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가 이른바 ‘최순실 PC’를 입수해 초대형 특종을 터뜨렸지만 일찌감치 최순실에 집중한 건 TV조선이었다. 이진동 TV조선 사회부장에 따르면 TV조선은 4월부터 미르재단을 추적했다. 뒤늦게 공개한 최순실 지하 주차장 인터뷰는 7월17일에 촬영된 것이다. 최순실이 독일로 출국하기 직전에 찍은 영상이다. TV조선이 김종 차관과 차은택 감독 등에 대해 질문한 것으로 봐서 이미 이때 최순실 게이트의 윤곽을 상당 부분 파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TV조선은 이 동영상을 석 달 이상 묵혀두다가 10월25일에서야 내보낸다. JTBC가 이른바 ‘최순실 PC’를 단독 입수해 최순실이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을 미리 열람한 정황이 있다고 폭로한 다음날이다. 이진동 부장은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말을 빙빙 돌렸다. “청와대에서 조선일보 vs 청와대 프레임을 만든 것이 외압이라 생각한다. 8월 초에 숨고르기에 들어갔던 것도 그 프레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면 조선일보는 이미 4월 총선 직후부터 박근혜 정부와 결별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본격적인 레임덕 국면을 앞두고 대통령과 선을 긋고 새로운 판을 짜겠다는 전략이었을까. 박 대통령의 손발이나 다름 없는 우병우를 가장 먼저 공격한 것도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가 우병우와 넥슨의 수상쩍은 부동산 거래 의혹을 폭로한 게 7월18일이었다. 그러나 청와대는 순순히 레임덕을 거부했고 자칭 ‘1등 신문’과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 7월18일 조선일보 1면
익명의 청와대 관계자가 연합뉴스를 통해 “부패 기득권 세력과 좌파의 우병우 죽이기”라고 발끈하고 나선 건 조선일보를 겨냥한 우회적인 경고였다. 그리고 난데없이 MBC가 우병우를 수사하던 특별감찰관이 조선일보에 감찰 정보를 누설했다는 의혹을 터뜨렸다. 그래도 조선일보가 항복하지 않자 급기야 골수 친박으로 꼽히는 김진태 의원이 나서서 “대우조선해양에서 초호화 접대를 받은 언론인은 조선일보 송희영 주필”이라고 폭로하기에 이른다.

급기야 사과문을 내걸고 송희영도 사퇴했지만 조선일보는 아마도 칼을 갈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누가 먼저 칼을 휘둘러 주기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한겨레가 K스포츠재단 등에 최순실이 개입돼 있다는 사실을 터뜨리면서 TV조선의 보도가 뒤늦게 빛을 보게 된다. 한겨레 김의겸 기자는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TV조선 덕분에 특종이 가능하게 됐다”면서 “TV조선도 배후에 최순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전면에 나서기가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그러나 JTBC가 선방을 날리자 조선일보와 TV조선도 맹렬하게 물어뜯기 시작했다. 10월26일 조선일보 사설 제목은 “부끄럽다”였다. ‘내부자들’에서 ‘심판자’로 발 빠른 변신. 사설은 준엄했다. “이것은 단순한 레임덕이 아니다. 대통령 국정 운영 권능의 붕괴 사태다.” 조선일보는 “여야 모두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거국 총리를 임명해 남은 1년간 경제와 내정을 맡겨야 한다”고 제안했다.

박근혜는 이미 죽은 권력이다. 조선일보는 박근혜를 제거할 때를 기다렸고 때가 되자 과감하게 선을 그었다. 조중동+기득권 동맹에게 박근혜는 어차피 쓰고 버리는 카드였고 다만 버리는 시점이 앞당겨졌을 뿐. ‘쳐도 우리가 친다’, 조선일보와 박근혜를 분리하고 국민들을 조선일보에 감정이입하게 하는 전략이다. “부끄럽다.” 익숙한 유체이탈 화법. 조선일보는 박근혜와 최순실을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결코 새누리당은 공격하지 않는다.

▲ 박근혜 대통령이 11월4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최순실 국정개입’ 의혹 파문 관련 대국민 담화를 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박근혜가 최순실의 꼭두각시였다는 사실을 그들이 몰랐을 리 없다. 혼자 힘으로 말 한 마디 문장 한 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금치산자’ 수준의 치료가 필요한 환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새누리당 대표를 지낸 김무성은 “최순실을 본 적은 없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몰랐지만, 박근혜 대통령 옆에 최순실이 있다는 걸 다 알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시절 비서실장을 지냈던 전여옥이 조선일보 기고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들이 몰랐다고? 개와 소가 웃을 이야기이다. 그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친박들은 권력 나눔, 즉 ‘잿밥’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약점 있는 대통령이라면 더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 마음껏 조종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중략) 문고리 3인방하고만 통하면 되니 이 또한 얼마나 간편한가? ‘편의점 정치’였다.”

이명박 정부의 참담한 실패 이후 조중동+기득권 동맹은 보수 진영을 결집할 새로운 아이콘이 절실했고 급기야 40년 전 박정희의 망령을 끌어냈다. 지금은 비로소 실체가 드러났지만 박근혜는 입만 다물고 있으면 적당히 멀쩡해 보였고 딸에게 아버지의 이미지를 투영하는 전략이 먹혀 들었다. 새누리당은 “박근혜가 되면 사실상 정권 교체”라는 기묘한 프레임으로 여론을 호도했고 이명박을 제물로 삼아 결국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이제 새로운 프레임 전쟁이 시작됐다. 핵심은 조중동+기득권 동맹에서 박근혜가 퇴출됐다는 것이다. 주도권을 확보한 조선일보는 최대한 판을 크게 흔들고 새로운 아이콘과 아젠다를 내세워 부서진 콘크리트 지지율을 복원하려 할 것이다. 송희영 말고도 다른 약점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제는 누구도 조선일보를 건드릴 수 없게 됐다. 당장 보복 수사 이야기가 나올 테니. TV조선은 내년 종합편성채널 재허가 심사를 무난히 통과할 가능성이 크다.

▲ 11월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미국 대선결과와 관련해 열린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한 이정현(왼쪽) 대표와 조원진 최고위원이 대화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박근혜 지지율이 5% 밑으로 떨어졌지만 새누리당 지지율이 아직 20% 언저리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 봐야 한다. 5%가 박근혜 지지율의 바닥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새누리당 지지자들 상당수는 아무리 충격적인 뉴스가 나와도 결코 민주당 지지로 돌아서지 않을 사람들이다. 조선일보는 아마도 박근혜를 빨리 털어내고 새누리당의 전통적인 콘크리트 지지율을 복원하겠다는 전략을 구상하고 있을 것이다.

친박계는 내년 대선에서 찌그려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보수 진영의 가장 큰 고민은 당장 새로운 판을 짜야 하는데 비박계에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 김무성이나 유승민으로는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이 붙지 않을 거고 누구를 내세워도 박근혜 만큼의 구심력을 만들기 어려운 상황이다. 누군가가 반기문과 손학규, 안철수까지 엮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아군과 적군의 구분을 없애고 보수의 색깔을 희석하는 전략이다.

조선일보 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배후의 세력이 있을 수도 있다. 이들은 식물 대통령을 발 빠르게 용도폐기하고 적당히 포장을 바꾸고 새로운 인물을 내세워 권력 연장을 꾀할 것이다. 손석희 사장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JTBC 보도 역시 조중동 카르텔의 큰 그림 안에서 움직이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JTBC는 최순실 PC의 입수 경로를 밝혀야 한다. 최순실과 삼성의 관계를 얼마나 제대로 파헤치는지도 지켜볼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가 제안하고 새누리당이 수용한 거국 중립내각은 꽃놀이패다. 야당에서 국무총리를 맡으면 정권 말 국정 혼란의 책임이 희석된다. 당장 탄핵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고 박근혜는 더 극단적인 상황을 맞기 전에 스스로 물러날 것 같지 않다. 거국 중립내각을 거부하면 역시 야당에 책임을 떠넘길 수 있다. 조선일보의 전략은 내년 대선까지 남은 1년 동안 박근혜에게 비난을 집중하고 새누리당에 환골탈태의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국정 농단의 전모를 밝혀내는 것 못지않게 꼭두각시 대통령을 내세워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들고 헌정 질서를 유린한 보수 기득권 세력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죽은 박정희의 망령을 끌어내고 ‘형광등 100개의 아우라’ 운운하며 국민을 호도하고 부패한 권력의 생명을 연장했던 추악한 음모를 드러내는 것이다.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하고 이 추악한 기득권 동맹에 책임을 묻는 것이 무너진 민주주의를 재건하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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