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제도에 의해서 공인되지 않는 가치관을 갖는 사람들을 제도의 권력으로부터 영구히 추방해 온 전통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몇 공, 몇 공을 따질 필요도 없이 유구한 바 있다.

쫓겨난 사람들은 현실적 삶의 터전을 모두 잃고, 마치 불가촉의 문둥이처럼 버림받아 역사의 먼 외곽을 겉돌고 헤맬 때 그들을 추방해 버린 권력과 제도는 인간세를 관리해야하는 모든 문물이 갖추어야 할 탄력성과 자기전환의 가능성들을 모두 상실하고, 사물(事物)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사물화된 권력과 제도는 자신이 구축한 그 사물성으로 인하여 멸망의 길을 재촉해 왔다. 우리는 빨갱이 뿐 아니라 그 언저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을 추방하고 감금했다. 전교조, 삼청교육, 언론인 숙정 등은 정권의 차원에서 자행된 추방과 감금의 대하드라마일테지만 기업이나 사조직 속에서도 ‘이단’을 추방함으로써 조직을 사물화해 가는 전통은 역시 유구한 바 있다.

추방은 추방 자체를 성화(聖化)하려는 욕망을 갖는다. 그 성화의 욕망은 또 추방하는 자와 추방당하는 자 사이에 개입하려는 ‘제3자’의 시선과 언설을 차단하려는 속성을 갖는다. 추방은 추방과 피추방의 관계를 성(聖)과 악(惡)의 관계 위에 설정해 놓아야만 추방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정부는 지금 ‘민주노총’이라고 간판을 내세운 새로운 ‘이단’을 제도적 삶의 자리로부터 추방해 내고 있다. 이 추방은 전교조, 언론인 숙정 등에 이어 또 한바탕의 시대사적 추방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민주노총은 추방돼 마땅한 악(이적단체)으로 규정됐고 그 초대 위원장인 권영길씨는 노동쟁의조정법상 제3자 개입금지 조항(13조2항)을 위반한 죄목으로 구속됐다.

물론 권영길씨에 대한 혐의는 이번 민주노총 결성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지난해 벌어졌던 전국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과 관련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위원장이 ‘제3자’들의 개입을 봉쇄하는 추방의 고전적이 원리를 확인해 주고 있다. 인간의 인간다운 도덕성은 그가 제3자로서 남의 고충과 남의 재난에 개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개입하는 ‘제3자’의 존재가 없다면 인간은 인간의 편에 가담하는 역사와 문화를 건설할 수 없다. 야수들의 싸움에는 제3자가 개입하지 않지만, 인간들 사이의 분쟁에는 제3자가 개입해야 한다.

왜 그런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고도 명료하다. 인간이 야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법률은 ‘제3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법은 인간의 삶을 규제하는 형식일 터인데, 야수의 싸움에 기준을 두고 있다. 언론은 왜 언설행위를 하는가. 우리는 왜 학교를 만들어서 아이들을 교육시키는가. 민주주의는 왜 3권을 분립시키는가. 왜 헌법재판소를 두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우리는 ‘제3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제3자’는 지금 감옥 속에서 겨울을 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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