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앙·동아일보를 대표하는 논객들이 최순실 국정농단을 두고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고 나섰다.

김진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26일자 칼럼에서 “보수 세력은 박근혜를 헌신적으로 지원했다. 박정희 딸이어서, 진보·좌파 집권을 막아야 하기에, 박근혜를 열정적으로 밀었다”고 운을 뗀 뒤 “보수 세력은 끊임없이 충고했다. 아버지처럼 부하를 잘 쓰고 쓴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근혜는 듣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상한 사람들을 열심히 챙겼다”고 비판했다.

김진 논설위원은 “박근혜에게는 고언하는 부하가 거의 없다”, “박 대통령은 정치인 시절 세상물정을 잘 몰라 이미 국가에 커다란 피해를 입혔다”, “잘못된 고집불통은 집권 후 더욱 심해졌다”며 날을 세웠다. 이날 칼럼 제목은 ‘아버지, 지지자, 국가에 상처를 준 박근혜’다. 딸의 잘못으로 아버지의 ‘신화’가 부정되고 있다는 ‘경고 내지는 분노’가 엿보인다.

▲ 10월26일자 중앙일보 김진 칼럼.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주간은 같은 날 칼럼에서 박 대통령을 향해 “개헌론을 터뜨린 것이 순수해 보이지는 않는다”며 비판한 뒤 “개헌론이 동력을 받으려면 박 대통령이 최순실과 우병우를 털고 가는 결단을 내림으로써 국민과 정치권의 공감을 얻는 것이 먼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역시 박 대통령이 두 사람을 털고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

황호택 논설주간은 “박 대통령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원칙주의는 이제 고집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며 답답함을 드러낸 뒤 “박 대통령이 민심을 존중하는 수습책을 내놓지 않으면 본격적인 레임덕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며 비관적 전망을 내놨다. 이날 김진 칼럼과 황호택 칼럼은 박정희 대통령의 제삿날에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사망’을 선고했다.

25일자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기대를 접은 대목이 읽혀졌다. ‘보수 정치의 고난’이란 제목의 칼럼에서 김대중 고문은 “우병우 민정수석을 끝까지 품에서 내놓지 않는 것을 보면 그는 부하를 아끼는 주군은 될지언정 더 큰 정치를 위해 꼬리를 내주는 '도마뱀의 정치'는 모르는 것 같다”며 비판했다.

▲ 10월25일자 조선일보 김대중칼럼.
김대중 고문은 이어 “최순실씨가 주도한 미르·K스포츠 두 재단을 원칙론으로 옹호하는 것을 보면 그는 혈연인 '친가족'의 비리에는 엄격하면서 주종 관계로 이루어진 '새 가족'의 비리에는 둔감한 것 같다”고 비판한 뒤 “이대로라면 14개월 후 정치의 판은 야당으로 넘어가게 돼 있다”고 적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실패를 사실상 인정한 대목이었다.

김대중 고문은 최근 박 대통령을 비판하고 있는 조선일보 논조에 대한 일부 보수진영의 비판을 의식한 듯 “박 대통령을 감싸면 애국이고 박 대통령을 비판하면 모두 반국가이고 친야당이란 말인가”라고 되물은 뒤 “글 쓰는 사람들에게 전에는 '친노'가 무서웠는데 요즘은 '친박'이 더 무섭다”고 적었다. 조선일보의 주필은 이렇게 현 정부와의 이별을 선언했다.

독자들은 요즘 조선·중앙·동아일보의 ‘변신’에 놀라워하고 있다. 박근혜정부의 탄생에 일조했던 언론권력이 태세를 전환해 정부 권력을 사정없이 치고 있다. 그만큼 비선실세에 의한 국정농단이 심각해서일수 있다. 혹은 새누리당 재집권을 위한 거대전략일 수도 있다. 차기 정부와의 ‘공존’을 위해 알리바이를 만드는 중일 수도 있다. 보도만 똑바로 한다면 상관없다.

▲ 이정현 녹취록 보도건수. ⓒ미디어오늘
▲ 채동욱 전 검찰총장. 조선일보 혼외자식 보도로 채 전 총장의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는 멈췄다. ⓒ연합뉴스

다만 조중동에게는 ‘원죄’가 있다. 비선실세 최순실에게 힘을 실어준 건 다름 아닌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주류언론이었다. 2014년 세계일보 정윤회 문건 보도로 촉발된 ‘비선실세’ 의혹 당시 세계일보 기자는 “진실의 순간은 도둑처럼 올 것”이라고 말했지만 조중동 등 주류언론은 날선 의혹제기 대신 관련 의혹을 근거 없는 ‘지라시’로 평가절하하며 프레임을 ‘문건 유출’로 전환시켰다.

조중동은 공영방송과 함께 한국사회가 이 지경에 이를 때까지 박근혜정부를 비호하며 비판여론을 묵살했다.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사태 당시 채동욱 검찰총장을 몰아내는 데 일조했고, 박근혜의 창조경제를 홍보했으며, 최순실이 지었을지도 모를 ‘통일대박’에 갖가지 주석을 다느라 바빴다. ‘종북몰이’에 동참하며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켰고, 청와대의 세월호 보도통제에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주류언론은 조금 일찍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당시는 박근혜 대통령이 살아있는 권력이었기 때문이다. 조중동의 논조가 본격적으로 기울기 시작한 건 4·13 총선에서 야당이 압승한 뒤였다. 총선 이후부터 조선일보는 우병우 민정수석과 최순실 관련 취재를 진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2016년 4월14일자 조선일보 1면과 중앙일보 1면, 동아일보 1면 갈무리.
지금 조중동에게 필요한 건 박근혜정부 실책에 눈감았던 수많은 ‘無보도’·‘왜곡보도’에 사과하고 자사보도를 성찰하는 일이다. 많은 독자들이 조중동의 최근 보도에 열광하면서도 가슴 한 편이 찝찝한 이유는 조중동이 현 정부를 3년6개월간이나 유지시켰던 ‘내부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김대중·김진·황호택처럼 조중동을 대표하는 이들이 자사 지면에 대한 진정성 있는 성찰과 반성에 나선다면 오늘 지면에 등장하는 ‘최순실 국정농단’ 보도가 더욱 빛날 것이다.

만약 공개적으로 반성할 의지가 없다면 박근혜 비판 보도의 진정성 또한 퇴색될 수밖에 없다. 혹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대통령의 비선 운영이 아무리 치졸해도 북한 정권의 지시를 받는 무리들보다는 백번 낫다”, “박 대통령이 국가정체성 확립을 위해 취한 조치도 잊어선 안 된다”, “우리는 같은 배를 탄 사이다”,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8년 동안 점성술사에게 물어보고 일정을 정했다”고 주장하는 논객 조갑제가 진정성 면에선 더 순수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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