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정준영과 오해를 풀었습니다. … 사실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수사 진행 상황과 저의 진술내용까지 멋대로 변질된 후 보도돼 제 사생활은 심하게 침해당했습니다. 저는 지금 너무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준영과 만나고 다퉜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고통입니다.” (정준영의 옛 애인 A씨가 검찰에 보낸 탄원서)

정준영씨의 성폭행 혐의 수사는 무혐의로 끝났다. 그러나 그는 KBS ‘1박2일’ 등 출연 방송에서 하차해야 했다. 소속사측은 “일부 매체에서 사실 관계에 대한 정확한 확인 없이 성폭행이란 표현을 하는 등 자극적인 단어로 보도한 것에 대해 심히 유감”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성폭행 혐의가 무혐의로 밝혀져도 언론이 이미 한 개인의 내밀 영역을 폭로한 이후여서 그 피해를 고스란히 연예인이 지게 되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

▲ KBS 1박2일에 출연했던 정준영씨의 모습.
25일 열린 언론중재위원회 주최 세미나에서 양재규 변호사(언론중재위원회 홍보팀장)는 “성범죄는 사생활이 아니며 공인의 성범죄 사실보도에는 사생활 침해요소가 없다. 그러나 성범죄 혐의는 성범죄 사실보도와 구분해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한 뒤 “혐의가 밝혀지기 전에 보도했다가 수사 결과 당사자 간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음이 밝혀진다면 당사자의 내밀영역이라 할 수 있는 성적 관계의 무단 공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양재규 변호사는 “연예인·유명 운동선수 성범죄 관련 보도는 초동수사 단계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시점이 정보의 시의성은 높을지 모르지만 정보의 정확성은 몹시 낮은 때”라고 지적했다. 양 변호사는 “형사 절차의 진행 순서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들은 수사 개시만으로 범죄의 증명이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한 뒤 “혐의 보도만으로도 사회적 평가가 저하된다고 보는 게 사회 일반의 통념”이라며 현 보도 실태를 비판했다.

언론중재위원회 시정권고 심의기준에 따르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고소·고발된 사건 및 내용에 대한 언론보도는 금지된다. 언론중재위는 지난 8월 2016년 8차 시정권고 소위원회 회의에서 유명 연예인들의 성폭행 혐의 관련 기사를 낸 218개 매체를 상대로 시정권고를 내기도 했다. 언론중재위는 “피고소인이 유명 연예인이라 할지라도 확정되지 않은 성폭행 혐의사실 및 그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은 사생활의 핵심영역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 성범죄와 공적인물과의 조합에 따른 공적 관심사의 크기.
기자들 사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한 종합일간지 문화부 기자는 “혐의 보도에선 최소한 실명은 거론하지 말아야 한다. 이건 연예인이기 이전에 하나의 인격을 가진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말했다. 이 기자는 “공인은 아니지만 유명인으로서 연예인이 갖는 파급력을 생각했을 때 성폭행 혐의는 기사 가치가 충분하지만 혐의가 분명해질 때까지 익명보도를 해야 무혐의가 됐을 때 피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문종대 동의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고소·고발을 시도한 것은 그만큼 (피해자의) 절박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며 “공인의 성범죄 혐의 보도에 대한 자유는 넓게 보장되어야 한다”고 밝히면서도 “무죄로 판명된 경우 언론은 피해자가 된 공인들에게 충분한 의견 개진 기회를 제공하고 사건을 종합해야 한다. 이는 피해자뿐 아니라 독자에 대한 예의”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선정적인 보도를 쏟아내던 언론이 무혐의 이후 얼마나 반성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와 관련 오창호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부경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은 “성폭행 고소·고발 배후에는 금전적 이득을 노리거나 한 사람의 인생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고자하는 복수심 따위의 불순한 의도가 자리 잡은 경우가 많다. 언론은 독자의 관심을 끌어 매체 파워를 키우려는 의도가 크고 포털 뉴스서비스의 목적은 접속수와 방문시간을 늘리는 것이다”라고 전제한 뒤 “고소 당사자와 언론은 공동의 이해를 갖고 있는 셈”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 25일 언론중재위원회가 개최한 '공인의 성범죄보도, 알권리인가 사생활 침해인가' 세미나 모습. ⓒ언론중재위원회
현재로선 무분별한 성폭행 혐의 실명 보도 실태를 바로잡기 위해 피해자들이 명예훼손에 따른 법적 책임을 직접 묻는 수밖에 없다. 양재규 변호사는 “수사기관의 공식 발표가 아닌, 기자와 개인적 친분을 통해 들은 정보를 토대로 한 보도는 면책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언론은 혐의가 확정될 때까지는 익명보도를 원칙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언론 스스로 자정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한 법적 처벌은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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