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부검의 필요성이 없다"는 이유로 고 백남기 농민에 대한 부검 영장을 기각했다.

서울종로경찰서는 26일 오전 9시20분경에 서울중앙지법으로부터 "부검의 필요성과 상당성이 없다"는 기각 사유가 적시된 문서를 팩스로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 백남기 농민의 시신이 장례식장에 안치된 후에도 부검을 위한 경찰의 진입시도는 계속됐고 시민들이 막아섰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서울중앙지법은 26일 새벽 1시40분 경, 검찰이 청구한 백씨의 진료 기록 및 시신부검에 대한 압수수색검증 영장에 대해 일부기각 처리했다. 법원은 검찰에 백씨의 진료기록 압수만 허가했다.

서울종로경찰서는 지난 25일 늦은 밤 백씨의 정확한 사인 규명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영장을 신청했고 검찰은 이를 받아들여 법원에 청구했다.

법원의 부검영장 기각에 대해 백남기대책위(생명과 평화의 일꾼 백남기 농민의 쾌유와 국가폭력 규탄 범국민대책위원회)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은 '상식적 결정'이라고 환영했다. 이들은 검·경의 부검 시도가 의학적·법리적으로 근거가 없으며 사망원인 제공자인 경찰의 책임을 물타기 하기 위한 시도라고 비판해온 바 있다.

▲ ⓒ민중의소리

백씨 유족 요청에 따라 사고 당시부터 백씨의 상태를 확인해 온 의학 전문가들은 백씨의 사인이 '외인사'임은 의심할 근거가 없다고 밝혀왔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에 소속된 전문의 3인은 지난 25일 의견서를 내 "본 환자의 발병 원인은 경찰 살수차의 수압, 수력으로 가해진 외상으로 인한 외상성 뇌출혈과 외상성 두개골절 때문이며 당시의 상태는 당일 촬영한 CT 영상과 수술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서 "발병원인이 명백한 환자에게 부검을 운운하는 것은 발병원인을 환자의 기저질환으로 몰아가려는 저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상식적인 의심을 하게 된다"고 밝힌 바 있다.

의학 전문가들은 서울대 병원 의료진이 백씨의 사망원인을 '급성심부전에 의한 심폐정지'라는 병사로 처리한 데 대해서도 강도높게 비판했다.

위의 의견서를 쓴 김경일 신경외과 전문의는 지난 25일 백씨 검시검안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처음에 다쳐서 서울대학교 병원에 올 때 굉장히 심한 뇌 손상이 있었다. 사인은 뇌 좌상, 뇌 부종 등 뇌와 관련된 여러 가지 질병명을 붙일 수 있는 외인사인게 분명하다"면서 "너무나 명백한 사망의 원인을 보고도 외인사냐 병사냐 하는 것은 신경외과 의사로서 고민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고 말했다.

백씨 검안 과정에 동석한 우석균 보건의료단체 정책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원 사망원인은 (사망의견서) 맨 아래 칸에 쓰여있는 선행원인으로 보도하는 것이 맞다. 서울대 병원에서도 (백씨 사망 선행원인을) '급성 격막하 출혈(외상성 뇌출혈)'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외상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라면서 "서울대병원에서 그렇게 한 것(병사로 처리한 것)을 동문으로써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 서울대 병원 의료진이 기재한 백씨의 사망진단서 중 일부.

우 정책위원장은 검시에 참여한 법의관도 "뇌 외상이 사망원인이라는 것을 배제하기 힘들다 혹은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사인이 명백하기 때문에 부검의 필요성에 대한 법적 다툼의 여지도 없다는 지적이 있다. 백씨 유족의 민·형사 고소고발 사건을 지원하고 있는 이정일 변호사는 △백씨가 물대포 직사살수에 의해 쓰러진 점 △검시에 참여한 법의관이 물대포 살수행위가 사인에 영향을 줬다고 인정한 점 △외상성 뇌출혈이 사인이라는 점에 의학적 견해 대립이 없는 점 등을 근거로 "법률적 양심을 걸고 판단하건데 사인이 명백하기 때문에 부검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이같은 상황에서 검·경이 부검의 필요성을 주장한데 대해 '사망원인을 왜곡하려는 의도'라며 의혹을 제기했다.

백남기대책위는 지난 24일 성명을 내 "검찰은 가족과 대책위의 고발을 접수하고도 10개월이 넘은 지금까지 진압 경찰에 대한 수사는 제대로 하지도 않고 질질 끌어왔으면서 백남기 농민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득달같이 부검을 하겠다" 했다며 "2005년에도 정부와 경찰은 결정적인 증거가 나올때까지 뻔뻔하게도 두 농민의 사인이 경찰의 직접적인 폭력이 아닌 평소에 앓던 지병때문이라고 주장했었다"고 지적했다. 2005년엔 전용철, 홍덕표 농민이 경찰의 집회 진압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후 목숨을 잃었다.

이정렬 전 판사는 지난 25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문제는 이 사건에서 피의자는 바로 경찰이라는 점이다. (시신) 검증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인 검사, 피의자, 변호인 중 피의자는 경찰이고 변호인은 피의자(경찰)의 변호인으로서 당연히 경찰편일 것"이라며 "즉 부검 실시할 경우 피해자인 백씨나 그 유족의 이익을 대변할 사람은 참여할 방법이 없다. 부검결과가 진실규명보다는 사실은폐 쪽에 가까울 것으로 보는게 상식적"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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