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G20 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품고 있던 기대도 무너졌다. 중국도 우리도 사드 문제에 있어서는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만 확인하고 끝나지 않았나. 앞으로 분위기가 더 가라앉을까 걱정이다.”

중국 항저우에서 지난 4일부터 5일까지 열린 G20 정상회의를 지켜본 한 방송 콘텐츠 업계 관계자의 하소연이다. 5일 오전에는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간 정상회담이 열렸다. 냉랭한 기류를 깨고 ‘한 줄기 봄바람’을 기대했던 업계의 바람과는 달리 이날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사드 배치에 대한 기존 입장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지난 5일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는 원론적인 수준에서의 한중 협력만을 언급했을 뿐 구체적인 이견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시 주석은 “지금 국제정세가 아주 심각하고 복잡한 상황”이라면서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의 불안정 요소가 증가하고 있다”며 간접적으로 사드 배치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다만 비공개 회담을 통해서는 한반도 사드 배치에 대한 분명한 반대 입장을 표했다고 전해졌다.

박 대통령 역시 기존 입장대로 사드 배치가 불가피한 선택임을 우회적으로 시사했다. 박 대통령은 “금년 들어 북한이 4차 핵실험과 연이은 탄도미사일 발사 도발로 한반도와 이 지역의 평화를 심각하게 훼손하면서 한중관계 발전에도 도전 요인이 되고 있다”며 “중요한 일일수록 국가 간 협력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지고 있다”고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협조를 구하기도 했다.

이번 G20 정상회의 메시지를 콘텐츠 업계에서 의미 있게 지켜본 이유는 사드 배치 결정 이후 냉랭하게 바뀐 중국 업계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사드 배치가 결정된 이후 중국 방송사나 제작사와의 계약 논의나 편성 자체가 이유 없이 미뤄지고 있다는 한국 방송업계의 목소리가 줄을 이었다. 한국PD연합회 관계자는 “올해 10월 중국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던 한중일PD포럼이 중국 측의 일방적인 통보로 무기한 연기된 상황”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5일 오전(현지시간) 중국 항저우 서호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인사를 마친 뒤 돌아서고 있다.ⓒ 연합뉴스.
특히 중국의 방송통신위원회에 해당하는 광전총국이 사드 배치 보복의 차원으로 한국 콘텐츠에 대한 명확한 제재 조치를 내렸는지가 관건이었다. 광전총국 차원의 ‘대놓고’ 한국 콘텐츠 교류를 중단하라는 공식적인 지침은 없었기 때문에, 일부 업계 관계자들은 중국 콘텐츠 업계가 중국 정부 입장에 맞춰 ‘알아서’ 한국과의 협력을 자제하는 쪽으로 해석하고 있다.

실제로도 업계에선 계약이 취소되거나 일정이 연기되면서 피해를 입었다는 사례는 많아졌지만 일정한 기준에 따른 제재라고 보기 힘든 점들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최근 배우 김우빈, 수지, 송중기 등의 중국 현지의 팬미팅이 무한 연기되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 지난달 26일에는 가수 황치열이 중국 베이징에서의 단독 콘서트를 성황리에 마치기도 했다.

현재 KBS1TV에서 방송 중인 ‘임진왜란 1592’는 중국 CCTV와 합작해 만들어진 드라마다. 반면 SBS와 중국, 일본 등에서 오는 10월부터 동시 방영 예정인 ‘사임당, 빛의 일기’가 중국 광전총국의 심의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외에도 방송 편성 자체가 무산되고 있다는 관계자들의 증언은 이어지고 있다.

중국통인 한 관계자는 “실제로 콘텐츠 업계의 피해 사례가 적지 않지만 중국 정부에서 대놓고 한국 콘텐츠에 대한 제재를 내렸다고 보지는 않는 입장”이라며 “2000년대 중반부터 혐한 기류는 조금씩 있어왔고 이번 사드 배치 결정으로 혐한을 이야기해왔던 이들의 목소리가 커진 것이라고 본다”고 의견을 전했다.

따라서 이번 G20 정상회의에서 시진핑 주석의 메시지가 사실상 중국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지침의 효력으로 의미가 있을 것이고, 양국의 메시지에 따라 업계에선 대응 방안도 고민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컸다. 중국과 한국이 향후 문화 분야에서만큼은 긴밀한 협력관계를 이어나가겠다는 메시지 하나만 있어도 이전과 같은 분위기로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적지 않았다.

이번 G20 정상회의는 지금까지의 중국 콘텐츠 업계의 ‘전략적 모호성’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결과가 됐다는 평가다. 한 업계 관계자는 “중국 특유의 보이지 않는 선에서 결정되는 (콘텐츠 제재) 분위기가 이번 G20을 계기로 정리될까 싶었는데 결과적으로 안 보일 가능성이 커졌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각 회사와 관계자별로 모호하고 제각각인 상황이 여전할 것이고 이 피해는 우리 쪽에 고스란히 돌아올 것”이라고 의견을 전했다.

모호하고 애매하게 꼬여버린 한중 콘텐츠 업계의 고민을 해결해줄 열쇠는 결국 정부 당국이다. 문화 교류와 외교 문제는 별개로 분리해 사드 문제를 풀어나가려는 메시지 하나만 있어도 그동안 이어온 양국 간의 문화 교류의 끈은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박성현 고려대 한류융복합연구소 겸임연구원은 “지금도 중국 업체들이 (중국 당국의 모호한 보복조치에 편승해) 모호한 입장을 유지하면서 계약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비대칭적인 상황이 많다”고 설명했다. 또한 “한류 콘텐츠 사업자들만 놓고보면 특히 주변국 간 외교 문제 때문에 이처럼 매번 큰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 외교 문제는 따로 해법을 모색하더라도 양국 문화 교류는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당국 차원에서 교류 활성화를 시사하는 메시지를 던져줘야 할 시점”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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