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부의 친권을 박탈하고 국가는 피해자에 관한 모든 법적·사회적 권한 및 양육권을 환수하고 피해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 무사히 성장할 수 있도록 가해자와 분리해 보호한다. 어린 자녀를 성폭행한 죄 형량은 40년이나 죄질이 심하게 나쁘므로 80년을 언도하고 동생이 진술하지 않았더라도 피해자의 진술에서 사실관계를 유추할 수 있으므로 총 120년을 언도한다.

이것이 현실의 법과 최대한 타협해 내가 내리는 최소한의 형벌이다."

명아씨(가명)는 청계광장에 앉아 있는 관객 앞에 서서 자신의 친부에게 120년을 선고했다. 친부는 명아씨가 8살, 동생이 6살일 때 그들을 가해했다. 준비한 원고를 읽는 5분 여 동안 명아씨의 목은 수차례 잠겼다. 끝까지 원고를 읽어 낸 그는 낭송을 마치기 전 "주변의 모두를 돌아봐주세요. 모두가 폭력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가해자를 똑바로 노려봐주세요"라고 말했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 여성들이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자신들의 피해 경험을 드러내며 성폭력 문제에 대한 해결 노력을 촉구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지난 21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낭독자와 관객이 함께 하는 공개 집담회 '2016 길거리괴롭힘·성폭력·성희롱 말하기대회'를 열었다.

9월22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주관한 '2016 길거리괴롭힘·성폭력·성희롱 말하기대회'가 열렸다. 사진=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두 시간여 동안 피해 '생존자' 여성 6명의 낭독과 토론자들의 지지발언이 이어지는 한편, 관객들은 '카카오톡 오픈채팅'을 통해 자신의 피해 경험을 고백하고 낭독자들에게 응원 메시지를 보냈다.

"오토바이를 타는 남자가 엉덩이를 '주무르고' 갔다. 깜짝 놀란 동시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수치스러워 눈물까지 쏟아졌다. 이후로 오토바이 소리만 들어도 극도로 예민해진다."(말하기 대회 중 필명 진상퇴치씨의 발언)

"지하철 2호선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는 환승통로에서 어떤 남자가 손으로 길을 막으며 나를 멈춰 세웠다. 그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날 노려봤다. '네?' 하고 되물으니 그는 입모양으로 XX(욕설)이라고 하고 돌아갔다."(필명 보영씨의 발언)

"내 레즈비언 친구 커플은 깡통을 맞았다."(관객 오픈채팅 중 필명 cha씨의 말)

1부는 '길거리괴롭힘' 말하기대회로 시작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여성이나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공공장소에서 낯선 사람에 의해 겪는 물리적·언어적·성적 괴롭힘을 '길거리괴롭힘'이라 규정하고 이를 공론화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길거리괴롭힘을 '사소한 문제'로 치부하는 시선에 대해 낭독자 진상퇴치씨(필명)는 "더 한 짓을 당해야만 사람들에게 위로받을 수 있느냐"며 "'그깟 엉덩이 만진 게' 별거 아닐지 몰라도 나에겐 큰 폭력이었고 지금까지도 긴장한다"고 비판했다.

길거리 성추행을 당했던 안성댁(필명)씨는 여성의 신체를 가지고 태어났을 뿐인데 왜 잠재적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야 하느냐고 토로했다. 그는 "내가 시켜서 나온 엉덩이도 아니고 시켜서 튀어나온 가슴도 아닌데 왜 내 몸에 유난히 튀어나온 부분들을 지키려고 긴장해야 하느냐"면서 "내 몸은 내가 가지고 태어난 것일 뿐인데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살아갈 순 없는 건 왜일까"라 물었다.

길거리 성범죄를 '재밌는 놀이'처럼 소비하는 문화의 문제도 지적됐다. 엉덩이나 가슴을 만지고 도망가는 길거리 성범죄를 '엉튀(엉덩이를 만지고 튄다는 속어)', '슴만튀(가슴을 만지고 튄다는 속어)'라 희화화하거나 자신의 성기를 노출해 위협을 가하는 성범죄자를 '바바리맨'이라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토론에 참여한 이진송씨는 "예전에 가해자 뒤에 대고 욕을 했더니 유유히 손을 흔들며 갔다. 욕설 같은 소극적 저항을 즐길 정도로 그게 그 사람의 일상이 된 것"이라면서 "용인하면 안 되는데 용인을 하니 과감해지고 용감해지고 있는 것"이라 지적했다.

▲ '2016 길거리괴롭힘·성폭력·성희롱 말하기 대회' 포스터

관객이 참여하는 오픈채팅방은 2부에 접어들수록 뜨거워졌다. 2부에서는 친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생존자' 두 명과 길거리 성추행을 당한 '생존자' 한 명의 경험 낭독이 진행됐다.

이들 모두 '주변에 대한 관심'과 '피해자에 대한 적극적 지지'를 강조했다.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당장 드러내기 힘든 상황에서 '별 일 아니'라는 주변 사람의 반응이 그들을 더 고립시킨다는 말이다.

명아씨는 "(친부의 성폭행에 대해) 고모는 '나도 그런 적 있다. 아버지가 사랑해서 그런 거야'라고, 한 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아빠라 그냥 부비부비한 거네'라고 말했다. 온통 이런 자들뿐이었기에 사건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걸린 시간이 30년이었다"면서 "친구든 배우자든 동네사람이나 어린이 주변의 모두를 돌아봐 달라. 모두가 폭력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가해자를 똑바로 노려봐 달라"고 호소했다.

피해 당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고 한 목소리로 말했던 낭송에 대해 관객들은 '길거리 성폭력 대처 매뉴얼'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관객 '디디'씨는 채팅방을 통해 "이렇게 길거리 성폭행이 흔하고 비슷한 패턴으로 이뤄지는데 왜 어떻게 해야하는 지를 안알려주냐"고 비판했다. '고용'씨는 "길거리 성폭력 대처 매뉴얼과 함께 '성폭력 하지 말라'는 교육을 제대로 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민 60여 명이 관객석을 채운 가운데 남성 관객의 비중은 약 30%였다. 대학생 김아무개씨(26)는 "남자들끼리 모이면 항상 있는 일이 있다. 마침 오늘 예비군 훈련을 다녀왔는데 여군 소대장이 지나갈 때마다 외모, 품평 얘기를 하더라"면서 "여성들은 성폭력 문제를 명확히 알고 있지만 남성들은 피해를 일으키는 주체면서 이해를 잘 못한다. 눈에 드러나지 않는 차별을 더 보려고 노력하기 위해 자리에 참석했다"고 밝혔다.

행사를 총괄한 방이슬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행사 취지에 대해 "말하기 대회는 여성, 소수자가 길거리 괴롭힘을 반대하는 적극적 당사자로서 말을 하는 장"이라면서 "공공장소에서 피해 받은 폭력 경험을 공공장소인 광장에서 얘기하면서 알리는 의미, 함께 참여한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으면서 공공장소의 경험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