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총선이 여당의 참패로 끝난 뒤 조선일보 편집국과 TV조선 보도국은 분주했다. 조선일보는 대통령이 낮에 가장 의지했던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을, TV조선은 대통령이 밤에 가장 의지했던 비선실세 최순실씨를 겨냥하고 취재를 시작했다.

‘우병우 민정수석의 妻家(처가) 부동산 넥슨, 5년전 1326억원에 사줬다’란 제목의 조선일보 1면 단독보도는 7월18일 등장했다. 미르재단 관련 첫 번째 리포트였던 ‘靑(청) 안종범 수석, 500억 모금 개입 의혹’ TV조선 단독보도는 7월26일 등장했다. 조선일보와 TV조선의 양방향 타격은 결국 박근혜 대통령의 ‘오장육부’와 ‘수족’을 잘라냈다.

8월 말 ‘부패기득권세력’으로 청와대의 ‘입’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이 송희영 주필을 거론하며 조선일보와 TV조선의 우병우·최순실 관련 보도는 한 달 가까이 중단됐다. 그러나 한겨레가 9월 말 최순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JTBC가 최순실 태블릿PC를 통해 국정농단을 보도하며 조선일보는 단독보도 두 달 만에 우병우 민정수석을 청와대에서 쫓아낼 수 있었다.

▲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연합뉴스
‘부끄럽다’. 박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10월25일) 다음날 10월26일자 조선일보 사설 제목이다. 이날 여야의 최순실 특검 수용합의 이후 문고리권력 3인방이 물러났고 최순실씨가 31일 검찰에 출두했다. 심지어 KBS와 MBC마저 26일 최순실TF를 구성했다. 조선일보는 이 과정에서 보수 언론의 논조를 주도하며 영향력을 과시했다. 새누리당 지도부는 당장 조선일보가 제안한 ‘거국내각’을 받았다.

조선일보는 지금 상황을 기대했던 걸까. 지금 상황이 조선일보가 의도했던 결과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송희영 국면이나 JTBC 최순실 태블릿PC 보도 국면은 조선일보가 예측하지 못한 변수였다. TV조선이 지난 7월 촬영한 최순실씨 동영상은 2017년 공개되었거나 어쩌면 영원히 공개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현 상황이 시기적으로 조선일보와 TV조선이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 채동욱 전 검찰총장. ⓒ연합뉴스
‘채동욱 혼외자’ 보도 朴정부 내부자들에서
‘우병우·최순실’ 보도 朴정부 심판자로

다만 조선일보는 이번 국정농단 사건을 주도하며 많은 것을 얻었다. “최순실 사태의 배후는 정윤회”라는 정두언 전 새누리당 의원 발언의 진위여부보다 중요한 건 총선 이후 친박이 몰락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비박계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조선일보가 비박계에 기울어있었던 건 오래된 사실이다.

조선일보는 우병우·최순실을 내치면서 보수 재집권을 위한 ‘새판 짜기’를 주도할 수 있게 됐다. ‘쳐도 우리가 친다.’ 언론권력 정점에 있는 조선일보의 전략이다. 조선일보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유료부수 하락이나 매출감소, 세무조사가 아니라 이슈선점 능력의 상실이다. 어차피 박근혜 대통령의 ‘하자’가 뚜렷하고 레임덕이 가시화됐다면 스스로 어제의 옛 ‘동지’를 쳐내는 방식으로 자신의 위치를 ‘내부자들’에서 ‘심판자’로 자연스레 옮기는 게 현명하다.

TV조선은 최순실 국정농단 보도로 뚜렷했던 ‘친박’ 채널 이미지를 벗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TV조선은 올해 초 시청률 천장을 찍었다. 시청자의 90% 이상이 50대 이상인 TV조선은 시청층을 확장하지 못하며 위기를 맞았다. 고정형 TV에 익숙한 노년층 시청률을 단기간에 끌어 올리는 대신 시청층 확대를 등한시했던 전략의 한계에 부딪혔다. TV조선은 보수편향 극우채널이란 이미지를 반드시 극복해야만 했다.

▲ 2011년과 2015년 TV조선 방송 화면.

▲ TV조선 10월25일자 보도화면.
채널전략 변화 없이 시청률 상승이 어려웠던 상황에서 TV조선은 최태민 가계도를 공개하고 박 대통령 옷을 준비했던 최순실 의상실에서 직원들이 치킨을 먹는 장면까지 공개하며 자극적으로 최순실 국정농단 프레임을 주도하고 있다. 시사토크 프로그램에선 박근혜 하야 가능성마저 언급하고 있다. 일련의 보도는 중도·야당성향의 50대 이하 시청층을 유입하는데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교양·예능 시청층의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

조선일보가 취하는 일련의 최순실 국정농단 보도는 설령 보수 재집권이 실패하더라도 진보개혁성향 정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게끔 할 수 있는 알리바이 기능도 있다. 당장 야당 지지자들이 조선일보와 TV조선 보도에 열광하고 있다.

2013년 국가정보원 대통령 선거개입 사건 수사를 지휘했던 채동욱 검찰총장에 대한 혼외자식 보도로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살렸던 조선일보는 기존의 기득권 동맹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퇴출시킴으로써 새롭게 생존을 도모했다. 조선일보는 박근혜 대통령과 분리됨으로써 또 다시 살아남았다. 조선일보가 수십 년 간 언론권력을 유지해온 방식이다.

돌이켜보면 새로운 장면도 아니다. 전두환·노태우 척결 여론이 한창이던 1995년 방우영 전 조선일보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은 생리적으로 언론을 기피하고 혐오한 사람”, “전두환 대통령은 세무조사를 언급하며 저질 협박을 했다”고 비판하며 선제적으로 군사독재 세력과 결별했다. 조선일보에게 오늘의 변신은 오래된 ‘학습’의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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