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휘장 문양과 관련, 중앙일보 정운현기자의 반론문(28호 참조)에 이어 KBS 박태서기자가 정기자의 글에 대한 재반론문을 보내왔다. 이에 따라 본지는 이번 지상논쟁을 계기로 일제 잔재에 대한 활발한 연구와 고증작업이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먼저 <미디어 오늘>에 실린 정운현기자의 반박문을 읽고 자료수집과 고증을 위한 그간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본인의 보도가 논쟁과 토론이 전무하다시피한 현 언론계의 풍토엣 하나의 자극제가 되게 해줬다는 점에서 정기자의 문제제기를 고맙게 생각한다.

두 차례에 걸친 지상논쟁을 통해 이번 사안의 핵심적인 쟁점이 어느 정도 압축됐다고 본다.

1. 본인이 조선총독부(현 국립중앙박물관)와 경성부청사(현 서울시청사) 건물 안에서 발견되는 연꽃문양의 숨은 의미가 ‘제국주의의 번성과 한반도의 영원한 지배’라고 주장한데 대해 정기자가 구체적인 증거자료를 제시하라고 요구한데 대해….

먼저 이 요구에 답하기에 앞서 본인은 정기자의 역사인식의 틀에 허점이 있다고 본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에 혼란이 온 게 아닌가 할 정도다. 정기자는 아마 연꽃 문양이 일본의 주술적인 문양이며 총독부와 서울시청에 새겨진 것이 영속적인 식민지배를 기원한 것이라는 직접적인 문헌이나 증언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이는 발상자체가 성립되기 힘든 것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보자.

삼국시대 의복유행을 우리는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당시의 고분과 벽화 등에서 드러나는 흔적(근거)을 통해 당시를 유추하는 게 아닌가. 정기자의 주장대로라면 당시를 산 사람들을 관에서 다시 끄집어 내 ‘우린 이러이러한 옷을 입고 살았다오’라는 증언을 받아내야 한다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 일본은 제국주의를 발전시키고 당신네 조선을 영원히 지배하기 위해 이 문양을 새겨놓았소’라는 증언을 확보하라는 말인가.

정기자의 주장대로라면 현존하는 역사는 거의 써먹을 게 없고 아울러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12·12나 5·18이 정권 찬탈을 위한 쿠데타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쿠데타의 주역들이 진실을 실토하는 어느 문헌이나 증언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말하지만 본 기자의 보도는 구체적인 사실들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차장 도출한 결론이었다.

그럼, 연꽃문양과 관련해 먼저 본 기자가 내세우는 것은 왜 총독부에 연꽃 문양이 새겨져 있느냐이다. 일제가 북악산에서 출발해 총독부, 그리고 서울시 청을 ‘대(大)’‘일(日)’ ‘본(本)’글자 형을 본따 지었다고 알려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총독부는 일제의 침략야욕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건물이다. 그저 단순한 토목공사의 결과 지어진 것이 아닌 총독부 건물, 일제의 본심은 물론 ‘이땅을 그들의 영원한 노예의 땅,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본 기자가 이미 밝혔듯이 연꽃문양은 동아시아에서 오랜 기간 전통적으로 사용돼온 문양인데, 분명한 사실은 총독부와 같이 다양하게 표현된 연꽃문양은 그 유례가 없다는 것이다. 기본문양형을 건물의 중심이 되는 2층 중앙홀과 첨탑돔에 장식한 일본은 변형된 형태의 연화문을 바닥은 물론 천장, 창틀, 액자, 출입문, 기둥 등 곳곳에 장식해 놓았다(따라서 정기자가-일반적으로 숭배의 대상은 시선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게 상식이다. 일본이 그토록 중시한 문양이라면 바닥에 새겨 놓지 않고 천장이나 벽에 장식했을 것이다-고 말한 것은 이 점을 간과한 것으로 스스로 오류를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일본은 단 한군데 일(日)황족이 기거하라고 만든 3층(지금은 관람객 휴게실로 사용되고 있다) 방 안에는 연꽃대신 황실문양인 국화를 장식해 두었다. 여기서 일본의 은밀한 염원을 간파할 수 있다. 일본은 그들의 야욕을 쉽게 드러낼 수 있는 황실문양 국화는 황실용 방 안에만 사용했고 그 이외의 곳에는 온통 연꽃을 장식해 둔 것이다. 이는 연꽃이 일단 동아시아에서는 익숙한 꽃이어서 거부감을 덜 주게 되리라는 생각에서 비롯됐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일본은 태양의 자손이라고 자처하는 바, 태양의 꽃인 연꽃을 새겨놓아 그들의 야욕을 은밀히 구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2.정기자 요구한 구체적인 증거자료로 사용될만한 문헌도 제시하겠다.

왼쪽 사진은 일본 나고야성 박물관이 개최한 풍신수길전(特別企劃展-‘秀吉 の 朝鮮侵略’. 1995년 9월30일부터 11월5일까지)에 출품된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의 갑옷이다(소서행장의 후손인 小西惇子가 박물관에 이 갑옷을 기증).

가슴부위의 문양이 현재의 서울시 휘장과 흡사함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가 가슴에 이 문양을 새겼다는 것은 연꽃이 정기자의 주장대로 단순한 장식용이 아니라 이 문양 속에 일본인들이 신봉하는 하나의 주술 신앙적 요소가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가깝게는 태평양 전쟁에서 많은 일본 공군조종사들이 집안대대로 내려오는 주술적 내용의 부적이나 속옷(훈도시)을 소지했다는 사실도 일인들의 뿌리깊은 주술선호성향을 반증한다. 이런데도 정기자가 문제의 연꽃문양이 단순 장식용이라는 강변을 계속할 것이냐고 묻고 싶다.

또 하나 연꽃이 새겨진 위치와 시기도 문제가 된다. 총독부 건물 안에서 발견되는 변형되는 형태의 연화문-서울시 휘장 형태와-은 불행하게도 서울시청 청사 안에도 똑같은 위치에서 발견된다. 총독부 중앙현관입구와 시청청사 중앙 현관입구에는 서울시 휘장 형태의 문양이 나란히 각각 세 개씩 새겨져 있다(사진 참조). 본인이 현 서울시 휘장이 총독부에서 발견되는 문양을 모방해 제작됐다고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아울러 모방 제작된 이 문양이 해방직후 문양분야에 대한 연구가 일천하기 짝이 없던 당시의 혼란한 사회 분위기하에서 서울시 휘장으로 그대로 채택됐다는 것은 이미 밝힌 바 있다. 패망한 일제가 자신들이 지배했던 조선이 해방은 됐지만 자기네가 도안한 문양이 조선의 수도 서울시휘장으로 사용되게 됐다는 사실에 현해탄 건너에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은 당연하다. 결국 서울시 휘장이 서울의 8대 명산을 나타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총독부와 서울시청안에 일본이 남긴 문양과 같다는 점은 분명히 짚고 넣어가야 한다고 본다.

또 하나 서울시와 관련해 굳이 일제 잔재를 언급한다면 일제가 지은 서울시 청사를 언급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라고 주장한 정기자의 글은 차라리 읽지 않은 것만 못하다. 서울시청 건물 자체의 일제잔재 논란은 이미 구문이 돼 버린지 오래 아닌가. 마지막으로 본인이 이번 사안을 통해 터득한 소중한 교훈 한 가지. 정기자가 확인 작업없이 쓴 글로 예기치 않은 피해를 입은 본 기자는 앞으로 취재의 보도시 취재원의 입장과 의견을 더욱 상세히 확인하도록 해줬다는 점에서는 정기자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이번 논쟁을 계기로 관련 학계에서 보다 진지하고 깊이 있는 고증작업이 치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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