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부의 실체를 이해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언술과 괴리된 정책, 언술과 언술 사이의 불일치, 정책과 정책간의 상호충돌 현상은 어떤 일관된 논리로도 해명되지 않는다.

문민이라는 권력의 자기 규정과 대통령 ‘말씀’한마디에 사법적 기준이 돌변하는 모순, 세계화를 부르짖으면서도 UN인권위의 강력한 노동법 개정 권유가 무시되는 상황, 언필칭 ‘역사’를 동원하여 훗날로 돌려졌던 5·18문제가 어느날 갑자기 내년 총선 전까지는 끝을 봐야만 하는 ‘정치적 과제’로 탈바꿈하고 있는 현상 등 이 정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부분은 상식을 가진 보통 사람으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그럼에도 현정권은 개혁 또는 세계화라는 말로 이 모든 모순을 숨긴다.

정책간의 상호 모순 현상은 현정부의 재벌 정책에서 잘 드러난다. 한때 신경제 정책을 들고 나오면서 지나친 재벌 중심의 경제정책으로 비판을 받은 바 있는 현정부는 최근 노태우씨 비자금 국면을 지나면서 강력한 재벌 규제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정부가 재벌을 규제하려는 것은 거대 규모의 기업집단군이 일개 가족에 의해 독점적이고 배타적으로 지배되는 데 대한 문제 인식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부가 한편으로는 재벌의 독점적 지위와 사회적 영향력을 결정적으로 강화시키는 정책을 여론의 광범위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하려 하고 있다.

재벌의 방송참여 허용 방침이 그것이다. 공보처가 선진방송 5개년 계획이니 하면서 재벌 방송참여를 유보했다가 별다른 설명없이 당정회의를 거치고는 이내 없는 일로 치부해 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정책이라 이름 붙이기도 민망하다. 노태우씨의 비자금 파동율 거치면서 우리는 재벌의 추악한 탐욕과 함께 비굴한 변명까지 들었다. 이들이 방송사를 소유하게 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자본의 독점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논리와 견해의 독점이다. 재벌의 방송 진출은 의견의 다양성이 표출되는 민주적 다원주의가 원천적으로 봉쇄될 수 밖에 없는 견고한 사회적 장치를 만드는 것이다. 재벌 중심의 사고와 논리가 TV라는 강력한 영상매체를 통해 국민 일반에게 일방적으로 전달될 것이 분명하다.

예컨대 노태우씨에게 돈을 준 것은 ‘약한’ 재벌이 ‘악한’ 권력에게 강탈당한 것일 뿐이고 총수를 사법처리하면 국민경제가 위기를 맞을 것이라며 그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은폐시킨 채 국민들을 호도하고 기만할 것이다. 국민의 72%가 반대하고 방송계와 시민단체들이 한 목소리로 재벌의 방송 진출을 비판하고 있음에도 정부가 이를 굳이 이번 국회에서 강행 통과하고자 하는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정부는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리하게 재벌을 편드는 정책의 오류를 범하지 말고 오히려 노태우 비자금 사건을 계기로 재벌의 족벌 경영체제를 실질적으로 해체시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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