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대주주 방송문화진흥회(이하 방문진)에서 희대의 ‘필리버스터’가 펼쳐졌다. 연사로 나선 이들은 공안검사 출신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과 ‘애국 진영’의 여당 추천 이인철 이사.

고 이사장과 이 이사는 각각 45여분과 1시간씩 할애해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왜 공산주의자인지, 그 까닭을 담은 원고를 이사회에서 낭독했다. 두 인사의 필리버스터는 고 이사장에 대한 야당 이사들의 사퇴 요구를 좌초시켰다.

방문진 판 필리버스터 사연은 이러하다. 20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방문진 이사회에서 야당 이사들(유기철‧이완기‧최강욱 이사)은 ‘이사장 거취의 안’을 석상에 올렸다.

야당 이사들은 고 이사장이 문 전 대표를 공산주의자로 지칭했다가 지난달 3000만원 손해배상 판결이 난 사안을 포함해 이념 편향성과 사법부 경시 태도, 방문진 책임 방기, 이사회 운영 불공정성 등을 이유로 이사장 불신임을 묻고자 했다. 

이완기 이사는 지난 1년 고 이사장 체제에 대해 “다수가 지배하는 이념 전투장이었다”며 “MBC를 관리‧감독해야 할 본연의 역할은 사라졌고 MBC 경영진을 비호하는 방패막이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 지난 10일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 증인으로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야당 이사들의 사퇴 요구에 고 이사장은 “민사소송 1심에서 패소했다는 이유로 이사장을 그만두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무죄추정의 원칙을 보장한 헌법을 위배하는 발상”이라고 맞받아쳤다.

그의 해명은 곧 1심 판결을 내린 김진환 판사에 대한 독설과 비난으로 이어졌다. 고 이사장은 지난 6일 김 판사가 ‘우리법연구회’ 출신이라며 “민주당이 소송을 제기해 민주당이 판결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해 물의를 빚었다. 

고 이사장은 20일에도 “피고(고영주 자신) 측 변론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막무가내로 진행했다”며 “우리법연구회는 전교조, 민노총과 함께 노무현 정부와 민주당의 근간”이라고 비난했다.

고 이사장은 1심 판결문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준비한 반박 원고를 낭독하는 방식으로 비난을 이어갔다. “판사가 판결문에 공공연히 피고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조선시대 원님판결에서나 가능한 판결” 등의 발언과 함께 문 전 대표가 왜 공산주의자인지에 대한 주장으로 45분여를 채운 것이다.

낭독 중 한 이사가 “쉬었다가 하시죠”라고 권유하자 고 이사장은 “물만 마시면 된다”며 낭독 완주에 강한 의지를 드러냈고 목소리는 원고를 다 읽은 뒤에도 낭랑했다.

두 번째 필리버스터 주자는 여당 추천 이인철 이사였다. 그는 고 이사장의 일장 연설에 대해 “깊이 있는 이야기”라고 추켜세운 뒤 “고 이사장에 대한 변론이 인터넷에 요약된 게 있어서 말씀을 드린다”라고 했다.

그는 한 극우 성향의 인사가 ‘대한민국을 위한 고영주의 변론’이라는 제목으로 극우 매체에 게재한 글과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가 피고 측 재판증거로 제출한 의견서를 무려 한 시간 동안 낭독했다. 고 이사장 거취 논의 자체를 틀어막는 목적이 다분한 기행에 가까웠다. 

그가 인용 낭독한 내용에는 “노무현이 감정적 좌파라면 문재인은 이념적 좌파” “문재인에겐 북한 독재자가 먼저” 따위의 ‘색깔론’이 주를 이뤘다. 고(故) 리영희‧신영복 선생에 대해서는 “확고한 공산주의자”라고 규정했다. 

이 이사가 읽은 양 교수의 의견서는 자의적으로 설정한 공산주의자 구별 기준 11개에 문 전 대표가 모두 부합하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라는 터무니없는 논리로 채워져 있었다.

두 인사의 필리버스터가 끝난 뒤에도 납득하기 어려운 발언들이 여당 측에서 쏟아졌다.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인 여당 추천 유의선 이사는 “문 전 대표는 대통령이 될 수도 있는 강력한 분”이라며 “나름대로 사상 검증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논의는 실종됐다. 야당 이사들에 대한 여당 이사의 비아냥이 이어졌다. 여당 이사들은 필리버스터 이후 이어진 야당 이사들의 발언 도중 모두 떠나 이사회는 파행으로 끝이 났다.  

야당 추천 최강욱 이사는 “방문진이 갈 때까지 간 것”이라며 “오늘 방문진에서 벌어진 모습에 대한 평가는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고 유기철 이사는 “방문진을 이념 홍보의 장으로 전락시켰다”며 “양심, 도리와 염치 모두 사라졌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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