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에 대한 검찰의 무리했던 기소가 청와대의 지시와 공조 속에 이뤄졌다는 구체적 정황이 드러났다. 전국언론노조가 2일 기자회견에서 공개한 고 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 비망록에 따르면 2014년 8월7일자 메모에 ‘산케이 잊으면 안 된다–응징해줘야 List 만들어 보고, 추적하여 처단토록 정보수집 경찰 국정원을 팀 구성토록’이란 대목이 등장했다.
가토 다쓰야는 2014년 8월3일 “박근혜 대통령 여객선 침몰 당일 행방불명…누구와 만났을까”란 제목의 기사에서 조선일보 최보식칼럼을 인용해 박근혜 대통령과 정윤회씨가 4월16일 세월호 참사 당일 만났다는 풍문을 소개했다. 이에 자유청년연합 등이 가토 다쓰야를 박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고 검찰이 그를 기소했다. 김영한 비망록에 따르면 이 같은 고소와 기소 과정에 청와대가 깊숙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8월10일자 메모에선 ‘산케이-대통령 계셨고, 볼 일도 없고 만난 일도 없다’는 대목이 나왔다. 박근혜 의원 비서실장이었던 정윤회씨를 대통령이 참사 당일 만날 이유가 없었다는 맥락으로 읽힌다. 당시 재판의 관심은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의 행적이었는데, 법원은 이례적으로 공판 도중 ‘7시간 풍문’에 대해 “의심할 수 없는 허위”라고 판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정씨의 행적은 여전히 의혹을 낳고 있다.
정윤회는 4·16 세월호 참사 당일 행적을 번복해 진술했다
가토 다쓰야 무죄 판결문에 따르면 정윤회는 검찰에서 처음 조사 받을 때(2014년 8월15일) 당일 오전 특별한 일 없이 집에 있었다고 진술했다가 오전 11시경부터 2시경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역술가 이상목씨의 집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며 진술을 번복했다.
정윤회는 번복 경위에 대해 당시 행적에 대해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는데 자신의 휴대전화 통화내역과 자신의 진술내용이 객관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검찰 수사관이 전화를 해 오전에 정씨가 인사동에서 휴대전화를 사용한 내역이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이상목씨의 집에 있었던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고 진술했다. 이후 검찰은 ‘사인 박근혜의 명예훼손’이라는 논리를 들어 가토 전 지국장의 유죄를 주장했다.
당시 재판부는 “정윤회가 스스로 휴대전화 통화내역을 제출했던 점, 조사받을 때가 넉 달 가량 지난 후인 점, 평소 이상목씨와 가까이 지내왔기 때문에 식사를 한 모든 시기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는 점”을 들어 진술 번복 경위를 납득할 수 있으며 같은 날 대통령을 만나지 않았다는 진술을 신빙할 수 있다고 밝혔다.
통화내역 조회에 따르면 정윤회는 오후 2시20분 경 서울 종로구 평창동 글로리아타운 부근에 있었다. 이곳은 이상목의 집과 1.4km 떨어져 있는 부촌으로, 청와대 관저와 매우 가까운 지점이기도 하다. 정윤회는 2007년 비서실장을 그만둔 이후 박근혜 대통령과 만난 일이 없다고 진술했다.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에는 ‘외교문제X, 특정기자의 범죄행위에 대한 대응(法), 언론자유 이름으로 국가원수 모독은 용납될 수 없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외교문제로 비화되어선 안 되며, 일개 기자의 대통령 명예훼손에 따른 대응으로 프레임을 설정해야 한다는 지시사항을 적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통령은 제1공인이기 때문에 명예훼손을 법적으로 주장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검찰은 박근혜 대통령을 공인 박근혜와 사인 박근혜로 구분했고, 재판부는 “(산케이 기사는) 사인 박근혜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뒤이은 메모에는 ‘外장관, 문체차관 회의 주제 정부체면 고려 대응’이란 대목이 등장하는데 이는 외교부장관과 문체부 고위라인을 통해 당시 사건으로 불거진 한일 관계 악화에 대한 대응지시로 풀이된다. 실제로 당시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한국 검찰의 기소와 가토 다쓰야의 출국금지 조치를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실제로 외교부는 가토 다쓰야 무죄 판결 직전 가토 전 지국장의 선처를 요구하는 공문을 재판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10월3일 메모에는 ‘산케이 처리’라고 짤막하게 적혀있다. 검찰은 그해 10월2일 가토 전 지국장에 대한 3차 소환조사를 마치고 10월8일 그를 불구속 기소했으며, 가토 전 지국장은 10월1일자로 도쿄본부 사회부 편집위원으로 발령이 났다. 가토 전 지국장 ‘처벌’에 대한 박 대통령의 관심이 매우 높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는 곧바로 청와대 관계자들의 깊은 고민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검찰이 “박 대통령은 참사 당일 청와대에 있었고 정윤회와 최태민과 긴밀한 남녀관계가 아니다”라며 가토 다쓰야에게 징역 1년6개월을 구형했으나 재판부는 지난해 12월17일 1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국제적 망신이었다. 가토 다쓰야는 무죄 선고 직후 기자회견에서 “검찰은 우익단체들의 고발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조사를 시작해 명예훼손이라고 단정 지어 기소를 단행했다”고 비판하며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련의 일에 대해 정권의 눈치를 본 것이 아닌가란 의심이 널리 퍼져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가토 전 지국장의 ‘의심’은 이번 김영한 비망록을 통해 ‘현실’로 드러났다. 이와 관련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측은 2일 “가토 다쓰야가 한국에 다시 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전한 뒤 따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