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하야(下野)라는 말이 입에 딱 붙는다. 대통령 정도 되면 물러나는데 어쩐지 다른 단어를 써야 할 것 같고 비장감도 더한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대통령이 임기를 못 채우고 물러난 건 네 차례 있었다. 1979년 10·26 사태로 숨진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제외하면 스스로 물러난 것만 세 차례나 된다.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한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중략)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1960년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 사퇴 연설)

▲ 1960년 4월27일 동아일보 1면. javascript:void(0)
1960년 3·15 부정선거 여파로 4·19 혁명이 일어나고 결국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이 스스로 물러났다. 이듬해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이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잡고 1962년 3월22일 윤보선 대통령이 군부의 압박으로 물러났다. 38년 뒤인 1980년 9월16일에는 최규하 대통령이 역시 쿠데타로 실권을 잡은 전두환 군부의 압박으로 물러난다. 현대사의 비극 세 장면이다.

우리는 유독 대통령직 사퇴에 하야라는 단어를 쓴다. 하야는 시골로 내려간다는 의미로 관직에서 물러나는 걸 말하지만 대통령 이외에 하야라고 쓰는 경우는 전혀 없다. 총리가 물러날 때도 국회의원이 물러날 때도 사퇴라고 쓴다. 당연히 사임이나 사퇴나 정확히 같은 의미지만 유독 대통령에게만 특별한 단어를 부여하는 것이다.

▲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최순실 게이트 규탄 촛불집회에 참가자들이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며 촛불을 밝히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박근혜 대통령은 영애(令愛)라고 불렸다. 육영수 여사는 영부인(令夫人), 박지만씨는 영식(令息)이라는 극존칭을 썼다. 영부인과 영애, 영식은 대통령(大統領)의 가족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남의 부인과 딸, 아들을 높여 부르는 일반적인 말이다. 전두환과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까지만 해도 대통령 부인을 영부인이라고 불렀으나 김영삼 대통령 들어 여사로 바뀌었다.

박 대통령이 최순실의 도움 없이는 간단한 의사 결정조차 내리지 못할 정도로 의존적인 모습을 보였던 건 평생 영애의 정체성으로 살아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대통령의 딸을 영애라고 부르지 않은 시절이 됐지만 박 대통령의 사고 체계는 여전히 40년 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대통령을 각하(閣下)라고 부르는 관행도 김대중 전 대통령 들어서야 사라졌다. 김 전 대통령은 청와대 안에서도 ‘대통령님’으로 호칭을 통일하도록 했다. 각하는 황제를 폐하라 부르고 왕을 전하, 왕세자를 저하, 정승과 판서 등 고위 관료를 각하라고 부르던 조선시대 호칭이 민주공화국에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해방 이후 각하라는 호칭이 대통령과 총리, 장관 등에까지 널리 쓰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대통령에게만 쓰는 호칭으로 굳어졌다. 애초에 근본도 용법도 적절치 않은 호칭이었던 것이다.

▲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최순실 게이트 규탄 촛불집회에 참가자들이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며 촛불을 밝히고 있다.
임금에게만 쓰던 용안(龍顔)이니 옥대(玉帶)니 수라(水剌)니 어주(御酒)니 하는 말은 역사적 유물로 남아있다. 당연히 민주공화국에서 대통령과 대통령의 가족에게 극존칭을 쓸 이유가 없고 대통령에게만 별도의 단어를 부여할 이유도 없다. 영애와 영식은 대통령의 딸·아들이 아니라 모든 남의 집 귀한 딸·아들들을 부르는 말로 제 자리를 찾았다.

언론이 쓰는 단어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대통령은 선거로 선출된 공직자일 뿐이다. 대통령에서 물러나는 건 사퇴 말고 달리 부를 이유가 없다. 직책을 내려놓는 의미라면 사직, 책임을 내려놓는 의미라면 사임. 굳이 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다. “박근혜는 사퇴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충분하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라는 신문 1면 제목이 줬던 강렬한 인상이 뿌리 박힌 탓이겠지만 만약 박 대통령이 물러난다면 “박근혜 대통령 사퇴” 이외의 더 정확한 표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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