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45대 대통령 당선인 도널드 트럼프는 ‘혐오를 팔아 자신의 서사를 만든 정치인’이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인문한국연구소 등 주최로 2일 성균관대에서 열린 강연에서 손희정 연세대 젠더연구소 연구원은 ‘혐오를 팝니다 : 미디어, 신체 그리고 트럼프’라는 주제로 강연을 열어 트럼프 당선에 대해 진단했다.

트럼프의 혐오는 어떻게 당선요인이 될 수 있을까? 먼저 손 연구원은 린 헌트(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교수)의 저서 ‘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를 통해 이야기가 어떻게 정치화되는지 소개했다. ‘가족로망스’란 자신의 부모가 가난하고 자신을 구박하면 반면 옆집 금수저를 보면서 ‘내가 저 집 아이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정신병리학의 개념이다.

손 연구원에 따르면 동화 ‘미운오리새끼’처럼 자신이 오리가 아니라 사실은 백조였다는 이야기는 이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다. 린 헌트는 ‘가족로망스’가 이처럼 이야기를 통해 전해지고, 국민들은 가족이 확장된 형태로 국가체제를 이해한다고 설명했다.

손 연구원은 “프랑스 혁명기에도 민중들은 국왕을 국부, 여왕을 국모로 생각했고 그들은 신이 그 자리에 있으라 한 것이지 ‘나와 같은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며 “부르주아들이 루이16세의 목을 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유는 ‘왕도 목을 쳐 땅에 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때 다양한 대중서사가 개입하는데 그것이 포르노그래피다. 손 연구원은 “위대한 사람이 국부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포르노적으로 묘사한다”며 “마리 앙투아네트는 성적으로 방탕한 여성으로 표현됐고, 루이16세는 그 여자 앞에서도 발기되지 않는 고자로 표현됐다”고 말했다.

남성 정치인의 여성혐오, 성적인 문란함 등은 ‘군림할 수 있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 손 연구원은 “트럼프처럼 강한 남성성, 속물 이미지를 파는 사람이 음담패설을 하는 것은 (지지율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며 “오히려 건강함과 에너지를 드러낸 것일 뿐”이라고 분석했다.

▲ 도널드 트럼프(가운데). 사진=포커스뉴스

반면 여성 정치인의 성적인 이야기들은 부정적인 효과를 준다. 손 연구원은 “국모를 그 자리에서 끌어낼 수 있다는 상상력은 방탕하고 더러워서 ‘신성한 어머니’가 아니라는 데서 나온다”며 “프랑스 혁명 전후에 ‘프랑스 전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의 은밀하고 방탕하고 추잡한 삶’이라는 포르노물이 나왔다”고 말했다.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국면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 요구는 성적인 이야기가 유포되면서 진행되는 중이다. 손 연구원은 “지금 박근혜 정부에서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는 성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에 대중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이 자주하는 각종 시술, 정유라는 누구의 딸인지, 침대 구입관련 의혹 등 성적인 얘기는 사실여부와 무관하게 박 대통령을 끌어내려야 하는 근거로 작동하고 있다.

같은 상황에 대해 남성 정치인과 여성 정치인의 서사는 계속 다르게 구성됐다. 손 연구원은 “국왕의 성적 능력이 없는 것과 여왕의 방탕함을 자격박탈의 조건으로 만든 것은 형제(남성)들의 상상력이었다”며 “이런 대중 서사에 대해 린 헌트도 비판적으로 보는데, 남녀가 동참한 프랑스 혁명은 형제들이 혁명으로 정리되고 투표권은 부르주아 남성들에게만 주어졌다”고 지적했다. 여성들은 프랑스혁명(1789년) 이후 200여년 가까이 투쟁해 1945년에서야 투표권을 얻었다.

남성성의 부각, 능력 있는 정치인

미국 역사에서 정치를 이야기화(서사화)하는데 능했던 정치인 중에는 레이건 전 대통령이 있다. 손 연구원은 “레이건이 눌변이고, 연기가 제대로 안 된다는 평가도 많았다”며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의 원형을 만든사람이라 특히 좌파이론가들은 레이건을 비판했다”고 말했다.

이야기는 언제나 매혹적이다. 레이건이 복지를 줄이며 작은 정부를 추진한 것도 한 이야기로 요약된다. 손 연구원은 “‘웰페어퀸(welfare queen, 복지여왕)’은 흑인여성으로 상상되는데, 레이건은 사실 수치나 통계를 제공하지 않은 채 복지 받아서 사치하는 여성이라는 거짓된 이야기를 통해 신자유주의를 추진했다”고 말했다.

▲ 복지여왕. EBS 다큐프라임 킹메이커 화면 갈무리

1976년 대권에 나선 레이건은 시카고 남부에 사는 ‘복지여왕’은 이름이 80여개가 되고 각기 다른 사회보장 카드로 혜택을 받아 연간 15만 달러의 지원금을 탄다고 말했다. 따라서 그녀를 돕는 진보주의자들은 나쁜 사람들이 되고, 성실한 납세자들은 억울한 희생자가 된다. 이들을 바로잡을 영웅이 레이건과 공화당이라는 스토리다.

정치와 서사는 불가분이다. 배우출신 레이건이 활동하던 시기 할리우드에서는 람보 등 ‘하드바디’ 영화가 인기였다. 공포영화들은 주로 음란한 10대 여성들이 죽어나가지만 ‘열심히 사는 똑똑한 처녀’가 끝까지 살아남는 서사를 택했다. 손 연구원은 “근육질의 미국남성이 반문화의 상징인 68혁명의 유산들을 처단한다는 내용”이라고 해석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이런 미국의 배경이 작동했다. 2015년 1월 대선출마 당시 1%의 지지율을 가지고 출발한 그는 1년 10개월만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손 연구원은 “레이건과 트럼프는 대중문화가 키워서 정계로 보낸 것이 흡사하다”면서도 “레이건은 전통적 가치에 기댄 우아함이 있지만 트럼프는 신자유주의의 천박함에 기대고 있어 염려된다”고 지적했다. 손 연구원은 트럼프가 리얼 버라이어티쇼 ‘어프렌티스’에 출연해 사람들에게 모욕감을 주면서 경쟁하게 만든 것을 엔터테인화한 점을 언급했다.

▲ 지난 2일 성균관대에서 손희정 연세대 젠더연구소 연구원이 강연하고 있다. 사진=장슬기 기자

트럼프는 희망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crippled american(불구가 된 미국)’이란 말을 자주 썼다. 손 연구원은 “트럼프가 기대고 있는 이야기 자체가 소수자에 대한 혐오”라며 “백인·남성·비장애인 중심의 이야기였다”고 분석했다. 혐오가 전략에 불과했다고 가볍게 생각해서 안 되는 이유다.

한국 정치인들의 서사

어떤 서사를 만들고 있는지는 한국 정치에서도 중요하다. 손 연구원은 문재인-박근혜 후보가 겨뤘던 2012년 대선 과정도 분석했다. 문재인의 서사는 ‘강인한 남성’이었다. 손 연구원은 문재인이 후보 시절 특전사 이미지를 강조했고, 선거홍보영상을 통해 ‘집에서 신문읽다 잠이 들면 아내가 다림질을 하고 있는 모습’ 등을 예로 들었다.

손 연구원은 “안타깝게도 ‘헤게모니적 남성’, ‘군인’의 서사는 박정희의 서사를 물려받은 박근혜가 이미 끌어안은 서사”라며 “이명박과 같이 ‘꼼꼼하게 해먹는 근본 없는 장사꾼’을 대체할 귀족 박근혜는 당시 중요한 이미지였다”고 분석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박근혜가 박정희의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던 점은 아버지의 이미지를 끌어안기에 유리했다. 아들이었다면 아버지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줄 것을 대중은 기대했을 것이라는 게 손 연구원의 설명이다.

손 연구원은 “이재명, 정청래 등의 정치인들이 트럼프의 당선을 ‘민초가 백악관을 장악했다’는 식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정치적”이라며 “실제로 자기들이 추구하는 홍보방식, 성장방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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