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야당의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인 문재인 전 대표가 ‘송민순 회고록’ 논란으로 다시 ‘색깔론’에 휘말렸다. 새누리당은 문재인 전 대표와 야권 전체를 겨냥해 다시 종북 프레임을 꺼내들었다. 2012년 대선 당시 제기된 NLL 대화록 논란과 유사한 모습이지만, 문 전 대표와 야권의 대응은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최근 발간한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에서 2007년 11월 18일 청와대 서별관회의에서 유엔 대북결의안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김만복 전 국정원장이 ‘남북 채널을 통해 북한에 의견을 묻자’고 제안했고, 문재인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일단 남북 경로로 확인해 보자’고 결론 내렸다고 밝혔다.

새누리당은 이 사건을 ‘북한정권 결재사건’이라 규정하며 총공세에 나섰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17일 최고위원회 회의에서 “김정일의 결재를 받아 우리 외교·안보 정책을 결정했다는 게 사실이라면 이는 대한민국 주권 포기이자 심대한 국기 문란 행위”라고 밝혔다.

전날인 16일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북한 인권 결의에 대해 북한 당국과 협의를 했다면 내통 모의”라고 비난했다. 송민순 회고록 관련 TF 팀장을 맡은 박명재 새누리당 사무총장은 15일 TF 회의에서 “종북(從北)을 넘어 종복(從僕)이 아니냐”고 말했다.

당시 의사결정에 관여했던 인사들은 송민순 전 장관의 회고록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하고 있다. 송민순 전 장관의 회고록에 따르면 북한 의견을 물어보자고 제안한 이는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이고, 문재인 비서실장 등이 이를 수용했다. 김만복 전 국정원장은 17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그런 빤한 걸 물어보는 그런 바보가 어디 있나”라며 “대통령 주재 회의에 내가 참석한 사실이 없다”고 반박했다.

▲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한 정진석 원내대표가 송민순 전 장관의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를 보고 있다. ⓒ포커스뉴스

당시 회의에 참석한 것으로 알려진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현 경기도교육감) 역시 17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이미 결정난 걸 왜 북한에다 물어보고 확인을 해 보나. 남북관계가 이런 상황에 있고, 남북관계를 잘 관리하는 입장에서 작년에 (결의안에) 찬성했다 금년에 기권을 하니까 이건 미리 통보해 주는 것이 옳지 않느냐. 그렇게 된 걸로 기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연설비서관을 지낸 김경수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16일 기자회견을 열고 “결의안에 기권할 것인가 찬성할 것인가의 문제는 (2007년) 11월16일 대통령 주재 회의에서 기권하기로 결정을 했다”고 반박했다. 이미 기권여부는 결정되었고 이후 북한에게 통보했다는 것이다. ‘결재를 받았다’는 새누리당의 주장과는 거리가 있다.

새누리당이 일반적인 외교 행위를 ‘내통’이라 문제 삼는 것은 무리라는 비판도 나온다. 참여정부에서 통일부장관 정책보좌관을 지낸 김연철 인제대 교수는 15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에 대해 노무현 정부는 2004년 불참 2005년 기권 2006년 찬성 2007년 기권했다. 남북관계가 풀릴 때는 불참 혹은 기권했고, 2006년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모든 남북관계가 중단되었을 때, 찬성했다”며 “2007년은 알다시피 2차 정상회담 직후 남북관계가 가장 활성화되었을 시기다. 지금의 남북관계 기준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2007년 11월14일 남북총리급 회담, 16일 북한 총리의 청와대 방문 등을 통해 남북정상회담 후속조치들을 논의하던 상황이었기에 결의안 관련해 북한에 통보를 한 것이 당연한 외교행위였다는 것.

김종대 정의당 의원도 16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2002년에 박근혜 당시 미래한국연합 대표가 김정일과 만나 단독으로 한 4시간의 밀담은 왜 규명하지 않나. 이명박 대통령 시절인 2011년에 청와대 김태효 비서관이 베이징에서 북한 대표를 만나 정상회담을 구걸하며 돈 봉투를 내민 사건은 왜 규명하지 않나”라고 말했다. 같은 논리대로라면 새누리당 정권의 공개되지 않은 대북 접촉도 모두 ‘내통’이라는 지적이다.

이번 논란은 2012년 대선 국면에서 등장한 NLL 대화록 논란과 닮아있다. 2012년 10월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이 2007년 정상회담 대화록을 열람한 결과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NLL을 포기하는 발언을 했다고 폭로했다. 김무성 선대본부장은 대화록 일부 내용을 유세 연설 도중 유포하기도 했다.

▲ 17일 인천 남동공단 내 산업기계 제조업체 디와이를 찾은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문재인 전 대표는 최근 '송민순 회고록' 논란과 새누리당의 '종북 시녀' 비판에 관련해 이날 취재진에게 “새누리당은 북한 덕분에 존속하는 정당”이라고 밝혔다. ⓒ포커스뉴스
이는 노무현 대통령 비서실장이던 문재인 후보의 안보관에 대한 공세의 일환이었다. 이 공세는 2013년 초반까지 이어졌고, 참여정부 관계자들과 문 전 대표 측, 야당이 “포기 발언은 없었다”고 반박하면서 진실공방으로 번졌다.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송민순 회고록 논란도 NLL 대화록 논란처럼 진실공방으로 이어지는 것이 대선을 앞두고 문 전 대표의 안보관에 계속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를 의식한 듯 문재인 전 대표는 논란에 직접 개입하지 않은 채 당시 참여정부 인사들이 반박을 이어가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문재인 전 대표는 17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새누리당은 북한 덕분에 존속되는 정당이다. 종북논란, 색깔론으로 국정운영의 동력을 삼는다”고 비판했다. 기자들의 추가 질문에 문 전 대표는 “사실관계를 기억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라”고 답했다.

문 전 대표는 앞서 16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내통이라, 대단한 모욕이다. 당대표란 분이 금도도 없이, 내통이라면 새누리당이 전문 아닌가”라며 “앞으로 비난하면서 등 뒤로 뒷거래, 북풍, 총풍. 선거만 다가오면 북풍과 색깔론에 매달릴 뿐 남북관계에 철학이 없는 사람들. 이제 좀 다른 정치하자”고 밝혔다. 진실공방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낸 셈이다.

이는 지난 2012년 NLL 대화록 공방 때 문 전 대표의 모습과 거리가 있다. 문 전 대표는 2012년 말과 2013년 상반기까지 이어진 대화록 공방에서 “포기 발언이 없었다”고 직접 반박에 나섰다. “NLL 포기발언이 사실이면 정계를 은퇴하겠다”는 입장까지 냈다.

문재인 전 대표는 2012년과 달리 진실공방에 참여하지 않은 채 ‘경제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문 전 대표는 논란이 불거진 17일 이익공유 기업 ‘디와이’를 방문했다. 이익공유제를 통해서 합의된 배분 방식으로 이익을 나누고, 나머지는 미래성장을 위해 투자하는 실제 사례를 들여다보겠다는 이유 때문이다. 새누리당의 공세를 정치공세로 치부하고 경제행보를 이어가겠다는 뜻이다.

문 전 대표는 17일 기자들의 송민순 회고록 관련 질문에 “(새누리당은) 남북관계를 정쟁 속으로 끌어들였다. 국민에게 성공할 수 없다”며 “저와 우리 당은 새누리당이 그러거나 말거나 경제와 민생 살리기에 전념하겠다”고 답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김성원 새누리당 대변인은 17일 브리핑에서 “(문 전 대표가) 북한 결재사건의 본질에 대해선 침묵하고 변죽만 울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문 전 대표가 공방에 개입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 표시인 셈이다.

송민순 회고록 논란이 장기적로 지속되기 어려운 이슈라는 판단도 있다. NLL 대화록 논란의 경우 진위공방은 물론 문서유출 논란, 사초 폐기 논란까지 겹치며 이슈가 이어졌다.

하지만 송민순 회고록 논란은 다르다. 새누리당은 국정조사와 국회 청문회, 특검까지 제시하고 있지만 사실상 회고록과 당사자들의 증언 외에 더 나올 게 없다. 이정현 대표가 박맹우 사무총장에게 “그 회의에 참석했던 당시 외교장관의 회고록 이상 더 정확한 조사결과가 나올 수 있겠는가. 실추된 대한민국 외교를 정상으로 되돌리겠다는 우리의 의지를 전세계에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목적으로 충실하게 임해 달라”고 당부한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한 'UN 북한인권결의안 대북결재사건 TF'(가칭) 팀장을 맡은 박맹우 의원이 메모를 하고 있다. 메모에는 특검, 청문회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포커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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