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홍보실이 제주대 산학협력단과 함께 한수원에 제출한 161페이지 분량의 ‘원자력 정책의 포퓰리즘화 가능성과 대응방안’ 연구보고서에는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이하 원전)사고 이후 높아진 반핵여론에 고심하는 한수원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원자력 정책의 포퓰리즘화 가능성과 대응방안’ 보고서
“반핵진영,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대한 대중적 공포 이용”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김성수 의원실이 입수한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한수원은 반핵을 주도하는 시민단체·언론·정치권을 ‘원전 포퓰리즘’ 준동세력으로 규정하며 이들에 대한 효과적 대응을 통해 부정적 여론을 타파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대중적 지지를 위해 단기적 이해에 부합되는 정책을 제안하고, 부정확한 정보에 기댄 선동과 무지한 대중을 전제로 한 ‘포퓰리즘’이란 용어로 원전반대여론을 설명한 지점에서 한수원의 인식수준이 드러난다.
보고서에서 드러난 친 원전 세력의 큰 고민은 반핵진영의 정치세력화였다. 보고서는 70여개의 환경·시민·지역단체가 연대한 ‘핵 없는 사회를 위한 공동행동’과 녹색당의 등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특히 녹색당을 두고서는 “반핵운동을 제도권 안으로 진입시켜, 국가적 아젠다로서 공론화를 시도하려는 움직임의 일환”이라고 분석했다. 보고서에선 이들이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대한 대중적 공포를 이용한다”며 폄훼하는 대목도 눈에 띄었다.
보고서에 담긴 친 원전세력의 ‘찬핵’ 전략 핵심은 선거쟁점화 차단이었다. 보고서는 “원자력의 지속 가능성 여부는 정치에 의해 결정 된다”고 진단하며 “반핵진영은 더욱 조직화되고 정치화된 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무조건 안 된다는 식의 논리에서 벗어나 에너지전환 로드맵을 작성, 단계적 탈핵으로 활동 방향을 전환했다”며 “원자력 이슈의 포퓰리즘화를 막기 위해 원자력 문제가 선거 쟁점화하지 않도록 관리할 필요가 크다”고 지적했다.
한수원 보고서는 반핵담론을 잠재울 찬핵담론 구축을 위해 “학자와 국회의원, 원자력 전문가, 언론인 등으로 구성된 찬핵 단체를 꾸려야 한다”며 “반핵운동의 세력화에 대응하는 친원전 세력의 연대조직화”를 주문했다. 이어 부안 방폐장 주민투표 사례를 언급하며 “주민투표라는 새로운 해법제시를 통해 언론보도 프레임을 반전시켰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주민투표를 둘러싼 갈등으로 원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 프레임은 주류언론에서 찾기 어려웠다.
보고서에선 반핵세력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한수원을 비롯한 친 원전세력의 ‘안이한 대응’을 비판한 대목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보고서는 “최근 반핵운동은 교수, 법률가, 의사 같은 전문가 그룹이 합류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사회지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전문가 그룹의 합류는 이른바 골수 탈핵·반핵 활동가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원자력계는 전문적 지식으로 무장한 이들의 공세에 어떻게 대응해 나갈 것인가라는 숙제를 떠안게 됐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국민투표 또는 주민투표→국회의 법제화→대통령의 결단과 선언을 탈핵 결정 과정에 이르는 경로로 예상하며 “각각의 경로에 대한 체계적 대응책 마련이 필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응책은 크게 △적정 원전 비중 유지를 위한 전기요금 편익 홍보 △원자력의 경제성 논쟁 해소 △공포의 체계적 이용에 대한 관리 △반핵/탈핵 대항담론 체계 구축 △반핵/탈핵 세력화에 대한 전략적 대응으로 분류됐다.
보고서는 무엇보다 “한국의 저렴한 전기요금은 원자력 정책의 포퓰리즘화를 제약하는 핵심 변수”라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탈핵 주장과 에너지 비용부담 주장이 병행되면 탈핵 주장의 논거가 약해질 수 있다”며 “전기요금 인상은 국민적 저항의 가장 중심적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반핵논리에 맞서 전기요금 인상논리를 집요하게 펼쳐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보고서는 “원자력 경제성이 아무리 높아도 안전성이 낮게 인식되면 지지를 받기 어렵다”며 “안전성 문제에 찬핵 진영이 지나치게 낙관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은 문제”라고 꼬집었다.
보고서는 원전에 대한 불안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정보공개를 꼽기도 했다. 보고서는 “최근 불거진 고리 원전 정전 은폐사건, 고리와 영광의 납품비리 사건 등은 원자력에 대한 불신을 부추기고 있다”며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원전 내에서 발생하는 사건 사고에 대해서는 신속하고 투명하게 관련 정보를 공개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반핵세력은 폐로비용, 방사성 페기물 처리비, 주변지역 보상비, 원전사고 보상비를 발전원가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며 “원자력계와 정부는 투명한 정보공개를 통해 반대 측과 소통을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한수원이 내부보고서에 등장한 제언을 얼마나 받아들였는지는 의문이다.
대안은 돌고 돌아 다시 ‘홍보와 협찬’이다. 한수원 보고서는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의 對언론홍보사업을 가리켜 “전략적 홍보가 아닌 전 방위적 홍보에 주력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과학기술적 프레임을 세대별/나이별로 홍보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예컨대 “유치원생에게는 그림책·퍼즐처럼 친근한 수단으로 원전에 접근하게 하고 초등학생은 원전탐험대 같은 현장체험학습 확대, 중고등학생은 원자력이슈 관련 토론대회 개최, 대학생은 한수원 주관 해외원전탐방 프로그램 등을 실시하면 호응을 얻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2013년 한수원의 ‘원전소통종합계획’ 문건에 따르면 “탈핵단체들의 조직적 행동에 대응할 수 있는 체계적 대응이 필요하다. TV, 온라인, SNS를 중심으로 원자력의 현실적 필요성 및 불가피성을 지지하는 우호적 정보노출을 강화하고 논쟁보다는 감성에 호소한다”는 전략이 나와 있다. 그러나 프로그램 협찬만으로는 원전 반대 여론을 막아낼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며 기존 전략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자 반핵진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고민의 결과물로 해당 보고서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로서 한수원의 대안은 반핵/탈핵을 공약으로 내건 대선후보의 낙선운동이 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