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이 당명 개정을 위해 당명 공모 절차에 돌입한 가운데 이번 당명 개정이 반쪽짜리 쇄신에 그치지 않을지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당 정체성 강화를 취지로 시작됐으나 추진 과정에서 충분한 논의가 실종됐다는 지적이다.

정의당은 지난 12일부터 오는 22일까지 10일 간 온라인 게시판을 통해 새 당명을 추천받고 있다. 이중 추천 득표수를 기준으로 당명 5개를 골라 오는 25일 열리는 임시 당대회에서 투표를 통해 최종작을 선정할 예정이다. 현재 사회민주당, 평등사회당, (다시)정의당, 민주사회당, 사회민주노동당 등이 순서대로 순위권에 올라와 있다.

▲ 정의당 당명 제안·추천 게시판 캡쳐

‘메갈리아 사태’로 인한 명예 실추를 무마하기 위한 시도 아니냐는 비판이 일각에서 제기됐으나 당명 개정은 6개월 여 전부터 정해져 있던 당내 과제였다. 지난해 11월 정의당은 국민모임·노동정치연대·진보결집더하기 등의 진보세력과 통합하는 과정에서 총선 후 6개월 내 당원총투표로 당명을 개정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노동정치연대(현재 해산) 등 통합을 추진하던 일부 세력이 ‘노동 중심의 대중적 진보정당’ 정체성 확립을 주장한데 따른 것이었다.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당 관계자들은 지난 6개월 간 정강, 강령 등 당 정체성 확립을 위한 논의가 지진부진했다고 지적했다. 당명은 정당이 지향하는 이념, 가치 등을 상징함에도 충분한 토론을 거치지 못하고 당명 제안부터 진행됐다는 것이다.

당직자 A씨는 “다른 세력과 통합을 거치며 당의 체질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다. 당명 개정은 이런 시도와 강령 개정 등과 함께 패키지로, 공세적으로 진행돼야 한다”면서 “지지율도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정당 정체성이 없다는 문제제기가 지속적으로 있는 등 당의 존재감이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당명개정으로 능동적으로 대응할 기회일 수도 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정의당은 진보정당으로서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지적을 수차례 받아왔다. 지난 6월 최장집 교수는 정의당 의원단 워크숍에 강연자로 참석해 “정의당이 왜소화됐다면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정체성의 상실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정의당은 누구를 대표하고, 누구를 위한 정당인가. 당의 아이덴티티는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이 불분명하다”고 비판했다.

▲ 정의당 P.I

메갈리아 사태와 관련해서도 지도부가 당의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의당 문화예술위원회는 메갈리아에서 제작한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SNS에 올려 고용 계약이 취소된 성우 김자연씨 사건에 대해 ‘정치적 의견이 직업 활동을 가로막는 이유가 돼선 안된다’는 제목의 논평을 게재했고 이에 ‘메갈리아’에 거부감을 가진 당원들이 탈당을 하는 등 거센 반발 사태가 이어졌다. ‘당 안팎에 논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논평을 철회하고 문예위를 사고위원회로 처리할 방침을 세웠던 상무위원회는 원칙을 잃고 대중성에 천착했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당명 개정이 적극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개정에 찬성하지 않는 여론이 상당하다는 지적이 있다. 진보세력 통합 이후 입당한 당원들 중 당명 개정 합의를 모르는 당원이 많고 ‘굳이 바꿔야 하느냐’고 반발하는 기존 당원들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당 활동가를 역임했던 B씨는 “정의당 이전부터 진보정당 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개정을 원하지만 (진보세력) 통합 이후 입당한 당원은 개정을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정의당’이라는 존재감이 점점 자리잡아간다고 생각하는 당원도 많다.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이 가치관, 노선 논쟁 때문에 실패했다는 생각도 당내에 있다”고 말했다.

지도부의 소극성과 심도 깊은 논의를 할 여유가 없었던 환경도 원인으로 꼽힌다. ‘평등사회당’을 제안한 권태훈 서초구지역위원장은 “정의당 내부에서 진보 세력 통합 당시 했던 (당명개정) 약속을 가볍게 보는 기류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당시 노동정치연대의 이병렬 전부대표는 “통합 후 바로 총선이었다. 안철수 신당 등의 여파로 총선 결과가 목표에 한참 못 미친 상황에서 선거평가나 내부 정리를 하다 보니 (당 정체성 논의를 하기에) 6개월은 짧더라”면서 “7월엔 메갈리아 논쟁 때문에 집중을 못하는 등 심도 깊은 논의를 하기에 여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 2015년 9월2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진보혁신과 결집을 위한 연석회의 합동 기자회견에서 각 단체 대표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세균 국민모임 대표, 양경규 노동정치연대 대표, 심상정 정의당 대표, 나경채 진보결집 더하기 대표. ⓒ민중의 소리

당 정체성 논의의 필요성에 동의하는 당원들은 “정의당이 진보정당으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며 강령개정검토위원회 등 이후 개정 과정에서 논의를 이끌어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권태훈 위원장은 “정의당이 진보적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오는 대선과 지방자치 선거에서 민주당 중심의 ‘빅텐트’ 압박을 거부할 정치적 힘을 가지기 어려울 수 있다”면서 “당직자선거, 강령개정 논의, 대선 준비 일정이 준비돼있다. 진보정당으로서 정의당이 정체성을 확립해나갈 수 있는 일정으로 지속적으로 논의를 이끌어 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한창민 대변인은 “당원들 다수가 정의당 명을 유지하는 안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당명개정위원회도 당원 의사를 소중히 해야 한다는 생각에 찬반 총투표로 당명을 결정하려 한다”면서 “‘반쪽짜리 통합’이라는 의견은 예전 통합 과정에서 들어온 당원들이 제기하기도 하고 일부 의견이기도 하다. 상무위원회, 대표단, 당명 개정위원회 등 다양한 검토 절차를 통해서 의견 수렴을 지속적으로 해왔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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