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JTBC가 단독 보도한 ‘최순실 파일’은 박근혜가 더 이상 대통령 자리를 지키기 어렵게 만들었다. ‘국정 최고책임자’가 공직자가 아니라 ‘자연인’일 뿐인 ‘40년 지기’ 최순실에게 연설문 수정을 맡기는가 하면 안보와 직결된 국가 기밀을 알려주고 청와대나 정부 주요 부처의 인사에 개입하도록 한 한국 헌정사상 최악의 국정 농단 사건이 폭로되자 대다수 국민들이 엄청난 충격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2013년 2월 25일 대통령직에 취임한 이래 박근혜에게는 ‘독선, 무능, 불통, 아집’ 같은 수식어가 늘 따라 다녔다. 게다가 편집증이라고 해야 마땅할 정도로 ‘비선 측근’과만 교류와 대화를 하는 생활 ‘관습’은 야당이나 그에 대한 비판자들에게 생산적 논의와 협의의 여지를 전혀 주지 않았다. 박근혜는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집단이나 개인이면 국회든 시민단체든 민주·진보 진영 인사들이든 누구든 간에 적대적 태도로 일관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 JTBC가 보도한 ‘최순실 파일’을 보면 박근혜가 최순실을 단순히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아예 대통령직을 넘겨주었다고 볼 정도로, 상상하기 어려운 일탈이 드러난다.

▲ JTBC가 지난 10월24일 방송한 ‘[단독] 최순실 PC 파일 입수…대통령 연설 전 연설문 받았다’ 리포트
명색이 ‘국가원수’라는 인물이 사인(私人)에게 국가기밀을 비롯해 주요한 정보들을 알리고, 심지어는 통일·외교·안보 정책 결정에 개입하도록 한 것은 그 어떤 나라에서도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10월 25일자 한겨레가 단독으로 보도한 기사(‘최순실, 정호성이 매일 가져온 대통령자료로 비선모임’)에 따르면 청와대 제1부속실장 정호성(‘문고리 3인방’ 중 한 명)이 거의 날마다 30cm 두께의 ‘대통령 보고자료’를 강남구 논현동 최순실의 개인 사무실로 ‘배달’했다고 한다. 한겨레와 나흘 동안 16시간에 걸쳐 인터뷰를 한 전 미르재단 사무총장 이성한은 “자료는 주로 청와대 수석들이 대통령한테 보고한 것들”이었다며 “최씨의 말을 듣고 우리가 사업계획서를 작성해 올리면 그게 나중에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 청와대 문건이 돼 거꾸로 우리한테 전달됐다”고 증언했다. 전 대통령 노무현의 연설비서관이었던 강원국은 경향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국정 운영은 말로 하는 것이고 대통령 연설문은 그 정점”이라며 최순실이 연설문에 개입한 것이 “사실이라면 대통령직을 스스로 최순실에게 넘겨준 것”이라고 말했다. 이쯤 되면 국민들은 이제 ‘박근혜 대통령’이 아니라 ‘최순실 대통령’이라고 불러야겠다.

최순실은 박근혜가 2014년 3월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발표한 ‘통일 대박’ 연설문도 빨간 펜으로 수정한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청와대가 극비사항으로 다루는 대통령의 해외 순방 일정을 사전에 통보받고 박근혜가 입을 옷까지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상왕’ 같은 권력을 행사하면서 ‘매니저’ 구실까지 한 셈이다.

▲ 지난 10월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의혹’에 관해 대국민 사과를 하기 위해 청와대 춘추관 브리핑실에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박근혜는 JTBC가 ‘최순실 파일’을 보도한 뒤 20시간 동안이나 침묵을 지키다가 25일 오후에야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회견장에 나와 90여초 동안 사과문을 읽고 나서 기자들의 질문도 받지 않은 채 떠난 장면을 녹화로 내보낸 것이다. 그는 최순실이 “과거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으로 연설 홍보 분야에서 선거운동이 국민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 개인적 의견이나 소감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다”며 “취임 후에도 일부 자료에 대해 의견을 들은 적이 있으나 청와대 보좌체제가 완비된 이후 그만두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최순실 파일’에 입력된 2백여 가지 항목들을 완전히 부정하는 말이다. 그리고 초대 비서실장 허태열을 김기춘으로 교체한 것이 취임 6개월 뒤인데 ‘보좌체제가 완비’되지 않은 시기에 최순실의 도움을 받았다는 주장은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박근혜는 “국민 여러분께 깊이 사과드린다”라는 말로 회견문 낭독을 마쳤는데, 그 어떤 국민이 이 말에 진정성이 있다고 받아들일까.

JTBC는 25일 밤 8시 ‘뉴스룸’을 통해 ‘최순실 파일’ 제2탄을 터뜨렸다. 2012년 12월 28일 당선인 박근혜가 대통령 이명박과 비공개 독대를 하기 전에 최순실이 ‘박근혜의 질문 시나리오’를 받아보았다는 것이다. 최순실은 그 과정에서 대북 관련 기밀들도 입수한 것으로 드러났다. JTBC는 “당시 천안함 침몰, 연평도 포격으로 남북관계 긴장이 고조되던 와중에 (박 당선인이) 남북간 물밑 접촉을 물었는데 이 민감한 질문이 민간인인 최씨에게 먼저 전달된 것”이라고 보도했다.

최순실이 박근혜의 대통령직 인수위 인사에 개입한 사실도 밝혀졌다. 그는 박근혜의 대통령 취임식 축하행사 기획사 선정을 주도하는 등 실질적으로 취임식을 총괄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순실 파일’이 공개된 이후 SNS의 실시간검색어에서는 ‘탄핵’과 ‘하야’가 압도적 비중을 차지했다. 야당은 물론 새누리당의 ‘친박’과 ‘비박’에서도 박근혜 책임론과 특검 요구가 거세게 일어났다. 박근혜가 24일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거창하게 제안한 ‘임기 내 개헌 주도론’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 10월25일 17시 기준 네이버(왼쪽)와 다음 인기검색어
박근혜가 결정적으로 ‘정치적 파산선고’를 받은 상황에서 여소야대 체제의 세 야당은 마땅히 탄핵소추안을 발의해야 할 것이다. ‘최순실 파일’ 말고도 탄핵 사유는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당일 의문의 ‘7시간 행방불명’, 국회에서 논의나 의결을 거치지도 않은 채 독단적으로 개성공단을 폐쇄한 일, 당사자들과 국회의 동의도 없이 ‘위안부 할머니들’ 문제를 일화 10억엔을 받고 없던 일로 해버린 사실, 성능이 검증되지도 않은 사드를 배치하기로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재벌들에게 출자를 강요하다시피 해 설립한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을 최순실이 실질적으로 사유화한 데 대해 책임을 지기는커녕 오히려 비호한 사실 등등이다.

세 야당이 합의해 박근혜 탄핵소추안을 발의할는지는 앞으로 지켜볼 일이다. 여기서 결론적으로 강조하려는 점은 나라와 국민, 그리고 민족공동체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박근혜는 하루라도 빨리 대통령직을 사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세 야당은 새누리당과 협의해서 과도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합당한 인물에게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긴 뒤 적절한 시기에 ‘궐위로 인한 대통령선거’를 치르면 된다. 공직선거법 제35조(보궐선거 등의 선거일) 1항에는 “대통령의 궐위로 인한 선거 또는 재선거는 그 선거의 실시사유가 확정된 때부터 60일 이내에 실시하되, 선거일은 늦어도 선거일 전 50일까지 대통령 또는 대통령권한대행자가 공고하여야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박근혜는 우레처럼 울리는 ‘탄핵’과 ‘하야’의 함성에 귀를 막아서는 안 된다. 다수의 주권자들이 강하게 요구하면 떠날 때를 바로 알고 떠나야 할 것이다. 혹시라도 ‘북풍’ 같은 데 의지하거나 어떤 사건을 터뜨려 임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다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미몽(迷夢)으로 끝나고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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