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밀정’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일본경찰이 돼 경부(현 경정)까지 올라갔다면 누구나 민족반역자라고 부를 법하다. 하지만 황옥(1887~?) 경부는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에 가입하고, 독립운동가 김원봉·김시현 등과 ‘동지’라고 부르며 지냈다. 황옥은 현재까지 그가 친일파인지, 독립운동가인지 논란이 되고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스파이는 꽤 흥미있는 소재다. 영화 ‘밀정’(감독 김지운)은 황옥이 1923년 의열단장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36개와 권총 5정을 받아 신의주를 거쳐 경성(서울)까지 운반하다 일제경찰에 붙잡힌 일명 ‘황옥경부폭탄사건’을 모티브로 구성했다. 영화에서는 이정출(송강호 분)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 영화 '밀정'의 한장면

영화에서 이정출은 일제경찰 승진경쟁에서 위기를 겪고, 독립운동가를 잡는 과정에서 친일에 대한 죄책감을 갖는다. 물론 배우 송강호가 맡았기 때문에 이런 무거운 상황은 코믹하게 넘어간다. 김지운 감독은 독립운동가가 작정하고 일제경찰에 들어간 건 아니지만 여러 가지 상황에 엮여 독립운동에 마음을 쏟는 과정 속으로 이정출을 올려놓는다.

독립운동을 약속한 일제경찰

실제 황옥의 삶은 어땠을까? 황옥은 1919년 3·1운동 직후 평양과 해주지방에서 재판소 서기 겸 통역생으로 근무했다. 상해에서 황옥은 이규갑·이명교 등 국내 한성정부 수립 인사들의 상해 망명과 임시정부 활동을 주선했다. 일제경찰의 정탐이라는 의심을 받는 한편 황옥은 자신도 독립운동에 가담하겠다고 약속했다.

황옥은 이듬해인 1920년 3월 경기도경찰부 직속 도경부에 특채로 뽑혔고, 1923년 3월 의열단의 대규모 국내폭탄반입(영화의 모티브)에 가담할 때까지 고등경찰과 경부로 근무했다(고등경찰과는 독립운동가를 잡던 곳). 경기도경찰부는 황옥이 공산당원들과 활동하는 것을 묵인 또는 지원했다. 일제경찰에서 황옥의 역할은 조선독립운동가를 잡기 위한 밀정이었다.

그간 황옥에 대한 연구 역시 황옥에 대해 쉽게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1920년대에 있어서의 민족운동의 일양상’(1976), ‘민족운동으로서의 의열단활동’(1977) 두 논문은 황옥의 행동에 의심할 점이 있다는 입장이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반면 ‘한국독립사’(1965) 등 여러 문헌에서는 황옥을 독립운동가로 표기했다.

연구자 김창수는 ‘한국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1997)이란 논문에서 황옥을 일제의 주구(走狗)로 간주했지만 이듬해 자신의 연구 성과를 보완한 ‘의열단의 조직과 투쟁’(1998) 등에서 황옥에 대한 평가가 신중해야 하며, 훗날 자료가 보완돼야 한다고 밝혔다. ‘김시현의 항일 투쟁과 그 성격’에서는 김시현과 황옥의 고려공산당 활동도 주목한다.

황옥의 고려공산당 활동

황옥은 사상범 뒷조사를 담당하며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에 가담했다. 고려공산당은 1921년 중국 상해에서 공산주의 이념에 근거해 조직된 항일 독립운동단체로 훗날 중국공산당에 흡수됐다. 황옥은 이곳에서 간부로 선임됐고,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일제에 보고해 기밀비를 받았고 이 돈을 민족운동에 지원했다. 적의 식량으로 버티는 게릴라의 모습이다.

1921년 10월 황옥은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극동민족대회에 파견할 국내대표단 13명의 위임장을 자신의 집에서 만들도록 했다. 대표단이 모스크바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조선총독부 여행권을 발급했고, 김시현에겐 여비도 지급했다. 고려공산당으로부터 의심을 받아 배척당하기도 했지만 고려공산당원들과 함께 1923년 3월 의열단의 국내폭탄반입에 가담했다.

▲ 왼쪽이 황옥, 가운데가 김시현

잠시 황옥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김시현에 대해 짚을 필요가 있다. 독립운동연구가 정운현은 김시현에 대해 “초인에 가깝다”고 표현했다. 김시현은 일제강점기에만 6차례 총 15년간 항일투쟁하다 붙잡혀 옥살이를 했다.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고문에 못 견뎌 실언을 할까봐 혀를 깨물었다. 해방 후 국회의원 선거에서 발음이 어려워 아내 권애라가 대신 연설했다.

김시현은 황옥과 함께 ‘황옥경부폭탄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 받았고, 사건 이후에도 변함없이 황옥을 ‘동지’라고 표현했다. 해방 후 1950년 경북 안동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김시현은 1952년 6월25일 ‘6·25기념식 및 북진결의대회’에서 의열단원 유시태와 함께 이승만 암살을 시도했다.

국회의원이라 의심을 사지 않았던 김시현의 신분증과 복장을 유시태가 대신 착용한 뒤 행사장에 들어가 저격을 시도했지만 권총 세발이 모두 불발돼 실패했다. 이 일로 김시현은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가 1960년 4·19혁명 이후 풀려나 특별사면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껏 건국훈장을 받지 못하고 있다.

황옥은 김시현보다 4살 아래로 둘은 의형제를 맺었다. 김시현이 밀양진영 폭탄사건에 연루돼 체포됐을 1920년 9월 황옥이 경성으로 김시현을 호송하면서 둘은 처음 만났다. 이후 김시현은 국내로 잠입할 때 황옥 집에 머물며 의열단 폭파계획 등 독립운동 현황을 말했고, 황옥은 김시현에게 여비와 국경통과 여행증을 발급해줬다. 황옥과 김시현 형제들은 모두 의열단에 가담했다.

황옥경부폭파사건

1923년 2월11일 황옥은 김시현, 김원봉과 중국 천진에서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다. 3월3일 천진에서 김원봉에게 폭탄을 넘겨받아 국내로 폭탄반입을 주도했다. 국내 적 기관 총공격 및 대규모 암살파괴는 5월로 예정됐다. 하지만 다른 밀정의 밀고로 3월17일에 유석현, 19일에 황옥, 30일에 김시현이 각각 체포됐다.

결과적으로 황옥경부폭파사건은 실패했다. 독립운동계에서 황옥을 민족반역자로 보는 근거는 크게 세 가지다. 폭파계획이 거사 직전 발각된 것은 황옥의 배신행위 탓이라고 보는 근거이기도 하다.

▲ 영화 '밀정'의 한장면

첫 번째 근거는 황옥이 법정진술에서 친일적인 발언을 한 것이다. 황옥은 “김시현으로부터 폭탄을 넘겨받아 경찰부에 압수하려고 한 것과 경찰부에 미리 보고하지 않은 것은 상해에서 실행자들이 모두 오면 검거하기 위해서였다”며 “경찰 관리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노력했고,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면 장차 경시까지 시켜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고 말했다. 혹 본인이 고문을 견디지 못할까 혀까지 깨물어 말을 못하게 만든 김시현의 관점에서 보면 황옥의 이같은 발언은 친일행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황옥은 그렇게 단순하게 파악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황옥은 경찰과 검사국 조사와 예심에서는 의열단과 김원봉을 모두 모른다고 진술했다. 이에 박태원은 ‘약산과 의열단’에서 황옥의 이중적인 모습을 김원봉과 약속한 의열단의 비밀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봤다.

두 번째 근거는 재판과정에서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던 변호사의 발언이다. 변호사는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일부러 경관을 공산당에 가입케 해 희생적 정신을 가지고 사람을 속이며 잡으려는 것은 정치도덕상 가만히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황옥의 활동이 조선총독부의 스파이정책이라는 입장이다.

마지막으로 일제 고위경찰간부가 황옥의 밀정활동을 알고 있었다는 발언을 한 것이다. 하지만 해당 간부가 면피성 발언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황옥 사건으로 경무국장, 경찰부장, 고등경찰과장이 사표를 내는 등 일경 내부가 혼란스러웠다. 황옥이 정말 총독부가 계획한 밀정으로 활동했다면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다.

황옥, 가장 약한 처벌

황옥과 김시현은 이 사건으로 각각 10년형을 받았다. 황옥은 세 차례 감형을 받아 징역 4년2월18일로 감형받았지만 2년여 뒤 위장병이 심해져 형집행정지로 1925년 석방됐다. 황옥이 친일파였다면 이대로 풀려났을 법도 하지만 자택에서 치료받던 황옥은 1928년 재수감됐다.

김시현을 비롯한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만기출옥했다. 하지만 황옥은 1929년 형기를 8개월 앞두고 가출옥됐다. 결과적으로는 가장 형을 적게 산 건 황옥이다. 일제가 황옥을 봐줬다고 볼만한 여지도 있지만 일제의 밀정이었다고 하기엔 가혹했다.

황옥은 1929년 2월1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났고, 해방까지 행적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경성에 머물며 의열단 동지들을 만나 교류했다. 일제 밀정이었다면 이후에도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지 않았을까? 영화에서 나타난 것처럼 승진경쟁에서 밀린 것에 반항하다 일제로부터 숙청된 걸까? 왜 가출옥 이후 독립운동가들과 만나며 지냈을까?

경부는 조선인이 올라가기엔 꽤 높은 직급이다. 때문에 황옥에 대한 판단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황옥을 의열단원으로 볼 것인지 계속 검토해야 한다.

황옥의 집안에는 6명이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다. 이 중 황직연, 김희중, 김사용은 옥고를 치르다 옥사 또는 병사했다. 물론 독립운동가 가족이 반드시 독립운동을 한다는 보장은 없다. 치명적인 반례가 있다. 항일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였던 박상희의 동생 박정희는 혁명열사유족임에도 일제에 혈서를 쓰고 일본군인-군부독재를 거쳤다.

정운현 선생은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황옥이 어떤 인물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영화 ‘밀정’에서 보듯이 황옥(송강호)이 법정 진술하면서, 일제 밀정으로서 당당하게 말하는 게 아니라 동지를 뒤에 두고 뜨거운 눈물을 보인다”며 “그 장면이 한국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 영화 '밀정'의 한장면

※ 참고문헌

황용건, 항일투쟁기 황옥의 양면적 행적 연구
정운현, 항일투쟁 ‘16년 옥고’ 불구 훈장 못받은 김시현 의사
정운현, 묻혀 있는 한국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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