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다수 언론이 유엔인권보고서가 삼성전자의 ‘백혈병 문제’ 해결 노력을 인정했다고 보도하자 보고서 작성자인 유엔 특별 보고관이 ‘잘못된 보도’라며 반박하고 나섰다.

바스쿠트 툰작 유해화학물질과 폐기물에 관한 유엔 특별보고관은 15일 오후(현지시각) 스위스 제네바 유엔본부에서 열린 33차 유엔인권이사회 ‘유해화학물질과 폐기물에 관한 유엔 특별보고관 보고서’ 발표 자리에서 한국 언론의 오보를 지적했다.

▲ 바스쿤트 툰작 유엔특별보고관이 지난 9월15일 오후 스위스 제네바 유엔본부 제 33차 유엔인권이사회에 참석해 유해화학물질과 폐기물에 관한 유엔 특별보고관 보고서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UN WEB TV 캡쳐

특별보고관은 발표 도중 “지난 주 한국 언론들이 잘못 전달한 내용이 있어 이 기회에 특별히 한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I would like to take this opportunity to emphasize one point in particular because it has been misrepresented in the Korean media the past week)”면서 “삼성전자나 대한민국 정부 어느 쪽도 노동환경이 안전함을 입증하지 못했다(Neither Samsung Electronics nor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demonstrated that working conditions were safe)”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삼성전자와 정부는 최근 삼성전자가 보상한 120여 명의 피해자들이 노동 환경 때문에 죽거나 병든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지 않았다(They did not demonstrate that working conditions did not kill or injure over 120 victims that Samsung Electronics compensated recently)”고 덧붙였다.

지난 12일 30여 개 언론사는 유엔인권보고서가 삼성전자 직업병 문제 해결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제목의 기사를 일제히 쏟아냈다.

▲ 지난 9월12일 유엔 인권보고서 관련 기사가 30건 이상 쏟아졌다. 사진=임자운 변호사 페이스북

해당 보도들은 보고서에 실린 “퇴직자들에게 적절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그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삼성이 취한 내부적 변화와 노력을 인정한다”, “삼성의 협력과 개방성, 지속적인 대화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삼성전자가 예방과 개선 방안을 권고하는 옴부즈만 위원회 설립을 위해 다른 협상 참여자와 합의한 점을 환영한다” 등의 평가를 인용했다.

확인 결과 인용된 부분은 전체 보고서 가운데 미미한 비중을 차지했다.

보도가 인용한 “삼성전자가 예방과 개선 방안을 권고하는 옴부즈만 위원회 설립을 위해 다른 협상 참여자와 합의한 점을 환영한다(The Special Rapporteur welcomes the establishment of the Ombudsman Committee, and looks forward to its implementation with both transparency and meaningful public participation by all stakeholders)”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직업병 문제를 다룬 챕터의 30개 항 중 1개 항에서 발견됐다.

특별보고관은 5개 항 이상에 걸쳐 삼성전자를 비판했다. 제56항은 피해자가 사용한 화학물질을 영업비밀 정보라고 주장하며 비공개하는 삼성전자에 대해 “국제법, 국제 정책 체제와 국내법에 따라 유해물질의 안전보건에 대한 정보 비밀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57항에는 “특별보고관은 기업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독성화학물질에 대한 정보 생산을 보류하거나 이런 정보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는 비판이 실렸다.

▲ 2010년 4월 2일 삼성본관 앞에서 삼성전자에서 일하다 사망한 박지연씨를 추모하는 모습. ⓒ이치열 기자
특별보고관은 71항에서 “노동자들이 독성화학물질의 영향에 대한 효과적인 구제를 받을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인과 관계를 충분히 증명하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지적하며 75항에서 “특별보고관은 청구인에게 부과된 과도한 입증 책임 때문에 보상을 받기 어려워지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보고서가 삼성전자가 취한 내부적 변화를 인정한다거나 삼성의 협력과 개방성을 높이 평가한다는 근거는 삼성전자에 대한 특별보고관의 권고사항 및 결론을 적은 109항 문단 첫머리에서 발견된다. 문맥상 이는 조사에 협조해 준 삼성전자에 대해 특별보고관이 감사를 표하는 의미로 읽힐 수 있고 국제기구 조사관이 의례적으로 적는 감사 문구로 볼 여지가 있다.

109항의 권고 사항 중 “제품 생산과정에서 독성 화학물질에 피해를 입은 전직 노동자와 하청노동자들 모두가 조정위원회가 권고하는 최소한도를 기준으로 확실히 보상을 받도록 하라”는 조항은 독단적으로 보상위원회를 꾸린 바 있는 삼성전자를 비판하는 권고안이기도 하다.

▲ 보고서 23쪽에 실린 109번 조항. 삼성전자와 관련 기업에 대한 유엔특별보고관의 권고사항이 실려 있다.

특별보고관은 발표를 통해 “이윤을 얻는 기업들은 독성에 관련된 정보를 이용할 수 있고 통제할 수도 있으며 그런 정보가 없으면 만들어 낼 힘도 가지고 있다”면서 “이런 기업들에게 화학물질의 무해성을 증명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그 화학물질의 피해자들이 자기 질병의 원인을 증명해야만 하는 부당한 입증책임의 문제는 전 세계에 존재한다”고 우려했다. 산업재해 사실 입증 책임이 피해자에게만 전가되는 현재 구조에 대한 비판이자 기업에게도 ‘무해성 입증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제안이다.

바스쿤트 쿤작 보고관은 유해화학물질 및 폐기물 관리와 관련된 인권 보호와 이를 지원하는 국가의 조치를 평가하기 위해 지난해 10월12일부터 23일까지 한국을 방문했다. 총 24쪽으로 이뤄진 보고서는 제품 내 유해물질로부터의 소비자 보호, 전자제품 제조업 노동자 보호, 아동 보호, 유해한 환경과 인접한 지역사회 보호 등의 의제를 다루고 있다. 이번 ‘유해물질 및 폐기물 처리 관련 인권 특별 보고관의 방한 보고서’는 지난 15일 제 33차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채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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