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아무도 관심가지지 않을 일을 했는데 무슨 인터뷰를 하냐.”

지난 21일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특별한 영화상영회가 열렸다. ‘대만-일본-한국 평화기행 이야기’라는 이름의 다큐멘터리 상영회였다. 영화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던 두 청년이 지난 겨울 80일 동안 동아시아의 ‘분쟁지역’을 방문한 과정을 다뤘다. 영화감독 양수환씨(32)는 자신이 몰랐던 세상을 경험하고 왔다는 뜻에서 제목을 ‘다른 세계’라고 불렀다.

이들은 청년 예술인이다. 양수환씨는 영화를 찍고 김원중씨(35)는 미술작품 중심의 활동을 한다. 두 사람을 처음 만난 곳은 지난해 12월31일 밤 진도 팽목항이었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2016년 새해맞이 문화제를 열고 있는 팽목항 한 켠에 서서 묵묵히 카메라로 현장을 찍고 있었다. 대만, 일본을 거쳐 50여 일 째 여행 중이던 이들은 새해를 꼭 팽목항에서 맞고 싶어서 일부러 찾아왔다고 말했다.

▲ 지난 8월21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에 위치한 한 까페에서 영화 '다른 세계' 상영회가 열렸다. 영화를 제작·연출한 김원중씨(왼쪽)와 양수환씨(오른쪽). 사진=김원중씨 제공

“내가 모르는 사회 구조 속에서 누구는 핍박을 당하고 살고 있었다. 거기에 대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부터 ‘이렇게 살아도 되나’ 생각했다.” 이들이 이런 마음으로 방문한 곳만 족히 20곳이 넘는다. 대륙을 횡단할 정도의 이동거리도 길다. 미디어오늘은 ‘아무도 모르는’ 영화상영회를 연 두 청년을 만나 ‘80일 간의 평화기행’ 이야기를 들었다.

핵발전소, 군사기지, 송전탑, 케이블카, 정리해고 … 평화 배우러 떠난 80일 기행

여행은 지난해 11월13일 대만 룽먼에서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이슬람공동체가 있는 ‘아체’에서 1여 년간 머문 김씨와 한국에서 알바를 하며 영화작업을 준비해오던 양씨는 각자 자전거를 들고 대만에 모였다. 대만 탈핵 활동가들이 30여 년간의 끈질긴 싸움 끝에 공정률 98%였던 ‘룽먼 핵발전소’ 건설을 멈춘 기념비적인 곳을 첫 행선지로 정했다.

이후 오키나와로 향해 지금도 싸움이 이어지고 있는 국가폭력 현장을 찾았다. 일본 전 국토의 0.6%를 차지하는 오키나와는 섬 면적의 4분의 3이 미군기지로 꽉 차 있다. 주민들이 오키나와의 군사기지화에 반대하며 싸워온 지 70년이 넘었다.

▲ 오키나와에 있던 한 가정집 옥상. ⓒ김원중
▲ 2024년까지 핵발전소 12기가 밀집될 부산 기장의 고리 원전 지역의 풍경. ⓒ김원중

자위대 레이더기지가 들어선 요나구니 섬, 후텐마 미군 비행장, 가데나 공군기지, 다카에 에노완 텐트촌 등 영화는 쉬지 않고 군사기지를 비춘다. 카메라는 가데나 공군기지에서 가장 오래 머무른다. 이미 제주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공사가 강행되는 동안 봐왔던 익숙한 장면이 나온다. 마을 주민과 평화활동가들이 공사차량이 진입하지 못하게 길바닥에 드러눕거나 울타리 바깥에서 노래를 부르며 집회를 연다. 이들 모두가 경찰에게 사지를 붙들린 채 끌려 나간다.

영화의 2막은 ‘나의 조국’이다. 여행 시작 한 달여 후, 이들은 일본에서 제주도를 향한다. 두 사람은 제주 4.3 현장과 해군기지가 들어선 강정마을을 방문했다. 이들은 현장에 머무르며 양민 학살의 역사, 생명·평화를 위해 3000일 넘게 투쟁하며 마을을 지키려 했던 해군기지 반대 운동의 역사를 듣는다. 제주도에서 울려 퍼진 노래 한 대목이 두 청년의 생각을 대신했다.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가 원직 복직하는 것이 평화.
두꺼비, 맹꽁이, 도룡뇽이 서식처 잃지 않는 것이 평화.
가고 싶은 곳을 장애인도 갈 수 있는 곳이 평화.
군대와 전쟁이 없는 세상 신나게 노래 부르는 것이 평화.”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팽목항, 765kV 송전탑 건설을 반대했던 밀양의 ‘할매·할배’, 핵발전소 12기가 밀집될 지역인 고리, 핵발전소 건설 반대 투쟁이 한창인 영덕·삼척, 오색 케이블카 건립을 저지하려 싸우는 강원도 양양, 밀양과 마찬가지로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었던 청도, 평택 쌍용자동차, 경기도 안산 단원고 등 숱한 현장을 방문한 뒤 이들은 1월29일 서울로 돌아왔다.

▲ 2016년 1월1일 팽목항. ⓒ김원중
▲ 경북 영덕 주민들이 핵발전소 유치 반대를 위한 촛불집회를 하는 모습. ⓒ김원중

사비털어 시작한 가난한 여행

단돈 200만 원. 80일 간 3개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쓴 비용치고 놀라운 금액이다. “얼마나 '없이' 여행했는지 보이지 않느냐.” 이들은 자전거, 텐트, 잡다한 도구가 든 배낭만 챙겨든 채 여행했다. 200만 원도 모두 각종 알바로 모아뒀던 사비였다. 김씨의 자전거는 인도네시아 고물상에서 차례차례 모은 부품으로 조립해 변속기어도 없었다.

이들은 비용 문제 때문에 비행기에 실을 자전거 가방을 동대문에서 직접 천막을 떼와 만들기도 했다. 편의점 음식으로 끼니를 때울 때도 많았고 샴푸·린스도 안 썼다. 한파가 몰아쳤던 지난 1월, 텐트에서 자던 이들은 추위를 견딜 수 없어 주변을 전속력으로 달린 후 잠을 청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코인세탁소에서 몇 일 머문 적이 있는데, 이들의 여행을 아는 주민들이 먹을거리를 내 주는 등 도움을 주기도 했다. 선뜻 숙소를 내주거나 현장 답사를 도와주고 식사를 대접해 주는 등 마을 사람들의 환대가 이들의 여행을 도와주었다.

평화기행을 제안한 쪽은 김씨다. 이전부터 ‘평화’라는 가치를 자신의 예술 활동에 접목시키고자 했던 그는 2014년 강정, 밀양 등을 방문하다가 한 평화활동가의 추천으로 인도네시아의 이슬람공동체 ‘아체’에 1여 년을 머물렀다. 그러던 중 지난해 여름 김씨는 양씨에게 여행을 제안했고 5개월 여 간 여행을 준비했다. 어떤 현장을 방문할 지 결정하고 교수, 목사, 활동가 등 현장을 아는 관계자의 조언을 구하는 과정이었다.

▲ 이들은 기행 대부분을 자전거로 직접 이동했다. 양수환씨가 자전거를 점검하고 있는 모습. ⓒ김원중


한 톨 씩 쌓아 밥 한 공기 만드는 생명의 예술 꿈꾼다

김씨는 ‘한톨원’이라는 예명을 사용한다. ‘한 공기 프로젝트’는 그의 예술활동 중의 일부다. 그는 “세상 어느 것도 홀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없다. 모든 관계 속에서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것들이 생겨난다. 쌀 한 톨 같은 사람들, 그런 한 톨이 모여 밥 한 공기를 짓고, 그 ‘한 공기’ 나눠먹는 살림살이가 예술이 되길 바래본다”고 설명한다.

이런 김씨에겐 이번 여행이 “인식을 직접 행동에 옮기고 멀리 뒀던 장소를 적극적으로 대면”하면서 지난 시간을 갈무리하는 시간이었다면 양씨에겐 “아티스트로서, 한 개인으로서 내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계기였다. “평화가 뭔지 고민해 본 적도 없는 무위도식 청년”이자 팍팍한 삶과 우울함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던 양씨는 영화가 끝날 즈음 내레이션을 통해 자신의 변화를 언급한다. “우리는 배고픔과 갈증을 해소하려 길을 나섰다가 그보다 더 큰 슬픔을 안고 돌아왔다. … 이상하게도 그 과정에서 위로받는 것은 나였다. 만남이 나를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좌절과 소외에서 벗어나게 했다.”

여행 동안 성찰과 연대를 배웠다는 그는 “어떤 고통이나 문제의 원인을 개인에게 함부로 덧씌우지 말자”고 덧붙였다. 그 스스로도 영화를 만드는 자신의 삶을 두고 “내가 너무 열심히 안 해서, 노력이 부족해서 그래. 내가 돈이 없어서 그래”라고 자신의 탓을 많이 했으나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넘어선 사회 구조 안에서 휩쓸려 갈 수 밖에 없었다. 사회를 알아야 하고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 영화 상영회 포스터. ⓒ김원중, 양수환
▲ 일본 자위대 레이더기지가 들어선 오키나와 요나구니섬의 풍경. ⓒ김원중

이들은 귀국하자마자 일자리를 찾느라 바빴다. 양씨는 급히 대학 급식소에서 식기세척 알바를 뛰다 호프집 알바를 하며 일상으로 복귀했고 김씨는 동대문 시장에서 야간 커피배달 알바를 하며 오후 시간을 이용해 작품 준비를 이어갔다. ‘다른 세계’는 그렇게 6개월이 지난 후 양씨가 공들여 편집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양씨는 현재 배급사를 찾고 곧 개회를 준비하는 일부 영화제에 출품작 응모를 하고 있다.

경제적·제도적 지원이 여의치 않은 상황 속에서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이 적응하라는 대로 살고 싶진 않다”면서 “세상의 대안을 찾는 과정을 작품에 계속 연계해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가장 인상 깊은 기억이 뭐냐는 질문에 ‘요나구니의 테츠상’이라고 말한 답은 그들의 향후 작업의 단면을 보여준다. 테츠상은 일본 자위대 레이더기지가 지어진 오키나와의 요나구니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청년활동가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군사기지 건설 반대운동을 이어나가는 1인 활동가다.

“오셀로 게임에 비유하자면 일본이 암흑(군사기지화)이 된 상태에서, 마지막 귀퉁이(요나구니섬) 하나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 그곳에 흰 말을 놓으면 다른 돌들도 다 백색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을 믿고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