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조(금속노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간부 모두가 삭발을 감행하고 ‘노조탄압 중단’을 주장했다. 9일 째 곡기를 끊고 단식투쟁에 돌입한 조합원도 두 명이다. 삼성중공업 하청업체 '천일기업‘ 노동자들은 지난 5일 거제 조선소를 떠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집 주변에서 노숙농성을 시작했다. 모두 조선산업 구조조정의 광풍을 맞은 하청노동자들의 싸움이다.

조선산업 구조조정이 한창인 가운데 조선소 내 '가장 약한 고리'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생존권 문제가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1년 간 5명 중 2명이 구조조정으로 인한 이직을 경험했고 심할 경우 10회 이상 이직한 하청노동자도 있었다. 10명 중 3명꼴로 임금체불을 겪고 있었으며 절반 이상이 실질 임금이 하락해 소득 문제를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금속노동조합은 지난 6일 오후 국회의원회관에서 '조선 하청노동자 구조조정 실태 대안 모색 국회 토론회'를 열고 지난 6~7월 간 진행한 하청노동자 노동 조건 실태를 발표했다. 실태 조사엔 전남 목포, 경남 울산·거제·통영, 창원 등 주요 조선소가 있는 5개 지역의 하청노동자 500명이 참여했다.

▲ 금속노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간부들이 지난 8월27일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서 현대중공업의 노조 탄압을 규탄하는 삭발식을 단행했다. 사진=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제공

1년에 10번 이직, 물량팀 10명 중 5명 임금체불… 800만 원 체불된 경우도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만성적인 고용 불안, 임금 체불, 산재 위험 문제를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00명 중 213명(42.76%)이 최근 1년 간 업체를 옮긴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직 사유로는 '업체 폐업'이 107명(39.78%)으로 가장 많았고 임금 인상 목적이 66명(24.54%), 감원 또는 구조조정이 36명(13.38%)로 뒤를 이었다.

사내하청 중에서도 약한 고리인 '물량팀'의 경우 문제는 더 심각했다. 물량팀 노동자 90명 중 58%가 업체 변경을 겪었고 3회 이상인 경우는 16.66%에 달했다. 올해만 10번 넘게 이직한 경우도 있었다. 현대삼호중공업의 한 물량팀 노동자는 심층 면접조사에서 "용역형태로 한 달에 열흘에서 보름 사이(로 일한다). 일이 있는데 가서 일을 하니까 (2016년에 업체 변경 횟수는) 한 10회 정도는 될 것"이라면서 "2014~2015년 경우는 1년에 한 두 차례 옮겼는데 최근에는 아예 쑥대밭이다. 나쁘게 얘기하면 개 취급하는 것"이라 말했다.

최근 1년 간 임금 체불 경험이 있는 하청노동자는 31.95%에 달했다. 물량팀의 경우는 절반 이상인 51.77%를 보였다. 300만 원 이상 체불된 비율은 전체의 경우 15.64%, 물량팀의 경우 30.57%였다.

금속노조 조사에 따르면 체불된 임금이 800만 원에 달하는 하청업체 일용직 노동자도 있었다. 임금체불은 원청이 하청업체에 지급하는 기성금을 삭감함에 따라 일방적으로 임금이 삭감된 경우,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업체가 폐업한 경우, 업주가 도주한 경우 등의 상황에서 발생했다.

▲ 전국금속노동조합은 지난 9월6일 오후 국회의원회관에서 '조선 하청노동자 구조조정 실태 대안 모색 국회 토론회'를 열었다. 사진=손가영 기자

고용불안, 임금체불 문제에 더해 실질 임금도 하락했다. 전체 응답자 중 216명(55.4%)이 실질 소득이 줄었다고 답했다. 전체 응답자 중 44.1%는 임금이 줄었다고 답했고 25.2% 상여금 삭감, 38.8%는 기타 수당이 삭감됐다고 답했다.

"시급이 20% 줄었습니다. 상여금도 20% 정도 줄었습니다. 기타 수당이 20% 줄었고 노동시간도 20%도 줄었습니다. 실질소득을 더 많이 줄어서 30% 정도 줄었습니다." 삼성중공업 해양부문의 1차 하청업체 노동자의 말이다.

“극심한 고용불안, 임금체불… 살기 위해서 견딘다”

조선산업 물량 감소로 인해 전체 하청노동자 고용 인력은 감소했다. 전체 65.81%가 인원이 감소했다고 밝혔다. 30% 이상 인력이 감소했다고 밝힌 경우, 하청 본공(정규직 및 계약직)은 16.4%가, 물량팀 노동자는 30.9%가 그렇다고 답해 물량팀이 구조조정으로 인한 실직 위기에 더 취약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설문에 응한 하청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을 견디는 이유로 "살기 위해서"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반복된 업체 폐업으로 수차례 이직을 겪은 현대삼호중공업의 한 물량팀 노동자는 "계약이 종료돼서 옮기게 됐죠. 살기 위해서죠. 내가 옮기고 싶다고 옮겨지는 게 아니니까. … 퇴직금도 받고 싶고 오랜 세월 있고 싶은데 상용 근로자를 쓰지 않아요"라고 심경을 밝혔다.

하창민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장은 이날 발제에 나서 "예전이면 수주에 따라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을 왔다 갔다 하며 이직했는데 이제는 아예 갈 데가 없어졌다. 정규직은 퇴직금이나 학자금을 더 받든지 아니면 남든지 선택할 수 있지만 하청은 선택지조차 없다"면서 "업체 폐업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올 초부터 임금 10% 삭감, 수당 30% 삭감, 무급 순환휴직 등을 견디고 있다. 최소한의 생계가 안 되는 상황에 도래해있다"고 지적했다.

▲ 지난 9월2일 현대중공업 내에서 고 박창림씨의 산재 사망을 추모하는 추모식이 열렸다. 현대중공업에서는 올해만 9명의 산재사망자가 발생했다. 사진=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제공

이들은 산업 재해 문제에도 취약하다. 다단계 하도급 구조로 점철된 조선산업은 ‘위험의 외주화’ 논란에 자주 휩싸여 왔다. 하청노동자는 노동강도가 높거나 원청이 기피하는 위험한 업무에 배치되는 경우가 많고 물량팀의 경우 단기간에 고강도로 물량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작업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된다.

조사 결과 지난 1년 간 작업 중 사고나 질병에 걸린 수는 122명(24.65%)였고 사고를 고상으로 처리한 경우가 51.63%로 가장 많았다. 개인으로 처리한 경우가 31.14%, 산재보험으로 처리한 경우는 16.39%였다. 조사팀은 “다치거나 질병에 걸려도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치료받을 권리는 멀리 있는 것”이라며 “구조조정 과정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건강은 더 열악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하청노동자 노무관리 실질적 책임자는 원청… “물량팀은 금지, 원청이 하청노동자 고용승계 보장”

하청노동자들도 이 같은 사태를 지켜보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거제통영고성 조선 사내하청지회준비위 등 하청노동자들로 구성된 ‘조선하청노동자 대량해고 저지대책위원회’는 이날 토론회에서 4대 요구안을 제시했다.

대책위는 ▲하청노동자 고용·임금·안전 문제에 원청 책임 강화 ▲물량팀 사용 금지 등 하청 중심 생산구조 전면 개조 ▲조선산업 위기에 주주·경영진·채권단의 책임 강화 ▲하청노동자에 대한 사회안전망 강화와 실업대책 수립 등을 주장했다.

▲ 조선소 내 다단계 하도급 고용 구조 도식화. 자료='조선산업 하청노동자, 구조조정 실태조사 결과 분석 및 대안 모색 국회토론회' 자료집

이들은 원청과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하청노동자의 생존권은 지켜질 수 없다는 입장이다. 대책위 위원장을 맡은 하창민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장은 “사내 하청업체들은 아무런 독립성이 없다. 기계, 설비, 장비를 자기네 돈으로 사거나 투자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원청에서 지시해 둔 인력을 대리하는 것일 뿐”이라며 “하청노동자의 임금 수준도 실질적으로 원청이 결정한다. 하청업체에 임금, 퇴직금, 노동안전을 책임지라는 건 전혀 맞지 않는 얘기다. 문제가 시급한 만큼 임금, 퇴직금을 제대로 지급하도록 하는 책임을 원청사에 부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 지회장은 가장 취약한 고용구조의 물량팀은 아예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량팀은 외형적으로는 사내하청업체에 속해있지만 실제로는 업체 내 직원 한 명에게 고용된 파견인력팀이다. ‘재하청’을 금지하는 도급계약 조항을 편법적으로 우회해 만든 ‘재하도급 파견인력’으로 볼 수 있다.

‘노조 할 권리’도 주요하게 다뤄졌다. 현재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는 원청의 ‘노조탄압’을 규탄하며 단식농성·노숙농성에 돌입한 상황이다. 사내하청지회 조합원이 고용된 업체가 기습 폐업된 후 이들의 고용만 승계되지 않는 경우가 반복됐기 때문이다. 사내하청지회는 지난 6~7월 중 9개 하청업체가 일제히 교섭중단을 선언하며 조합원의 노조탈퇴를 회유한 것도 원청의 개입으로 보고 있다. 사내하청지회는 현대중공업을 향해 “노조 파괴를 중단하고 고용 승계를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책위는 고용보험에 미가입한 물량팀 노동자에 대한 실업급여 지원, 실업급여 수급액 및 기간 대폭 확대, 다단계 하도급에 대한 정부의 관리감독 강화 등을 정부의 책임으로 제시했다.

이밖에도 실질적인 법제도 개선 방안도 제시됐다. 김태욱 금속노조 법률원 변호사는 ▲도급과 근로자 공급기준을 엄격히 법제화해 중간착취 방지 ▲하청노동자 고용 보호를 위해 폐업, 정리해고 시 판단기준을 ‘법인’에서 ‘경제적 실체’로 확장 ▲임금체불 개선을 위한 임금채권의 우선변제 조항 적용 ▲표준하도급 계약서에 임금채권 지급에 관한 특례조항 도입 등을 제안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