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되지 않으면 잘 들어주지 않는 세상이다. ‘부랑인’으로 낙인찍혀 끌려간 것으로 알려진 형제복지원, 이곳에서 살던 이들은 그 자체로 환영받기 어렵다. 그들의 말은 정제되지 않았다. 피해생존자 이향직씨(46)는 형제복지원 피해사실을 알리는 댓글을 언론사 페이스북 페이지 곳곳에 남긴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이향직 이라고 합니다. 한국판 아우슈비츠 수용소 같은 강제 수용소 형제복지원사건.
((4000명 감금,551명 때려 죽였슴))
이사건을 잊지 말아 주세요. 기억해 주세요.
현제 다음 아고라에서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 및 특별법 제정촉구 3차청원 서명전을
하고 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 드립니다.
많은 분들의 서명 과 공유가 필요 합니다.
서명과 공유 부탁 합니다.“


▲ 미디어오늘 페이스북 페이지에 달린 이향직씨 댓글

댓글 끝에는 형제복지원 특별법(내무부훈령 등에 의한 형제복지원 등 피해사건 진상규명 법률안) 통과를 촉구하는 다음 아고라 서명을 페이지를 덧붙인다. 진심을 담았지만 쉽게 외면당하고 심지어 ‘스팸 메시지’ 취급까지 당한다. 마음에 쌓인 응어리는 가늠하기 어렵고 할 말은 많은데 들어주는 이는 없다.

13일 미디어오늘은 경기도 광주에 거주하는 이씨를 만나 댓글로 다 풀지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장사마치고 집에 오면 새벽 2시, 댓글 달다가 잠들어요” 이씨는 틈날 때마다 언론사 페이지를 찾는다. “미디어오늘, 한겨레, 경향신문…그냥 보이는 대로 다 달아요. 보다가 노컷뉴스 나오면 거기다가도 달고…”

▲ 13일 경기도 광주의 한 카페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는 이향직씨. 사진=장슬기 기자

처음부터 언론사 페이스북 페이지를 찾은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페친(페이스북 친구)이 많은 개인 게시물에 주로 달았어요. 지적하는 글이 자꾸 올라왔어요. ‘내 친구들은 다 봤다. 그런데도 계속 올리면 불편하다. 강요다.’ 이런 식이죠. 시작할 때부터 욕먹을 생각하고 시작했지만 개인계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고민하다가 언론사 페이지를 찾았죠.”

언론사 페이지에 댓글을 달아도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왜 기사랑 관련도 없는데 계속 댓글다냐’거나 ‘오래전 일 끄집어 내 자꾸 분란을 일으키느냐’ 뭐 이런 얘기들 많아요. 한 진보성향의 언론사 페이스북 관리자가 댓글 달지 말라고 얘기한 적도 있어요. 스팸같이 보인다는 식으로. 그래도 계속 하죠.”

그러면 이씨는 이런 비난에 어떻게 대응할까? “국가폭력이라는 게 꼭 당신들하고 상관없는 일이 아니다. 언제든지, 내일 당장이라도 생길 수 있다. 세월호 사건, 백남기 농민에 대해 국민들이 같이 슬퍼하고 분노하는 이유가 그렇다.” 이제 이씨 댓글에 우호적인 반응이 더 많다.

아고라 3차서명, 딸이 써준 글

이씨가 공유한 링크를 열면 이씨의 딸이 쓴 글을 만난다.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경기도 광주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성남시 소재의 성보경영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고
한때는 경찰 공무원이 꿈이었던 고등학교 2학년 학생입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은 주로 경찰에 의해 끌려가 인권유린을 당했기 때문에 경찰에 대한 적대감이 강하다. 이씨 역시 경비, 경찰 등을 보면 화가 차오르거나 심하면 숨이 막힐 듯이 가슴이 답답하다. 이런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뒤 이씨의 딸은 경찰의 꿈을 포기했다.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이 7월초에 형제복지원 특별법을 발의한 직후 시작한 서명에 13일 현재 5065명이 참여했다. “1차와 2차 서명 때는 제가 썼던 글로 서명을 받았어요. 그때는 19대 국회 때 진선미 의원이 발의했던 특별법이었죠. 20대 국회들어와 3차 서명을 시작하려고 다시 글을 쓰려는데 그때 쓴 것 보다 더 잘 쓸 자신이 없더라고요.”

다음 아고라에서 1차 서명은 지난해 4월부터 2177명, 2차 서명은 지난해 11월 5700명이 서명에 참여했다. 형제복지원에 대한 여론의 관심이 일시적인데 반해 꾸준히 서명 참가자가 늘고 있다. 투박한 댓글이지만 이씨가 비난을 감수하며 간절히 달았던 댓글이 효과를 본 것이다.

쉬는 날엔 댓글에 올인

이씨의 구체적인 일상에 대해 들었다. 평일의 경우 오전 7~8시경 집에서 출발한다. 이씨부부는 아파트 단지에서 열리는 알뜰시장, 야시장에서 회오리감자를 판다. 오전에 가서 자리를 잡고 장사준비를 한다. 준비를 마치고 점심을 먹을 때가 되면 휴대폰을 만질 틈이 생긴다. 페이스북에 접속한다.

▲ 이향직씨 휴대폰 배경화면은 딸의 얼굴이다. 다음 아고라 서명과 페이스북 앱을 나란히 배열해놨다. 사진=장슬기 기자

점심식사 이후 한 시간 정도 부족한 잠을 보충해야 한다. “댓글 달다 잠드는 거죠” 장사를 시작하면 오후 11시 넘어서까지 저녁시간도 없이 손님들을 상대한다. “냉장고에 한번 들어갔던 감자를 쓰면 맛이 없어요. 좀 비싸더라도 햇감자 사려고 매주 토요일마다 가락시장에 가죠. 손님들 줄을 서죠. 많이 버는 거 같지만 35도씩 올라가는 여름엔 장사 쉬어야 하니까…”

뒷정리까지 마치고 집에 오면 새벽 2시. 배고프면 밥을 먹고 이씨는 언제나 댓글을 달다가 잠이 든다. “비오는 날, 쉬는 날에는 하루종일 댓글로 알려요” 그는 페이스북에 자신을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모임 온라인 대외 홍보 담당’이라고 소개했다. “처음에 그냥 종선이가 시켜서 한 거죠 뭐”(웃음) 책 ‘살아남은 아이’의 저자이자 모임 대표인 한종선씨를 말한다.

잘못된 보도 바로잡기

페이스북을 몰랐던 시절에는 포털에 들어가 형제복지원 관련 기사에 댓글을 달았다. 이씨는 “기사에 제가 생각할 때 잘못된 표현이 많았다”며 “수정해달라고 지적했다”고 말했다.

이씨가 가장 자주 발견한 오류는 형제복지원 사망자 수였다. “551명인데 513명이라고 적은 기사가 많아요” 형제복지원 사망자 수는 1987년 신민당 형제복지원 진상조사 보고서를 토대로 해 513명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2014년 추가로 38명의 사망자가 확인돼 총 551명으로 늘어났다.

피해생존자들의 주장이 왜곡되는 경우도 발견됐다. “피해자들이 첫 번째로 요구하는 게 명예회복이고 보상문제는 제일 끝인데 어떤 기사에는 명예회복 관련 내용은 없기도 하고. 새누리당이나 정부쪽에서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든다고 했는데 19대 때 특별법에는 보상얘기도 없어요.”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억울함이었다.

‘부랑인’, ‘거지’ 등으로 낙인찍는 것은 2차 가해였다. “형제복지원이 부랑인, 장애인, 껌팔이를 잡아 강제수용했다는 기사도 있는데 술 한 잔 마시고 졸던 사람도 잡아가고, 길 모르는 사람 잡아간 경우가 더 많았어요. 모르는 사람이 그 기사만 보면 그냥 거지수용소죠.”

정부 측은 특별법 관련 공식석상에서 부랑인의 개념이 모호하다고 밝혔고, 이는 형제복지원 감금자들이 특별한 기준 없이 잡혀갔다는 증거가 된다. 또한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라 하더라도 인권침해는 정당화할 수 없다는 내용이 강조된 기사도 드물었다.

▲ 이향직씨가 언론사 페이스북 페이지에 단 댓글. 사진=장슬기 기자

하다보니 나의 일

이씨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해왔다. ‘어떤 계기로 댓글을 달게 됐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그냥 종선이가 온라인 담당 해달라고 해서 했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게 곧 자신의 일이었다. 돈보다 책임자들의 사과가 필요한 것도, 원래부터 문제가 있어 끌려갈 사람이라서 끌려갔다는 식의 오해를 받기 싫은 것도 자신이었다.

어린시절 폭력을 쓰던 아버지가 이씨를 파출소에 보냈다. 경찰은 이씨를 형제복지원으로 보냈다. 아버지는 이씨가 형제복지원에 있는 사실을 알았지만 데릴러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나와 집에 와 검정고시를 볼 때도 ‘니 갈 길은 니 알아서 하라’고 했다. 형제복지원 일은 잊고 살았고, 최근에서야 피해사실을 말하게 됐다.

“이 일을 생각하면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억눌러야만 했어요. 그런데 한번 말하고 나니까 자꾸 말하게 되더라고요” 그는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인해 매일 정신과 약을 먹는다. 그의 아내 역시 약을 먹어야 안정이 된다. 약간의 문구만 바꿔 똑같은 내용의 댓글을 다는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스팸’이지만 그에겐 유일하게 주어진 ‘떠들 권리’다.

이씨에겐 최근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하나씩 있다. 나쁜 소식은 형제복지원 박인근 전 대표가 지난 6월 사망한 사실이 지난달 말에 뒤늦게 알려진 사실이다. “그X은 좋게 죽으면 안 되는데…보통 죽을 때 되면 사람이 미안했던 감정도 생기고 후회도 하고 그러지 않나요? 사과를 받았어도 분이 안 풀렸겠지만. 막 가슴이 터질 것 같았어요.”

▲ 지난달초 부산 소년의 집에 가 입수한 이향직씨의 기록. '형제원에서 전원'됐다는 사실이 기록돼있다. '돈훔쳐가지고 가출'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에 이씨는 "내 저금통 가지고 나온 걸 이렇게 써놨다"고 말했다.

좋은 소식은 그가 지난달 초 자신의 형제복지원 기록을 입수한 사실이다. “형제복지원에서 나와서 부산 소년의집으로 갔거든요. 거길 갔더니 자료가 있었어요.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건데 뭐가 좋으냐고 생각하시겠지만 그래도 제 추억이라고 하면 추억인 거죠.” 그는 그 서류를 받아와 코팅부터 했다.

형제복지원사건 진상규명 및 특별법 제정촉구 [서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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