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통신의 삼성반도체 직업병 기사와 관련해 해외언론과 국내언론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BBC와 알자지라, 허핑턴포스트 등이 해당 기사를 인용 보도했지만 국내 언론은 이에 반박하는 삼성전자와 고용노동부의 입장만을 전하는 등 사실상 무관심에 가까운 행태를 보였다. 

AP통신, 8개월에 걸쳐 삼성반도체 직업병 취재

AP통신은 10일 ‘아픈 삼성 노동자들을 정보로부터 차단하는 두 단어 : 영업비밀’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해당 기사의 골자는 한국 정부가 삼성전자 등 기업의 요구에 따라 피해노동자의 업무환경 등의 정보를 은폐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기사 내용에 따르면 이는 올해 1월부터 취재한 결과물이다. 

▲ 8월10일 AP통신 기사
AP통신은 “한국 정부가 삼성의 요청으로 계속해서 노동자와 유가족들에게 반도체와 LCD 공장의 화학물질 노출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며 이와 관련해 “적어도 10명의 노동자들이 관련된 여섯 사건(case)에서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정보가 공개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삼성은 정보접근을 ‘의도적’으로 막은 적이 없으며 법적으로 공개가 요구되는 모든 화학물질에 대해 투명하다는 성명을 이메일로 보내왔다”면서 “법원 및 노동부 문서에 따르면 지난해까지도 화학물질 노출정도와 다른 점검들 관련한 상세 내용을 공개하지 말 것을 삼성이 정부에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AP통신은 다발성 경화증을 앓고 있는 이희진(32)씨가 일했던 삼성 LCD 공장 기록을 요청 받았을때 고용노동부는 삼성의 영업비밀을 보호하기 위해 상당부분이 가려진 기록을 보낸 사실, 고용노동부가 삼성 온양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이범우씨에 대한 화학물질 노출 정보 제공을 거절한 사실 등을 예로 들었다. 

▲ 캐나다 일간지 토론토스타 8월18일 신문
캐나다 일간지 1면에 보도된 고 황유미씨
 
AP통신 기사는 미국, 캐나다, 인도 등 각국 언론에서 비중있게 인용 보도됐다. 캐나다에서 가장 발행 부수가 많다고 알려진 토론토스타(The Toronto Star)는 18일 조간신문 1면에 AP해당 기사를 게재했다. 1면에는 기사와 더불어 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를 처음 알린 고 황유미씨 사진도 실었다. 

허핑턴포스트 캐나다는 앞서 10일 “삼성 노동자들이 병들고 죽어간다, 회사의 ‘영업비밀’ 때문에”라는 제목으로 동영상과 함께 AP통신 기사를 인용보도했다. 미국 덴버와 콜로라도의 경제지 덴버포스트도 같은 날 “화학물질을 처리하며 병을 얻은 삼성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높였다”며 이를 보도했다.
 

인도의 대표적인 영어 일간지 힌두스탄타임스도 10일 “젊은이들은 1회용 컵처럼 사용되고 버려졌다, 화학물질을 처리하며 병을 얻은 삼성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높였다”는 제목으로 AP통신 기사를 인용보도했다. 인도 노이다와 첸나이에는 삼성전자 공장이 있다. 

이외에도 BBC 비지니스는 11일 “삼성은 노동자에게 독성물질 정보를 차단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부인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삼성전자 측의 해명과 AP통신의 기사를 모두 소개했다. 제목만 보면 삼성 측의 해명에 가깝지만 기사에는 양측 입장이 모두 담겼다. 

▲ 8월10일 알자지라 영어채널 보도
국제노총, 성명으로 한국정부 비판까지 

이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미국의 소셜뉴스사이트 레딧(Reddit)에서 해당 소식이 올라가자 1000개에 가까운 댓글이 달렸다. AP통신 페이스북에는 “방금 삼성 폰을 던졌다. ‘영업비밀’을 노동자의 직업 안전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상품을 쓰기를 거부한다”는 등의 댓글이 달렸다. 

트위터아이디 ‏@MakeMana******은 “삼성 제품의 광팬이었으나 오늘 그 회사에 대한 내 입장을 다시 생각 중”이라고 썼다. 트위터아이디 @frame******는 “니네 공장에서 사망한 76명의 노동자들에게 보상하라. 너희는 그들의 삶보다 이윤을 우선시했기 때문에”라고 썼다. 

국제노동조합총연맹(ITUC)은 한국 정부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샤란 버로우 사무총장은 10일 삼성의 노동환경을 “현대적 기술 뒤에 숨은 중세적 여건”으로 규정하며 “(한국 정부가) 기업에게 소송당할 것을 두려워한다면 기업의 탐욕이 통제 불가능 상태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샤란 버로우 사무총장은 “한국 정부가 노동자들을 돌보지 않고 계속해서 기본권을 부정한다면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에 속한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영국의 테레사 메이 총리가 행동해야만 한다”고 썼다. ITUC는 세계 최대 노조 연합체로 1억 7600만 명이 가입해 있다. 

▲ AP통신 기사와 관련한 한국언론 보도.
삼성전자와 고용노동부 해명만 받아 쓴 한국언론

그러나 이같은 내용은 한국 언론에서 찾기 어렵다. AP통신의 삼성반도체 직업병 기사가 세계 각국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현상은커녕 AP통신의 기사조차 인용 보도 되지 않았다. ITUC 성명은 경향신문 국제면에서만 보도됐고 고발뉴스가 AP통신 기사를 인용보도했다. 

대신 한국 언론은 삼성전자와 고용노동부의 반론만 충실하게 보도했다. 삼성전자가 12일 공식 뉴스룸에 “기사에서 언급된 영업비밀에 대한 반올림의 문제제기는 이미 오래전에 제기됐던, 새로울 것이 없는 일방적 주장”이라는 해명을 올리자 전자신문과 뉴스핌, 이데일리 등은 이를 그대로 보도했다.

이어 15일 고용노동부가 AP통신 보도가 사실과 달리 ‘왜곡됐다’는 보도해명을 내놓자 이 역시 경제지를 중심으로 기사화됐다. 연합뉴스,  서울경제, 데일리안 등은 “정부 ‘삼성반도체 관련 AP통신보도, 심각한 사실 왜곡’ 공식 반박” 등의 제목으로 기사를 냈다. 마치 AP통신이 심각한 오보를 낸 것처럼 읽힌다.

이에 대해 임자운 반올림 변호사는 “삼성과 고용노동부가 반박 자료를 내자 한국 언론들은 그제야 반응을 보였다”며 “문제는 삼성과 고용노동부 반박이 완전히 거짓된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가령 삼성전자는 AP기사에 사례로 제시된 자료들이 산재신청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법원의 판단과 다르다. 
 
삼성전자와 고용노동부 반박 이후에도 AP통신은 기사를 ‘거의’ 수정하지 않았다. 삼성전자의 해명 이후 AP통신은 “회사가 제공하는 보상계획이 의료비 일부라고 잘못 보도했다”며 “해당 보상계획은 의료비 전체를 보장한다”고 한 문장을 정정했다. ‘Some’이라는 단어만 삭제했다. 고용노동부의 해명 요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임 변호사는 “한국 언론들은 수십 건의 관련 기사를 내면서 어느 기자도 삼성과 노동부의 반박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취재’하지 않았다. 그냥 받아쓰기만 했다”면서 “이들을 과연 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AP통신 기사는 여전히 그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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