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국면에 대한 안이한 정세인식 가운데 우리의 실천은 그저 과거의 양태들을 답습하기에 급급했다. … 절반에 달하는 콘텐츠를 공급하는 외주제작사들의 존재, 작가·FD 등 다수의 비정규직으로 구성된 작업체계, 여러 부문에 대한 조직화와 공조체제 구축이라는 해묵은 조직적 과제를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될 것이다. 기자회견, 시위, 성명서 위주 활동은 수명이 다해가고 있다.” (전국언론노조, ‘2012활동보고’ 중)

반성은 정확했다. 하지만 4년이 흐른 지금, 유의미한 변화는 없다. 지난해 5월 언론노조가 시작한 미로찾기(미디어 비정규노동자 권리 찾기)사업에 기대를 걸었지만 조직적인 지원이 거의 이뤄지지 않으며 제자리걸음이다. 고용형태가 건설현장 만큼 나쁘다는 방송사의 경우 사업장별 비정규직 조직화가 사실상 불가능해 조직적 역량을 쏟아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언론노조 조합원 가운데는 이들 비정규직 노동자의 채용과 해고 권한을 가진 조합원이 존재하고 있다.

한 언론운동 활동가는 “정규직 중심인 노조에서 시혜적인 시선으로 비정규직을 조직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언론노조 내부에선 방송사 정규직 중심의 언론운동에 대한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공영방송 중심의 국회입법 로비로 언론운동이 귀결되는 상황에 활동가들의 괴리감도 높은 상황이다. 또 다른 언론운동 활동가는 “나는 노동운동을 하러 왔는데 정작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언론노조가 지난 총선까지 더불어민주당 보좌관이었던 인사를 최근 정책실장으로 영입한 사실을 두고서는 내부에서도 당황스럽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언론노조에선 최근 몇 달 사이 여러 명의 사무처 소속 활동가가 사표를 내기도 했다. 언론노조의 문제는 조직적 전망이 ‘공영방송 정상화’에 머물고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이는 무늬만 산별이지 사실상 산별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안팎의 지적과 맥락을 같이하는 지점이다.

▲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조합원들이 2008년 서울 여의도 KBS앞에서 전 조합원 비상총회를 열고 '공영방송 사수' 및 '수신료 현실화'를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창길 기자
2000년대 언론노조 지부장 출신의 한 종합일간지 기자는 “자본과 전선을 그을 수 있는 노동계의 연대체로서 산별노조운동은 굉장히 중요했지만 시작부터 한계가 있었다. 언론노조가 너무나 다양한 직종으로 구성돼있어서 산별 구실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 기자는 “언론노조의 핵심투쟁역량이 방송사여서 언론노조가 방송사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할 수 있지만, 방송사를 제외한 나머지는 들러리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언론노조지부가 없는 JTBC에서 가장 공정한 보도가 나오고 있는 현실 속에 오늘날 뉴스수용자에게 주요한 영향을 미치는 종합편성채널, 네이버·카카오, CJE&M, IPTV, 수만 개의 인터넷매체에서 언론노조 조직률은 ‘0’에 수렴하고 있다. MBC의 170일 파업이 실패로 끝나고, 종합편성채널이 전면에 등장하고, 스마트폰 보급률이 67.6%를 기록하며 한국이 사상 첫 보급률 세계 1위를 기록했던 2012년을 기점으로 지상파의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운동의 관습은 달라지지 않았다.

언론노조는 KBS·MBC의 보도 외압만을 주요한 언론탄압으로 부각시키는 가운데 대다수 언론이 광고와 기사를 바꿔먹는 관행, 세금을 받고 정부부처 홍보기사를 쓰는 관행 등에 대해선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최근에는 김영란법에 언론인이 포함되며 언론계에 큰 논란이 있었지만 이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히는 성명을 내지 않았다.

언론운동, 소수 주류언론·소수 수용자 ‘낡은 대상’에만 주목
“옛날에 하던 대로 떠드는 방식이 지금 무슨 의미가 있나”

▲ 지난 26일 언론노조·언론정보학회 주최로 프레스센터에서 진행된 ‘Reboot 언론운동 : 다양한 시선, 진솔한 목소리’란 주제의 세미나 모습. ⓒ언론노조
지난 26일 언론노조·언론정보학회 주최로 프레스센터에서 진행된 ‘Reboot 언론운동 : 다양한 시선, 진솔한 목소리’란 주제의 세미나에서도 언론운동의 위기와 전망을 놓고 다양한 주장이 쏟아졌다. 김세은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지금껏 언론의 불공정성을 다뤄온 언론운동은 공정했는지 자기 성찰적으로 짚을 필요가 있는 것 같다”며 “언론운동이 제도언론의 정상화를 목표로 정치권력 교체에 집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김동원 언론노조 정책국장은 “언론노조의 입법 투쟁은 특정 정치세력 한 부분의 손을 드는 것 뿐”이라며 “입법 투쟁을 해도 언론노동운동이 어디에 기대어 어떤 정치를 할 것인지, 제도권 정치에 의존해야 할 것인지의 문제를 철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회 로비를 통한 입법투쟁은 중요하지만 국회 로비가 운동의 전부라면 운동의 주체들은 본인들의 정체성을 정당에서 찾을 수밖에 없게 되는데, 언론노조는 특정 정당의 정책팀이 아니라는 의미다.

김동찬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은 “시민이 스스로 정보를 생산하는 주체로 등장했고 콘텐츠 소비 방식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런데 운동진영은 소수 주류 언론과 소수 수용자라는 낡은 대상에만 주목하는 관습을 반복하며 공급자적 측면에서만 운동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동찬 사무처장은 “시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운동을 위해서는 시민들이 실제 미디어를 어떻게 소비하는지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우리는 보도가 어떻게 나오는지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꼬집었다.

▲ 지난 26일 언론노조·언론정보학회 주최로 프레스센터에서 진행된 ‘Reboot 언론운동 : 다양한 시선, 진솔한 목소리’란 주제의 세미나에서 김동찬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이 발언하고 있는 모습. ⓒ언론노조
이강택 전 언론노조위원장(KBS PD)은 “시사프로그램이 다 죽었다. 연출 솜씨보다는 협찬을 따오는 능력이 중요해졌다”며 “정치권력의 통제와 자본의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통제를 같이 봐야한다”고 강조했다. 이 전 위원장은 이어 “디지털 네이티브의 등장에 주목해야 한다. 젊은 세대는 미디어 운동에 이입되지 않는다. 기존 미디어에 대한 욕구가 없는데 옛날에 하던 대로 떠드는 방식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고 반문하며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언론운동계 원로)들이 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전 위원장은 또한 “오늘날 미디어 구조는 경쟁질서 확립과 노동의 분할로 설명할 수 있다”며 “노동의 인위적 분할을 언론노동자들이 극복해내지 못한다면 무슨 변화가 있겠나”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김동원 언론노조 정책국장 또한 “미디어의 공적 영역을 어디서부터 구성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한 뒤 “언론노동운동이 언제까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만 할 것인가”라고 되물으며 “격화된 노동 분업에서 어떻게 (노동자들이) 연대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원용진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언론노조를 향해 “이념의 폭을 넓히고 더 많은 민주주의가 절실하다. 빅데이터 시대, 사물인터넷 시대에 맞춰 미디어운동을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원용진 교수는 “‘내 꿈은 정규직’이라는 게임 아티스트와 언론노조가 만날 수 있어야 한다”며 “운동 플랫폼을 확장 해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오디오OTT 형식의 팟빵을 미디어 운동에 기여하게 하는 전략도 고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언론노조 조직률 10%대, 언론노동자 자사이기주의 심화돼
전통적 노조 질서에서 과감히 벗어나 미조직 사업 지원해야

올해 언론운동진영은 MBC ‘백종문녹취록’과 KBS ‘이정현녹취록’으로 박근혜 정부에서 벌어진 언론장악과 여론통제를 폭로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만큼 사회적인 쟁점으로 부상하지 못했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공영방송에 대한 관심도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은 데서 비롯되고 있다. 지금까지 언론운동의 중심은 1987년부터 언론민주화를 주도해온 KBS와 MBC였다. KBS와 MBC가 멈추면 방송이 멈추던 시절에는 공영방송을 중심으로 투쟁을 주도한 방식이 옳았다.

▲ 2010년 공정방송을 위한 MBC파업 당시 촛불문화제 모습. ⓒMBC노조(왼쪽), 이치열 기자(오른쪽)
하지만 언론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지상파의 플랫폼 기득권이 사라지며 더 이상 공영방송 의제만으로 언론운동을 이어가기 어려워졌다. 미디어 또한 모호해지고 다양해졌다. IMF 구조조정 이후 비정규직 인력이 늘어난 2000년대 이후의 언론운동은 단지 ‘정권의 언론탄압’만 사라지면 언론이 정상화될 거라고 할 수 없는 처지다. 1990년대 기자협회 회원사 대부분이 언론노련 소속이었고 대부분 사원들이 정규직이었던 시절의 투쟁과 지금의 투쟁은 달라야 한다.

2015년 언론연감에 따르면 전체 언론 산업 종사자는 5만5507명이다. 언론노조 조합원은 올해 1월 기준 1만2316명이다. 국민권익위원회는 김영란법에 적용되는 언론계 종사자를 9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권익위 기준으로 볼 때 언론노조 조직률은 10% 초반 수준이다. 노동조합은 점점 노동자들의 선택지에서 제외되고 있다. 언론노조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수많은 독립제작사와 영세 언론사에는 노조가 없다. 이직이 빈번한 비정규직 언론노동자에게도 노조는 먼 이야기다.

이제 언론운동의 대상과 범위를 처음부터 논의해야 한다. 조중동도 예외는 아니다. 조중동 소속의 한 기자는 “2012년 내부에서 언론노조 가입 논의가 있었지만 언론노조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투쟁 방향이 조중동 폐간이었다”고 말했다. 이 기자는 “우리보다 매일경제나 연합뉴스가 더 나갈 때도 있다”며 “2000년대에는 조중동 폐간 운동이 시대상황에 맞을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조중동을 악의 축으로 단정하기에는 시대가 달라졌고 전선도 불분명해졌다”고 주장했다.

김요한 노무사(민주노총 서울본부 노동법률지원센터)는 최근 매일노동뉴스 칼럼에서 향후 민주 노조의 과제로 “기업별 단체교섭을 하는 전통적인 노조 질서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개별 노동자들이 재직 여부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가입할 수 있는 노동조합, 삶의 조건을 개선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젊은 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산별노조에 속한 각사 조합원들은 ‘회사의 생존이 나의 생존’이라는 전제에 매몰되고 있다. 과거 미디어렙을 비롯해 각종 법안을 둘러싼 갈등이 일례다. 이와 관련 언론노조 지부장 출신의 중앙일간지 기자는 “언론노조 소속 기자들은 자사 이기주의를 절대 극복할 수 없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운동의 확장과 성장은 요원해 보인다.

김요한 노무사는 “미조직 사업에 돈과 사람을 지원해 줘야 한다. 조직 노동자들에게는 만연한 조합주의 의식을 깨뜨리고 계급적 정치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활동이 노조 활동가의 주된 임무가 돼야 할 것”이라 지적했다. 구호를 잃어버린 언론노동자들이 곱씹어야 할 대목이 여기 있다.

슬프지만 인정하자. 2012년 촛불을 들고 MBC앞에 모였던 시민은 이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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