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이 정국 반전의 카드로 제기한 ‘송민순 회고록’ 논란이 예상보다 이슈화되지 못하고 있다. 추가적인 의혹이 나오지 않는 송민순 회고록 논란과 달리 최순실 게이트 관련 의혹은 연일 터져 나오며, 최순실 게이트를 덮기 위해 회고록 논란을 키우고 있다는 비판만 커지는 형국이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20일 원내대표단 회의에서 “문재인 전 대표는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기권 대북결재 사건의 모든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새누리당은 지난 14일 2007년 노무현 정부가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 표결과정에서 북한 의견을 물어본 뒤 기권했고, 이 과정에 문재인 당시 비서실장이 개입했다는 내용의 ‘송민순 회의록’을 처음 문제제기한 이후 일주일 째 송민순 회고록 논란을 언급하고 있다.

일단 ‘송민순 회고록’ 논란은 주요 뉴스를 차지하는 데, 즉 어젠다 세팅(agenda-setting: 의제설정)에는 성공했다. 주요 일간지와 방송사들이 새누리당의 주장과 이에 대한 문재인 전 대표의 입장, 당시 관계자들 간의 진실공방을 다루며 관련 뉴스가 주요 머리기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 ⓒ미디어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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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의도했던 효과는 보지 못하고 있다. 손혜원 민주당 의원실의 김성회 보좌관은 19일 팟캐스트 ‘김용민 브리핑’ 인터뷰에서 “(회고록) 관련해서 몇몇 새누리당 보좌관들하고 이야기를 해봤는데, 전반적으로 ‘이빨이 안 먹히는 데 글을 쓰려니 괴롭다’는 반응”이라며 “예전 같으면 (여론이) 확 일어나서 자기편으로 쏠릴 텐데 (그렇지 않다는 것)”라고 전했다.

‘거리’ 없는 회고록 논란, 추가 팩트 터져나오는 최순실 게이트

송민순 회고록 논란이 별 효과가 없다는 점은 여론조사에서도 나타난다.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얼미터가 매일경제·MBN ‘레이더P’ 의뢰로 2016년 10월 17일부터 19일까지 3일간 전국 1,529명(무선 8: 유선 2 비율)을 대상으로 조사한 10월 3주차 주중집계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는 27.2%를 기록했다.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이 20% 대로 내려앉은 것은 처음이다.

새누리당의 지지율은 지난 주에 비해 2.6%p 빠진 28.9%를 기록했다.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은 1.4%p 빠진 29.1%를 기록했다. 양당 간 공방으로 양당 모두 지지율이 하락했으나 새누리당의 하락 폭이 더 커서 오히려 민주당에 이어 정당 지지율 2위를 기록한 것이다. 리얼미터는 “지난주 14일(금)부터 시작된 ‘송민순 전 외교부장관 회고록’을 둘러싼 여당의 공세는 박 대통령의 지지층 결집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송민순 회고록’ 공세가 효과를 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더 이상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만한 ‘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즉 의제설정은 했으나 어젠다 키핑(agenda-keeping: 의제유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새누리당이 참여정부와 문재인 전 대표가 북한과 ‘내통’했다고 내세우는 근거는 송민순 전 장관의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에 기록된 8페이지 가량의 관련 내용뿐이다.

(중앙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 새누리당이 만든 송민순 회고록 관련 카드뉴스. 문재인 전 대표의 고백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을 잘 드러낸다. ⓒ새누리당

새누리당의 주장을 입증할 만한 추가적인 근거자료가 있을 지도 의문이고, 있다 해도 공개가 쉽지 않다. 추가적인 ‘팩트’가 나올 게 없기에 시간이 갈수록 언론에서 다루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최순실 게이트’와 대비된다. 지난 9월20일 한겨레가 ‘K스포츠재단 이사장은 최순실 단골 마사지 센터장‘이라는 내용의 단독보도를 통해 최순실을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낸 이후, 한 달 가까이 고구마줄기처럼 관련 의혹과 팩트가 터져 나오고 있다.

여당이 송민순 회고록으로 정국 반전을 노리던 시기에도 최순실 관련 의혹과 팩트는 계속 터져 나왔다. 경향신문은 18일 문제의 K스포츠재단이 국내 재벌그룹에 올 초 80억원대 투자를 제안한 사업의 주관사가 최순실과 딸 정유라가 대주주인 독일 회사 비덱이라고 단독 보도했다. 최순실이 왜 미르‧K스포츠재단을 만들었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주는 보도였다.

이어 한겨레와 경향은 19일 독일과 한국에 각각 스포츠컨설팅 전문기업 ‘더블루K’를 설립한 사실을 보도했다. 재단을 만들어 대기업 돈을 모으고, 자신이 세운 한국 회사를 거쳐 독일에 있는 페이퍼컴퍼니로 돈을 빼돌리려 한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또한 JTBC는 19일 최순실이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을 직접 고쳤다고 보도했다. TV조선은 정유라의 지도교수였던 함모 교수를 단독 인터뷰했고, 정유라가 출석을 안 해 제적시키려던 함모 교수에게 최순실이 항의하면서 지도교수가 교체됐다고 보도했다.

‘거리’가 없자 새누리당은 급기야 ‘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19일 국정원을 대상으로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가 계기였다. 새누리당 간사를 맡고 있는 이완영 의원은 국감 이후 브리핑에서 2007년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논의 당시 김만복 국정원장이 북한의 의견을 물어보자고 먼저 제안한 게 맞느냐는 질문에 이 원장이 동의했다고 밝혔다. 이완영 의원은 또한 “문재인 비서실장이 그렇게 하자고 결론을 낸 것에 대해서 맞느냐는 질문에 대해 국정원장은 맞다고 했다”고 전했다.

▲ 20일자 TV조선 뉴스 갈무리
관련기사 : 새누리당 다급했나, 국정원장 발언 거짓 브리핑 논란

20일 오전 방송과 아침신문은 관련 내용으로 도배가 됐다. 하지만 이내 이완영 의원의 브리핑은 거짓 논란에 휩싸였다. 같은 자리에 있던 야당 정보위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이병호 원장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병호 원장이 2007년 회의에 참석한 적도 없고, 당시 기록을 볼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런 확답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야당 의원들은 이 원장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음을 확인해줬다고 밝혔다.

정보위 소속 신경민 의원은 “(이완영 의원이) 문재인 비서실장과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 이야기를 브리핑해서 이것이 오늘 아침 신문과 방송을 도배하게 만들었다”며 “어제는 최순실이 대통령의 연설원고에까지 집착했고 고쳤다는 것이 드러난 시점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이걸 덮기 위해 그랬던 것인지 왜 이렇게 국정원장에게 매달렸던 것인지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새누리당이 무리하게 언론에 ‘거리’를 던져줬다는 것이다.

문재인의 무시 전략, 계속 이야기하는 최순실 주변 사람들

문재인 전 대표와 야당의 대응도 이 이슈가 지속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문재인 전 대표는 “기억나지 않는다”며 논란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18일에는 “그 질문은 안 하기로 했죠”라며 기자들의 질문을 아예 차단했다. 이런 반응은 안팎에서 ‘대선주자답지 않은 태도’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불러일으켰지만 했지만, 동시에 진실공방의 확산을 제한하기도 했다.

야당 지도부는 회고록을 둘러싼 진실공방에는 이재정 전 통일부장관, 김만복 전 국정원장 등 당사자들만 참여하게 하면서 동시에 새누리당을 ‘최순실 게이트 물타기용’ ‘색깔론’이라고 공격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2002년 방북 이야기까지 꺼냈다. 새누리당은 “역색깔론이다” “물타기가 아니다”라고 대꾸하면서 논점의 일부가 ‘색깔론’ ‘최순실 게이트’로 옮겨갔다.

이는 새누리당이 그간 논란에 대처하는 방식과 닮아있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지난 6월 세월호 참사 당시 KBS 보도에 개입했다는 녹취록이 공개되자 “홍보수석으로서 임무를 다한 것”이라고 밝힌 뒤 “입장을 이미 밝혔다”며 입장 표명을 거부했다. 이어지는 논란에는 “정치공세”라고 대처했다. 새로운 팩트가 나오지 않으면서 논란은 자연스럽게 가라앉았다.

▲ 19일자 JTBC 뉴스룸 갈무리
최순실 게이트 역시 최순실과 정유라 등은 논란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계속 새로운 인물들의 새로운 증언이 쏟아져 나오며 새로운 논란이 생겨나는 모양새다. 미르‧K스포츠재단 관계자, 대기업 관계자, 최순실의 측근, 이화여대 교수 등이 그 주인공이다.

‘달그닥 훅’이 지닌 디테일의 힘

이 다양한 등장인물의 존재로 인해 발생하는 효과가 ‘디테일의 힘’이다. 사람들은 추상적인 이야기에 살을 붙였을 때 그 이야기를 더 잘 믿고, ‘이야기 거리’로 삼는 경향이 있다. 이는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중요하다고 설명한 교과서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선생님이 지나가는 소리로 한 농담은 잘 기억나는 원리와 유사하다.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성완종 전 의원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팩트에서 사람들 기억에 남는 디테일은 ‘비타 500’이었다. ‘노무현이 돈 얼마를 받았다’보다 ‘논두렁에 시계를 버렸대’가 더 기억에 남는다.(이인규 전 대검 수사부장은 이 논두렁 시계 이야기가 국정원이 지어낸 것이라 폭로했다)


최순실 게이트에는 ‘달그닥, 훅’ ‘망할 새X들에게 비추’ 같은 디테일이 있다. 사람들은 정유라가 이대에서 특혜를 받았다는 것과 함께 정유라가 작성한 황당한 답안지의 내용을 기억한다. 누리꾼들은 ‘달그닥, 훅’과 ‘망할 새X들에게 비추’라는 단어를 끊임없이 패러디하며 퍼트리고, 기억한다. 최순실 게이트의 실체가 세상에 드러난다면, 그것은 ‘달그닥, 훅’의 힘 때문이지도 모른다. 

▲ 대학생 공모전, 취업 소식을 주로 알리는 한 페이스북 계정에 올라온 정유라 이대 특혜 의혹 관련 패러디 게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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