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적’이에요 ‘당직’이에요?”

20일 오후 손학규 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의 기자회견 직후 기자들은 손학규 전 고문의 발언을 재확인하느라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야했다. 손 전 고문이 기자회견에서 “당적도 버리겠다”고 말한다는 걸 실수로 “당직도 버리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당적도 버리겠다”는 말은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당직도 버리겠다”는 말은 상임고문 직을 내려놓고 민주당에서 백의종군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정답은 ‘당적’이었다.

기자들이 헷갈릴 만큼 손 전 고문이 정계복귀 선언과 탈당 선언을 동시에 발표한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일단 정계복귀 선언을 하고 어디로 갈지 저울질하며 몸값을 높일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손 전 고문은 20일 기자회견에 앞서 측근이라 불리는 이종걸, 강창일, 양승조, 오제세, 조정식, 이찬열, 전혜숙, 강훈식, 고용진, 김병욱, 정춘숙 의원 등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손학규 전 고문은 탈당 사실을 알렸고 대부분의 의원들이 탈당을 만류한 것으로 전해졌다.

손학규 전 고문 입장에서는 나름의 ‘돌발 승부수’였으나 민주당을 흔들 수 있느냐는 점에서 효과는 크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현재까지 손 전 고문을 따라 탈당한 측근은 이찬열 민주당 의원뿐이다. 이 의원은 21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오늘 당적을 떠나 손학규 대표님과 함께 하겠다”고 밝혔다.

▲ 손학규계 이찬열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동반탈당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나머지 의원들 사이에서 탈당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손학규계로 알려진 이개호 의원은 21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나는 탈당 안 한다”고 말했다. 손 전 고문과 가까운 이종걸 의원은 YTN ‘신율의 출발 새아침’ 인터뷰에서 “그분 가는 길에 제가 똑같이 보조를 맞추며 갈 만한 제 능력, 소신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손학규라는 인물이 대선주자로서 더 이상 파괴력을 가지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야권에는 이미 문재인 전 대표라는 압도적 1위 후보가 있고 박원순 서울시장, 안희정 충남지사 등 다양한 후보군이 존재하고 있다. 게다가 손 전 고문은 지난 총선에서 당의 지원유세를 거절함으로써 정치적으로 복귀할 타이밍을 놓친 상황이다.

‘탈당과 제3지대’는 그런 의미에서 손학규 전 고문 입장에서 최적의 선택이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김성완 정치평론가는 21일 CBS ‘뉴스쇼’ 인터뷰에서 “여권은 반기문, 야권은 문재인이라는 대선구도가 짜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으로 복귀해도 게임의 룰을 가지고 한참 싸우다 결국 팻감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라며 “그래서 선택한 것이 제3지대”라고 설명했다.

당장 ‘제3지대론’을 밀고 있는 국민의당은 환영 입장이다.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은 21일 원내대책회의에서 “우리 국민의당이 문을 활짝 열고 문턱을 낮추고 있기 때문에 손학규 전 대표는 물론 정운찬 전 총리, 그리고 지금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다른 당의 많은 인사들도 대권에 꿈이 있다면 우리 국민의당과 함께 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손 전 고문은 제3지대를 확장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개헌’을 제시했다. 손 전 고문은 “6공화국은 이제 명운을 다했다. 이제 7공화국을 열어야한다”고 강조했다. 이로 인해 제3지대가 포괄할 수 있는 세력은 새누리당 내 비박과 민주당 내 비문(비문재인)으로 넓어졌다.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의 측근인 김성태 의원은 21일 “이제는 당파성과 패거리 정치를 넘어 민주주의를 내용적으로 복원하고 충족해 가야 할 때”라며 ‘제7공화국론’에 환영의 뜻을 밝혔다.

손 전 고문의 ‘제7공화국론’이 비박-비문에게 던지는 메시지인 또 다른 이유는 그가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전 대표와 박근혜 대통령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개헌이라는 화두를 통해 제3지대를 묶어내겠다는 뜻만 밝혔다. 비박과 비문에게 ‘박근혜에 반대한다’ ‘문재인에 반대한다’가 아닌 제3지대로 갈 수 있는 정치적 명분을 제공해준 셈이다.

김성완 평론가는 이에 대해 “손 전 고문은 기자회견 내내 박근혜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표의 이름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비판도 하지 않고 오직 새 판 짜기만 강조했다”며 “기존 정치인들을 비판하는 구시대 정치인 아니라 새판을 짜는 격이 다른 사람이니 이쪽을 선택하라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정계복귀 선언을 위한 기자회견을 앞두고 이동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정치공학적으로도 봐도 손 전 고문이 제3지대로 비문과 비박을 끌어 모을 수 있다면 큰 이득이다. 당 내에 머물면 경선 팻감으로 쓰이는 것과 달리 제3지대에서는 대선주자로 중심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손 전 고문은 대권 출마 선언을 하지 않았다. 손 전 고문은 오히려 “제가 무엇이 되겠다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생각도 없다. 명운이 다한 6공화국 대통령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했다. 더불어민주당과 새누리당의 비주류 세력들이나 안철수 국민의당 의원에게도 솔깃한 제안이다. 손 전 고문의 목표가 대통령이 아니라 개헌 이후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제 개헌 이후 총리를 꿈꾸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고, 손 전 고문과 손을 잡아 제3지대의 대통령 후보로 나설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결국 손학규 전 고문의 탈당은 단순히 제3지대의 대통령 후보가 되어 문재인 전 대표와 경쟁해보겠다는 뜻이라기보다 개헌을 명분으로 세력을 끌어모아 판을 흔들어보겠다는 전략으로 읽어야 한다.
    
최영일 정치평론가는 21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제3지대를 주장하는 이들로 야권에 안철수, 박지원이 있고 여권에는 정의화, 이재오와 친이계 등이 있다”며 “동상이몽에 색깔도 다 다른 이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뚜렷한 명분은 개헌이다. 다들 개헌에 관심은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대선국면에서 흥행하게 만드느냐가 고민인 것”이라고 말했다. 최영일 평론가는 “그래서 손학규 전 고문의 역할이 필요한 것”이라며 “야당의 잠룡이면서 중도론자이고 확장성도 있고. 원래 보수당에 있다 온 사람이다. 제3지대와 개헌의 불쏘시개로는 손학규만한 재료가 없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박근혜 정권 이후 치러지는 대선에서 제3지대와 개헌이 얼마나 국민들에게 소구력을 지닐 수 있는가이다. 최영일 평론가는 “중도론의 한계는 지금의 박근혜 정부에게서 기인한다. 미르, K스포츠재단 등으로 대혼란에 빠져들고 있는데도 박근혜 정부는 끝까지 버티려 할 가능성이 높다”며 “이 박근혜 정부와 얼마나 파이팅 있게 맞서느냐가 야권에 소구력 있게 느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근혜도 문재인도 까지 않고 새 판을 짜겠다는 메시지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최영일 평론가는 “문재인에 대한 비판은 확장성이 없다는 것이고 손학규는 확장성은 좋은데 ‘야당 맞나’라는 질문에 답하는 상황이 올 것이다. 원래 문재인과 안철수가 그런 관계인데, 결과는 둘이 갈라지는 것이었다”며 “손학규의 제3지대가 다시 그 길을 갈 것이냐, 야권지지층이 열광할 수 있는 연대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느냐, 그 메시지에 주목해야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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