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가족이 한 밥상에 모이는 추석 연휴는 정치인, 특히 대선주자에게는 추진력을 얻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시간이다. 이번 추석연휴에서 가장 화제의 중심에 선 대선 주자는 반기문 UN(유엔) 사무총장이었다. 반 총장의 등판은 그가 단순히 지지율 1위라는 점이 아니라, 야당이 짜려했던 ‘경제 선거’라는 판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대선 국면에서 큰 파급력을 지닌다.

“핵무장은 안 돼” 새누리당과 차별성 부각하는 반기문

반 총장은 14일(현지시각) 뉴욕유엔 사무국에서 정세균 국회의장과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반 총장은 “금년 말 임기 마치면 1월1일 귀국하겠다”며 ”대통령, 대법원장, 국회의장, 3당 원내대표들께 인사를 가겠다”고 밝혔다. 실체가 모호한 ‘반기문 대망론’에서 한 걸음 나아가는 행보를 보인 것이다.

새누리당은 연휴가 끝나자마자 반기문 띄우기에 나섰다. 정진석 원내대표는 19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반 총장의) 소중한 경험과 지혜를 미래세대를 위해 써달라 인사드렸다. 성공적으로 금의환향하기를 기대하겠다”고 말했다. 조원진 최고위원은 같은 자리에서 “반기문 총장이 오셔서 국내정치에 대한 부분들도 관심을 가지고 보셨으면 하는 생각이 있다”고 밝혔다.

▲ 현지시각 9월14일 뉴욕UN사무국에서 만난 반기문 UN사무총장(가운데)과 정세균 국회의장 및 3당 원내대표들. 왼쪽부터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정세균 국회의장, 반기문 사무총장,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 사진=국회의장실 제공

반기문 총장이 새누리당 대선후보로 나설 경우 가장 큰 강점을 가질 수 있는 분야는 북핵문제 및 남북관계다. 북한이 5차 핵실험을 하고, 사드 문제로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있는 상황에서 국제기구 수장으로 10년 간 복무한 반 총장의 경험은 장점으로 부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 총장은 최근 들어 내년 대선 의제로 제기될 북핵 문제와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반 총장은 13일(현지시각) AP와 인터뷰에서 “기회가 된다면, 시민의 일원으로서 북한과의 화해 증진을 돕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고 싶다”고 말했다.  

더 주목할 점은 북핵문제와 남북관계에 대한 반 총장의 입장이 새누리당의 입장과 차별성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현재 새누리당 의원들은 북한 핵실험에 맞선 ‘핵무장론’을 공론화하고 있다. 핵무장이 어렵다면 전술핵배치도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도부에서 나온다.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영우 새누리당 의원은 19일 ‘한반도 정세, 이대로 좋은가? 핵무장 논쟁을 중심으로’라는 토론회를 열어 핵무장에 대한 찬반논쟁을 공론화했다.

반 총장은 새누리당의 핵무장론은 대안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반 총장은 3당 원내대표와 정세균 국회의장을 만난 자리에서 정치권에서 제기되는 핵무장론에 대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일축했다. “북에 대한 제재는 대화가 전제돼야 한다. 대화를 위해서 제재가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반 총장을 만난 우상호 더민주 원내대표는 19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여전히 핵무장론을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이번 미국방문을 통해서 핵무장론은 가능하지도 않고 국제사회 규범에 어긋난다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왔다”고 말했다. 우 원내대표는 “반기문 사무총장은 핵무장론을 이야기하니 이는 유엔의 규범을 일탈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유엔 제재대상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반 총장이 대선 국면에서도 이런 입장을 고수한다면 자연스럽게 핵무장론을 주장하는 새누리당보다 합리적인 위치에 설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반 총장의 과제는 ‘무능한 사무총장론’을 돌파하는 것이다. 서구 언론을 중심으로 반 총장이 인권문제 등 국제적인 현안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거세기 때문이다. 반 총장이 대선 국면에서 남북관계와 북핵의 해결사를 자처한다면 검증 과정에서 이런 ‘무능론’이 등장할 것이다. 반 총장은 AP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내가 조용했고, 인권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데 나는 너무 몸조심하는 서구의 그 어떤 정치 지도자들보다도 더 목소리를 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모병제와 수도이전, 진보 의제 잠식하는 새누리

반 총장이 대선 국면에서 선점할 수 있는 또 다른 의제는 ‘성소수자’ 이슈다. 반 총장은 유엔의 각종 회의나 행사, 기념식 등에서 성소수자 문제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다. 반 총장은 지난해 9월29일 뉴욕에서 열린 성 소수자 인권 행사에서 “성 소수자의 인권이 학대당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인권이 깎이는 것이다. 내가 이끄는 유엔은 차별과의 싸움에서 절대 작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 총장은 2013년 4월15일 오슬로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전달한 비디오 메시지를 통해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근거한 폭력과 차별은 우리 시대의 큰 도전이자 방임된 인권적 도전 중 하나다.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여러분에 대한 공격을 비판할 것을 약속한다”고 말했다. 그 약속은 ‘차별금지법’에 대한 권고로 이어졌다. 유엔 산하 기관들은 여러 차례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을 차별금지 사유로 명시한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한국 정부에 권고했다.

이런 이유로 보수진영 일각에서는 반 총장의 이런 입장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다. 이혜훈 새누리당 의원은 5월31일 차별금지법 반대 포럼에서 “유엔은 대한민국 정부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수차례 권고했다. 2011년, 2012년, 2013년, 2015년. 이 기간 유엔 사무총장이 누군지 잘 알 것이다”라며 “사무총장이 제일 이 일을 압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5월30일 오후 경북 경주시 신경주역에서 기차를 타기 위해 플랫폼으로 이동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뒤집어 말하면 반 총장이 성소수자 문제 관련해 기존의 입장만 유지해도 기존의 보수 층, 새누리당과 차별성 있는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현재 반 총장은 ‘친박’ 후보로 분류되지만, 반 총장이 선점할 수 있는 의제를 기준으로 보면 기존 새누리당 지지층보다 더 확장성을 지닌 대선후보인 셈이다.

이런 이유로 반 총장이 대선 경선과정에서도 새누리당과 거리두기 하는 행보를 보일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유시민 작가는 15일 JTBC ‘썰전’에서 “내 생각에 반 총장은 새누리당 경선에 절대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유 작가는 “새누리당은 새누리당대로 후보를 뽑고, 반기문 총장은 무소속으로 대선 출마 의지를 표명할 것이다. 그러면 여론조사에서 반기문 총장 지지율이 더 높을 것이고, 대선 임박한 시점이 오면 보수 후보 단일화 이야기가 나오면서, 그때에 (반 총장이) ‘내가 단일후보가 되면 입당하겠다’ 하면서, 경선 없이 철커덕 들어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직 불투명한 ‘반기문 대세론’ 속에서 새누리당의 약소 후보들은 출마선언은 하지 않은 채 계속 이름이 오르내리는 방법으로 의제 선점을 선택했다.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내세운 ‘모병제’가 대표적이다. 남 지사는 행정수도 이전에 이어 모병제를 대선공약으로 내걸며 급을 키우고 있다.

행정수도 이전은 노무현 대통령의 공약이었고 모병제는 김두관 의원이 2012년 대선 후보로 출마했을 때 내건 공약이다. 남 지사는 여기에 더해 공유적 시장경제까지 내세웠다. 공유적 시장경제가 구체화된 것이 경기도에서 시행 중인 ‘행복카셰어’ 사업이다. 행복카셰어는 주말과 공휴일에 쉬는 관용차량을 저소득층이나 소외계층에 무상으로 빌려주는 사업으로, 남 지사는 이런 여러 이슈 선점을 통해 진보의 의제를 잠식해가고 있다.

모병제에 반대하며 남경필 지사와 대립 각을 세운 유승민 의원도 ‘여당 내 야당’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유 의원은 지난 7일 한림대 특강에서 야당이 주장하는 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에 대해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밝혔다. 유 의원은 또한 교육문제에 대해 “제2의 고교평준화를 생각해야 한다. 자사고와 일부를 제외한 외고 중심 특목고는 폐지해야 한다”며 보수정당의 교육정책과는 다른 목소리를 냈다.

▲ 5월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20대 국회, 협치 가능한가' 토론회에 참석한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인사말을 위해 단상으로 향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경제심판’하겠다는 더민주, 경제 후보는 누가 될까

이에 맞서는 야당의 대응책은 ‘경제심판’이다. 더민주는 총선에서 김종인 대표를 앞세우며 ‘문제는 경제다’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대선 때까지 더민주는 박근혜 정부의 경제실패를 심판하고 경제적 불평등과 불공정성을 해소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일 것으로 보인다.

우상호 원내대표가 19일 기자간담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정기국회를 국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민생국회로 규정했다”라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 원내대표는 “보수정권 9년 사이에 경제가 얼마나 파탄났는가에 대해서 점검하는 일을 먼저 선행하고, 그에 따라서 우리의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수권정당의 면모를 국민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추미애 대표도 6일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민생경제’를 강조했다.

문제는 야권에 경제를 이야기할 대선 후보가 있느냐는 것이다. 성한용 한겨레 선임기자는 14일 기사에서 “역대 대통령은 모두 그 나름의 스토리가 있었다. 지금 후보들은 스토리가 너무 약하다”고 지적했다. 스토리란 삶을 통해 보여준 메시지다. 이 스토리는 정책, 구호와 결합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이야기한 이유는 그의 삶에 민주주의가 배어있기 때문이고, 이명박 대통령의 ‘경제성장’ 구호가 먹혔던 이유는 그의 삶에 경제성장의 스토리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야당이 다음 대선을 경제선거로 치른다면, 이런 경제선거를 감당할 만한 야권의 후보는 누구일지가 핵심이다. 이런 이유인지 야권의 지지율1위 대선주자인 문재인 전 대표는 지난 대선 때부터 공정경제, 소득주도 성장론 등을 제시해왔다.

더민주의 한 관계자는 “문재인 대표의 장점은 확고한 지지층이다. 조금 우경화하더라도 이해해줄 정도의 확고한 지지층이 있다”며 “다만 경제선거라는 판에서 문재인 후보가 채워야할 부분은 남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김대중에겐 민주주의의 궤적이, 노무현에게는 민주주의 이후 여전히 권위적인 문화를 벗어나려고 했던 삶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게 시대의 요구와 맞아떨어진 것”이라며 “지금의 시대적 요구가 공정한 경제라고 하고 문재인에게 경제와 관련해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있냐고 물으면 아직 부족하다. 공정경제를 이야기하지만 자신만의 브랜드로 만들지는 못한 느낌”이라고 전했다.

▲ 문재인 전 대표(왼쪽)와 박원순 서울시장. ⓒ포커스뉴스

다른 야권 후보들도 경제적 불평등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대선의 쟁점이 되리란 것을 알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6일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한 식당에서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 컬럼비아대 교수를 만난 자리에서 “내년 대선에서 1:99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 시장은 무상급식을 반대하다 사퇴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후임이라는 점을 비롯해 서울시립대 반값등록금 등의 복지 정책을 자신의 성과로 가지고 있다.

박 시장은 동시에 청년수당을 두고 정부와 각을 세우고 있다. 경제 이슈를 두고 정부와 대립각을 세운다는 점은 야권 후보로서 강점이다. 이재명 성남시장도 비슷하다. 청년배당을 두고 정부와 대립하고 있다. 물론 박 시장과 이 시장을 포함한 야권 후보 누구도 문재인 전 대표 같은 확고한 지지층을 갖고 있진 못하다.
 
시작된 야권의 룰 경쟁, 의제 경쟁은?

결국 더민주의 대선 후보 경선, 나아가 야권의 대선 후보 경선 역시 누가 경제선거 혹은 다른 의제로 새누리당을 누를 수 있느냐가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야권을 뒤덮고 있는 것은 ‘룰 경쟁’이다. 더민주 후보들은 ‘문재인 대세론’이 굳어지는 가운데 의제 경쟁이 아니라 후보를 언제 선출할지, 어떻게 선출할지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국민의당은 ‘제3지대’론을 이야기한다. 안철수 의원은 13일 SBS CNBC 제정임의 문답쇼 ‘힘’에 출연해 “김부겸 의원이라든지 유승민 의원, 박원순 시장, 안희정 지사라든지 이런 분들이 다 힘을 합쳐야(한다)”고 말했다. 주승용 비상대책위원장 직무대행은 19일 비대위 회의에서 “여야의 경계를 넘어서 ‘합리적 개혁세력’을 결집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야권이 룰을 두고 머리를 굴리는 사이, 여권은 판을 바꾸기 위한 의제선점을 시작했다. 

▲ 안철수 국민의당 전 상임공동대표, 주승용 비상대책위원장 직무대행 등 의원들이 추석 연휴를 하루 앞둔 13일 오전 서울 용산역을 찾아 귀성 인사를 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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