이 거의 없을 정도로 MBC는 정말 달라졌다”며 “기존의 기자들은 보도국 밖으로 쫓겨났고 보도국 안에 있어도 편집부에서 정해진 코너를 담당하거나 뉴스를 진행하는 기능적인 일들을 담당하게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거의 새로 들어온 기자들이 리포트를 하고 있으니 기자들 자체도 MBC 뉴스가 우리 뉴스가 아닌 것처럼 돼 버린 게 지난 몇 년의 상황”이라며 “문제제기를 하면 하나둘 보도국 밖으로 쫓겨난다는 현실과 그러면 또 다른 기자들이 대체해서 들어와 그 자리를 메우게 되는, 다른 언론사에는 있을 수 없는 상황에 MBC 뉴스가 비난받는 걸 알면서도 ‘나도 안 본다’고 자조해 버리고 만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지난 11일 주말 뉴스데스크를 진행하던 박상권 기자와 이정민 아나운서가 시청자에게 사과하고 앵커직 하차 입장을 밝힌 것은 의미가 컸다. 이에 대해 김 회장은 “MBC 메인뉴스 앵커가 자기 뉴스에 대한 근조 리본을 단 것과 같다”고 평가했다. 

그는 “앵커로서 가장 큰 액션인 일종의 보직사퇴를 한 것인데 메인뉴스 앵커가 특별한 이유 없이 뉴스를 관두겠다는 것은 뉴스를 소개하기 창피해서 더 이상 못하겠다는 표현일 것”이라며 “시청자들이 보는 뉴스 온에어만 봐서는 그 안에서 기자들의 고민과 투쟁, 항의가 노출되지 않는데 앵커의 짧은 클로징 멘트를 통해 보도 책임자들이 ‘청와데스크’를 만드는 것과 다른 안에서의 힘겨움이 있다는 것을 노출한 것 같다”고 해석했다.

7일 김희웅 MBC 기자협회장과 김재용 기자가 서울 상암동 MBC 경영센터 로비에서 김장겸 보도본부장, 최기화 보도국장 사퇴를 촉구하는 피켓 시위를 벌였다.
숱한 스타 기자·앵커들을 배출하며 명성을 떨치던 MBC 뉴스가 나락의 길을 걷게 된 데는 소통 없는 죽은 조직이 돼 버렸기 때문이라는 게 김 회장의 지적이다. 

김 회장은 “예전엔 선배와 후배가 대판 붙고 의견충돌을 하면서도 가장 정돈되고 합의된 형태로 시청자에게 노출되는 뉴스를 만드는 게 기본이었는데 지금은 하달된 의견에 토 달고 문제제기 하면 아웃”이라며 “열심히 해서 내 자긍심을 드러내겠다는 결과물로서의 기사가 아니라 위에서 원하는 대로 써주면 된다는 식의 조직이 돼 버렸다”고 비판했다. 

김 회장은 이어 “지금 MBC는 박근혜 탄핵 이후 청와대와 같다”고 말했다. 그는 “MBC 뉴스가 이렇게 망가진 걸 내·외부 사람들 다 아는데 수뇌부들만 청와대와 공동 운명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청와대가 국민을 보지 않듯이 MBC 뉴스도 시청자를 보지 않고 청와대만 보고 있으니까 이런 식의 비난에 직면하면서도 꿋꿋이 가는 것”이라며 “청와대와 운명을 같이할 MBC 뉴스는 수뇌부의 것이 아니고 MBC 구성원과 국민의 것이므로 이제 그만 돌려줘야 할 때가 됐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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