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회 문건’ 수수께끼가 풀렸다. 세계일보가 13일 공개한 3개 버전의 문서 “‘비서실장 교체설’ 등 관련 VIP측근(정윤회) 동향” 등에는 비선 실세 최순실이 언급돼 있었지만 검찰은 문건을 찌라시로 규정한 박근혜 대통령의 수사 가이드라인에 따라 ‘국정농단’ 수사를 사실상 뭉갠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일보에 따르면 관련 문건에는 “십상시들과 정윤회의 모임에서는 공공연하게 ‘이 나라 권력서열 1위는 최순실, 2위는 정윤회, 3위는 박근혜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대통령이더라도 자신의 옛애인이 나은(‘낳은’의 오타로 추정) 딸을 어떻게 배척할 수 있겠느냐?’라는 극치의 말이 서로간에 오가고 있다 함” 등의 내용이 있었다. 최태민을 옛 애인으로 최순실을 비선 실세로 인정하는 대목이다.

▲ 세계일보 2014년 11월28일자.
새로운 의혹도 제기됐다. 채널A 13일자 보도에 따르면, 2014년 1월 ‘정윤회 국정 개입 문건’이 만들어지면서 청와대에서 내홍이 불거졌고, 문건 작성 경로를 추적하며 수습에 나선 배후가 비선 실세 최순실이었다는 이야기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 참석해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최씨가 “문건을 작성한 박관천 행정관 등 민정수석실 파견 경찰 13명을 교체하라”고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에게 지시했고, 안봉근 비서관은 교체 대상 경찰 11명의 명단을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 내에서 “일괄 교체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돼 결국 박관천 행정관 등 일부만 경찰로 복귀시켰다는 것이다.

TV조선이 공개한 당시 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지난 8월 사망) 비망록에는 김 전 비서실장이 정윤회 문건 수사가 한창이던 2014년 12월13일 “조기 종결토록 지도”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나타나 있다.

비망록에는 정윤회 문건 보도 다음날(2014년 11월29일) ‘휴대폰, 이메일, 통신 내역 범위 기간’, ‘압수수색’, ‘청와대 3비서관 소환 등 협의’라는 메모를 작성한 것으로 나온다. 

‘청와대 3비서관’은 이재만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 안봉근 전 국정홍보비서관 등 ‘문고리 3인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검찰 수사를 앞두고 문고리 3인방과 협의한 정황으로 풀이되고 있다. 김 전 실장 주도로 청와대가 검찰의 ‘정윤회 문건’ 수사 무마를 지시한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 왼쪽부터 정윤회, 이재만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안봉근 전 국정홍보비서관. (사진=노컷뉴스)
문건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지난달 31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문건 작성자인 박관천 전 경정은 “2013년 11월 내 상관인 조응천 공직기강비서관(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으로부터 ‘정윤회가 사람을 시켜 박지만을 미행하고 대통령을 만나려면 그에게 최소 몇억원을 줘야 한다는 제보가 있다. 조사해서 첩보를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또 “조 비서관이 ‘할배(김기춘)가 시켰다’고 말했다”며 김기춘 전 비서실장을 지목했다. 해당 보고서는 2014년 1월6일 김 전 실장에게 보고됐다. 문건의 핵심 내용은 정윤회씨가 문고리 3인 등과 서울 강남의 한 음식점에서 매달 정기적으로 만났고, 이 자리에서 김 전 실장 교체 등을 논의했다는 것이다.

2014년 11월 세계일보의 문건 보도 직후에도 김 전 실장이 자신에 대한 교체설을 파악해보라고 지시해서 생성된 보고서(정윤회 문건)와 관련해 문건 작성자 박 전 경장을 “자르라”고 지시했다는 진술이 보도를 통해 나왔고, 이를 두고 당시 언론들은 “김기춘 실장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제기됐다.

김 전 실장이 애초의 지시와 다르게 청와대 실세들과 맞부닥치자 태도를 바꾼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 지난 13일 세계일보가 공개한 정윤회 문건. 사진=세계일보
실제 TV조선과 채널A 보도 등을 종합해보면, 정윤회 문건에 대해 ‘비선의 국정농단’이 아닌 ‘찌라시 유출과 국기문란’ 프레임으로 박 대통령이 사건을 규정한 뒤, 김 전 실장이 검찰 수사 방향 얼개를 짰고 우병우 전 민정수석(당시 민정비서관)은 사건의 핵심 인물 회유를 시도하며 수습을 주도했다.

문건 유출자로 지목된 한일 전 서울경찰청 경위는 최근 언론 인터뷰를 통해 ‘자진출두해 자백하면 불기소 편의를 봐줄 수 있다’고 자신에게 약속했던 사람은 청와대 민정비서관실 직속 특별감찰반 책임자인 우병우 당시 민정비서관으로 알고 있다고 폭로한 바 있다.

한 전 경위는 검찰이 압수한 이동식 저장장치(USB)에는 최순실씨와 승마협회와 관련해 수집한 첩보도 있었다고 했는데, 정윤회 문건 논란 당시에도 검찰이 최씨 관련 비리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증언으로 의미가 있다.

▲ 박관천 전 경정. (사진=민중의소리)
이 과정에서 세계일보 역시 사장과 회장이 교체되고 취재 기자들이 검찰 수사를 받는 등 관계자들이 고초를 겪었다. 문건 유출자로 지목된 또 다른 경찰 최경락 전 경위는 2014년 12월13일 “민정비서관실에서 너에게 그런 제의가 들어오면 당연히 흔들리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메시지를 한 전 경위에게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장 비선 실세 최씨의 존재를 알고도 무시한 검찰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다. 세계일보는 14일 당시의 수사를 ‘범죄적 수사’로 규정한 뒤 “검찰은 최씨를 비롯한 비선의 국정개입 또는 국정농단 가능성을 알 수 있는 핵심 수사 대상자들의 발언과 첩보에도 최씨를 비롯한 비선실세에 대한 수사나 국정농단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정작 검찰은 지난해 서울중앙지법 심리로 열린 조응천 전 비서관과 박 전 행정관 결심 공판에서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문건 내용 전부를 허위로 볼 수 없다”며 “(정윤회 문건은 정씨 등의) 범죄첩보를 담은 공무상 비밀문건”이라고 ‘찌라시 문건 유출’과 모순되는 주장을 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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