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방우영씨 개인에 대한 테러이기보다 조선일보에 대한 테러다. 조선일보는 북한의 핵 개발이라든지 인민을 폭압하는 정치에 대해 늘 비판적 논조를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사건은 대공 용의점을 가지고 조사해야 한다. 청장은 어떠한가?”

2006년 10월17일 경찰청 국정감사에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 테러 사건’ 배후에 북한이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1997년과 2000년에 “무자비한 보복을 하겠다”, “조선일보를 폭파하겠다”고 협박한 적이 있으니 배후에 북한이 있다는 기상천외한 논리였다.

지난 5월 별세한 고 방우영 전 조선일보 상임고문은 2006년 9월 경기 의정부시 선산에서 가족 추모 행사를 마치고 승용차편으로 귀가하다 신원 미상의 괴한 2명에 의해 차 유리창이 벽돌로 찍히는 습격을 받았다.

▲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왼쪽)과 고 방우영 전 조선일보 상임고문. (사진=포커스뉴스, 연합뉴스)
지금까지 김 전 실장의 ‘북한 배후설’은 확인되지 않은 일방의 주장과 색깔론 정치 공세로 남아있다. 주머니에서 구슬 꺼내듯 정치적 목적을 위해 색깔론을 들이미는 공안검사 기질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실제 조선일보 사주와 김 전 실장은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전 실장은 지난 5월 방 전 고문의 빈소를 찾아 “(고인은) 언론계의 큰 어른”이라며 “개인적으로 방일영 회장님과 방우영 회장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랬던 그가 최근 조선일보 계열사인 TV조선에 의해 ‘언론의 적’으로 부상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TV조선은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을 공개하며 청와대의 언론통제 정황을 보도하고 있다. 비판의 초점은 김 전 실장에 맞춰져 있다.

비망록에는 청와대가 KBS 인사와 보도, 이사회 등에 개입한 정황, ‘정윤회 문건’ 특종을 한 세계일보와 기자에 대한 압박 및 사찰 의혹 등이 기록돼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시사저널과 일요신문 보도에 대해 “끝까지 밝혀내야. 본때를 보여야. 열성과 근성으로 발본색원”하라고 주문할 정도로 박근혜 정권은 여느 정권보다 비판 언론에 적대적이었다.

중심에는 김 전 실장이 있다. 그는 세계일보를 압수수색 대상으로 정하고 언론사 압박을 지시한 장본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언론시민단체들이 지난 21일 박 대통령과 김 전 실장을 직권남용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고 세계일보 기자들이 “특검에서 김 전 실장이 관여된 의혹을 조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까닭이다.

▲ 지난 14일 TV조선 보도. 사진=방송화면 갈무리
비판 언론에 재갈 ‘소송왕’ 김기춘

김 전 실장은 박근혜 정권에서 고소 혹은 소송을 통해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데 달인이었다. 그는 2014년 5월 말 “김기춘 비서실장이 1991년 법무부 장관 재직 시 오대양 사건 재수사를 방해했다”고 채널A에서 주장한 심재륜 전 부산고검장과 채널A, 김갑수 평론가 등을 고소했다가 지난해 1월 취하했다.

이와 관련해 심 전 고검장은 지난 8일 시사인과의 인터뷰에서 “김기춘 비서실장의 고소는 확산 방지용”이라며 “사건을 진행해봐야 자기만 더 우스워지는 꼴이라서 정치검찰을 통해 나를 한껏 괴롭힌 뒤 취하했다. 검찰에 불려갔으면 김 실장을 상대로 폭탄발언을 하려 했다”고 말했다.

김 전 실장 등 청와대 비서실은 또 2014년 5월 세월호 참사 국면에서 박 대통령의 진도 방문 연출 의혹과 안산 합동분향소 방문 연출 의혹을 각각 보도했던 한겨레와 CBS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결과는 엇갈렸다. 한겨레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는 항소심에서도 김 전 실장 등이 패소했지만, CBS의 경우 대법원이 청와대 비서실의 손을 들어줬다.

시사저널이 2014년 3월 “박지만 ‘정윤회가 나를 미행했다’”라는 기사를 통해 박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 EG 회장이 비선 실세 정윤회씨가 고용한 사람으로부터 미행을 당했고,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이에 대한 내사를 진행했지만 담당 직원이 석연치 않은 사유로 인사 조치됐다는 의혹을 제기하자 김 전 실장과 ‘문고리 3인방’은 정정보도와 8000만 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걸었다.

일요신문의 경우 2014년 3월31일 “여권 실세가 벌인 ‘뒷조사’ 작업”이라는 기사에서 “여권 실세가 주도하는 비선라인이 청와대에 파견 나와 있던 사정기관 공직자를 동원해 유력 대기업 임원 등을 뒷조사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청와대는 대통령비서실 명의로 4000만 원 상당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박 대통령이 이들 언론사에 대해 “끝까지 밝혀내야. 본때를 보여야. 열성과 근성으로 발본색원”하라고 주문한 배경으로 풀이된다. 

▲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언론사 사찰과 탄압의 핵심 당사자로 떠오르고 있다. 김영한 전 민정수석이 남긴 비망록에는 그의 지시 사항이 기록돼 있다. (사진=연합뉴스)
국민일보가 2013년 10월4일 “불통 청와대, 진영 파동 불렀다”라는 기사를 내보내자 김 전 실장은 정정보도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서울남부지법에 제기했다. 결국 국민일보는 자사보도를 뒤집는 보도를 내야만 했다.

세계일보 탄압도 논란이었다. 세계일보 ‘정윤회 문건’을 공개한 2014년 11월28일, 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과 정호성 제1부속 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 비서관 등은 속전속결로 이날 오후 세계일보 사장, 편집국장, 기사를 작성한 평기자 등 6명에 대해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김영한 비망록에 나타나듯, 이날 김 전 실장이 자신이 주재한 회의에서 세계일보 공격 방안을 논의했다는 점에서 그는 세계일보 고소와 무관하지 않다. 검찰은 이 사건에 대해 ‘공소권 없음’(무혐의 처분의 일종)으로 종결했다고 지난 7월 밝혔다. 청와대가 검찰에 고소장을 낸 지 1년 8개월 만에 고소를 취하한 것이다. 

김기춘 전 실장은 2014년 12월8일 동아일보가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 의혹을 받고 있는 정윤회 씨 동향 문건은 비서실장 교체설의 진원지를 파악하라는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하자 그날 오후 동아일보 기자를 형사고소하기도 했다.

김 전 실장의 ‘소송전’은 정치권에서도 논란이었다. 2014년 12월 당시 박완주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박 대통령 취임 이후 청와대 관계자가 언론사와 기자를 상대로 한 민형사 소송은 13건이나 된다”며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것이 아니라 국회에 나와 당당하게 증언하길 바란다”고 비판했다.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도 김 전 실장은 소송 카드를 꺼내들었다. 김 전 실장은 최근 연합뉴스TV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비선 실세 최순실씨 소유의 빌딩 사무실을 사용했다고 보도한 최초 언론을 고소했다고 밝혔다.

최씨와 김 전 실장의 관계에 의혹을 제기한 이상호 고발뉴스 기자(전 MBC 기자)는 23일 “두 분 사이를 밝힐 기회를 줘서 반갑다”며 김 전 실장의 고소에도 보도를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언론을 ‘가지고 논’ 그 남자

그의 비뚤어진 언론관은 과거 사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 전 실장은 14대 대선 직전인 1992년 12월11일 부산 대연동 초원복국식당에서 부산 지역기관장들을 모아놓고 김영삼 당시 민자당 후보 승리를 위해 지역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남이가”, “부산 경남 사람들 이번에 김대중이 되면 영도다리 빠져죽자”,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해” 등은 이곳에서 나온 그의 발언이다.

그는 이 자리에서 언론 회유 방법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은 지역감정 고조를 위해 부산일보와 국제신문 등 지역신문이 더 단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김 전 실장은 “광주일보나 무등일보 이런 것들은 자기네 고장 사람 대통령 만들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부산일보나 국제신문은…(그렇게 하지 않는다)”이라며 “신문사 사장이랑 밥 먹으면서 고향 발전을 위해 너희가 해달라고 해보라. 관리들은 하기 곤란하니까 업계에서”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부산경제가 잘 돼야 부산일보, 국제신문이 잘 되지, 부산이 망하는데 신문인들 온전하겠냐”며 “광고주들, 경제인들 모아가지고 신문사 간부들 밥 사주면서 은근히 한 번 좀…”이라며 회유 방법을 논했다.

▲ 2014년 7월 세월호 국정조사 당시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장 김기춘 사진=이치열 기자
이 자리에 있던 강병준 부산상공회의소 부회장에게는 “강 회장, 좀 한 번 바쁘더라도 편집국장, 사회부장, 정치부장 이런 놈들 뭐(돈)주면서, 명세서 끊어주면서, 이게 운동이라”라고도 했다. 특정 정치세력을 밀어주기 위해 신문사 간부들을 매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규삼 안기부지부장이 신문사 간부들은 괜찮지만 밑의 기자들이 문제라는 취지의 말을 하자 김 전 실장은 “통솔력 있는 사람(간부)은 합니다”라고 말했다. “데스크 보는 애들이 괜히 밑에 놈 핑계를 댄다. 조선일보는 과격한 기자 없나. 있지만 전부 신문사 간부가 달라지니까 합니다. 나가는 논조 보세요.” 김 전 실장의 언론관이다.

▲ 기자협회보 1993년 2월18일자.
그는 자신의 발언을 실천으로 옮겼다. 김 전 실장은 법무부장관을 그만 둔 후 1993년 1월말부터 2월까지 법조 출입 기자 30여명에게 선물을 돌렸다. 고급양주인 ‘발렌타인 30년’과 ‘21년산 로얄 살루트’부터 인삼세트까지 다양한 선물을 전했다. 초원복집 사건으로 재판을 앞두고 있었던 때였다.

운전기사를 통해 기자들 집으로 직접 배달된 선물에는 ‘물의를 일으켜 본인을 좋게 생각하던 이미지에 실망감을 줘 미안하며, 여러 가지로 자성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글귀가 담겨 있었다고 한다.

신동아 2014년 9월호를 보면, 이 사건과 관련한 내용이 있다. “초원복집 사건으로 재판을 앞두고 법조기자 30여 명에게 고급양주를 돌린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사실이기에 변명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자신을 둘러싼 의혹에 대해 ‘아니오’라고 부인만 하는 그가 일부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 언론시민단체들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난 청와대의 언론장악 실태 핵심인사인 박근혜 대통령,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을 직권남용 혐의로 21일 오후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사진=김도연 기자)
‘언론의 적’ 김기춘을 수사하라

전국언론노동조합, 민주언론시민연합, 언론개혁시민연대, 자유언론실천재단 등 언론시민단체는 지난 21일 박 대통령과 김 전 실장 등이 공모를 통해 언론을 압박하고 통제했다며 직권남용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세계일보 기자들은 23일 성명을 통해 “청와대가 모든 국민과 동등하게 법 테두리 안에서 보장받는 정정보도·반론보도 청구권을 행사하는 대신 ‘언론사 공격’이라는 사실상의 범죄를 모의했다”며 “민주주의 근간을 해치는 중대한 범죄와 같은 박근혜 정권의 언론탄압 공작이 담긴 비망록 내용이 향후 최순실 등 국정농단 의혹사건 특검에서 철저히 규명되고 모든 관련자에게 엄정한 책임을 묻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은 김 전 실장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핵심이라며 검찰 수사를 촉구했다. 국민의당도 대검찰청을 항의 방문해 김 전 실장을 구속 수사하라고 요구했다. 

검찰이 김 전 실장과 최씨의 ‘연결고리’를 찾아내고 김 전 실장의 언론탄압 의혹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을까. 우리가 검찰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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