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만입니다.” 34도에 달하는 폭염이 한달여 지속된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본관 앞에서 전국의 KBS 지역총국 기자들이 모여 비상총회를 열었다. KBS 전국기자협회 비상총회는 2003년 정연주 사장 때 이후 처음이다. 당시는 회사가 오랜기간 지역 신입기자들을 뽑지 않아 들고 일어났다. 오늘 열린 2016년 비상총회는 사측의 부당한 지시에 맞선 기자들이 징계위기에 몰렸기 때문에 열렸다. 안건은 13년 전 총회 때보다 더 후진적인, 군사독재 시절을 방불케했다.

지난달 KBS 대구방송총국 기자들은 ‘성주에 외부세력이 개입했다’는 리포트 제작 지시를 서울 본사로부터 받았으나 거부했고, 이 같은 지시가 부당하다며 반발했다. 이후 KBS 본사가 대구총국 기자 등을 대상으로 특별감사를 실시해 기자 4명이 징계 위기에 처했다. 

▲ KBS 전국기자협회 회원들이 21일 KBS 본사 앞에서 비상총회를 열고 '성주에 외부세력이 개입했다는 리포트 제작지시를 공개한 기자들에게 징계를 추진하는 사측을 규탄했다. 사진=금준경 기자.
결과적으로 외부세력이 폭력집회를 주도했다는 프레임은 아직까지 사실로 밝혀지지 않았다. 이영섭 KBS 기자협회장은 발언을 통해 "당시 경찰이 외부세력이 폭력을 주도했다는 채증 사진을 갖고 있지 않았고, 그들이 극단적인 행동을 했다는 정황도 없었다. 이걸 갖고 리포트하는 건 말도 안 됐다"고 증언했다.

이영섭 KBS 기자협회장은 “당시 외부세력이 확인 안 된다는 보고가 계속 올라왔다.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외부세력이 있다고 언급한 이재복 성주사드배치 저지 투쟁위원회 위원장의 멘트를 받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이 전화를 받지 않아 취재가 안 된다고 하자 담당 기자가 경위서를 써야 한다는 압박이 이어졌다. 이영섭 기자협회장은 "이런 경우가 어딨나”라고 꼬집었다. 

“너희가 현장에 나가면 현장 목소리에 치우쳐지기 마련이다. 그것이 선인줄 아나?” 이하늬 KBS 대구방송총국 기자가 사측으로부터 들었다는 말이다. 이하늬 기자는 “우리는 현장의 목소리가 옳다고 이야기한적 없었다”면서 “현장 상황을 토대로 우리가 판단을 내린 거고, 그게 윗선과 조율되고 합의되길 원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하늬 기자에 따르면 기자들의 저항이 시작되자 더욱 강한 압력이 내려왔다. “'태양의 후예' 10편 만드는 것보다 더 큰 규모의 피해를 입혀 놓고선 신변이 무사할 줄 아느냐”는 협박까지 들어야했다. 이하늬 기자는 “대구기자들이  한 일은 정반대다. 그나마 추락해가던 KBS의 자존심을 세워준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해사행위를 한게 아니라 저널리즘의 기본을 이야기한 것이다. ”

사드배치에 대해 정부 입장 위주로 전달한 KBS보도에 성주 주민들은 분노했다. 대구 KBS 기자들은 현장에서 ‘KBS 꺼져라’ ‘전기 못 빌려준다’ ‘KBS한테는 인터뷰 안 해주겠다’ 등 격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 KBS 전국기자협회 회원들이 21일 KBS 본사 앞에서 비상총회를 열고 '성주에 외부세력이 개입했다는 리포트 제작지시를 공개한 기자들에게 징계를 추진하는 사측을 규탄했다. 사진=금준경 기자.
기자들은 사측의 외부세력 보도지시를 '보도지침'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KBS 보도본부는 지난달 25일 “정상적인 취재, 제작 과정을 ‘보도지침’ ‘윗선의 지시’ 등으로 왜곡하고 마치 사실인양 외부에 유포하는 행위에 대해 사규에 따라 단호히 조치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성재호 전국언론노조 KBS 본부장은 “말도 안 되는 지시를 계속 강제하면 그게 지침”이라며 “우리는 편성규약대로 일했을 뿐이다. 사측의 행위야말로 명백한 편성규약 위반”이라고 강조했다. KBS 편성규약 5조4항은 실무자의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줘선 안 된다는 내용이다.

▲ KBS 전국기자협회 회원들이 21일 KBS 본사 앞에서 비상총회를 열고 '성주에 외부세력이 개입했다는 리포트 제작지시를 공개한 기자들에게 징계를 추진하는 사측을 규탄했다. 사진=금준경 기자.

이날 집회에는 이른바 ‘외부세력’이 참가하기도 했다.

YTN 해직기자인 조승호 방송기자연합회 정책위원장은 “KBS구성원도 현직 기자도 아닌 진정한 외부세력으로서 말씀드리겠다”면서 “외부세력이 바라보는 KBS상황은 갑갑하다”고 말했다. 

그는 2년전 세월호 참사 때 MBC와 이번 사태가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2년 전 세월호 참사 때 현장에 있던 목포 MBC기자들이 아직 구조가 완료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그런데 서울MBC는 전원구조 오보를 냈다. 이후 우리는 ‘기레기’ 소리를 듣게 됐다. 현장에서 취재한 기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신중을 기했다면 우리 언론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KBS가 2년 전 MBC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MBC는 어떻게 됐는가.”

▲ KBS 전국기자협회 회원들이 21일 KBS 본사 앞에서 비상총회를 열고 '성주에 외부세력이 개입했다는 리포트 제작지시를 공개한 기자들에게 징계를 추진하는 사측을 규탄했다. 사진=금준경 기자.
부당징계 압력은 대구방송총국 기자들만 받은 건 아니다. KBS 정연욱 기자는 기자협회보에 이정현 청와대 전 홍보수석의 보도개입 논란이 불거진 이후 지속된 KBS의 보도 침묵을 비판했다가 제주로 발령받았다. 기자협회보 발행인인 정규성 한국기자협회장 등은 지난 20일 KBS에 항의방문을 했으나 문전박대 당하기도 했다. 

정규성 한국기자협회장은 “기자협회 회원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 개진할 수 있는 기자협회보에 글을 썼다는 이유 때문에 제주도로 인사조치 됐다”면서 “진실보도, 사실확인을 무시한 채 왜곡보도를 강요당하고, 현장기자의 의견이 무시당하고, 징계와 특별감사라는 이름으로 기자들을 억압하고 있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비판했다.

이날 KBS 기자들은 성주 군민들의 목소리를 담은 영상을 제작해 총회 현장에서 상영했다.  주민들은 인터뷰에서 “경찰도 확인 못한 게 외부세력이다. 이제 거의 TV를 안 본다. 너무 왜곡보도를 하니까.” “세상물정 잘 모르시고 선량한 사람들한테 종북이라고 그러고 빨갱이라고 그러고.” ”우리 입장을 대변해주는 언론은 없었다.“ 등의 발언을 쏟아냈고, 그 영상에는 ‘40일간의 촛불집회, 언론은 없었다’는 자막이 채워졌다. KBS 기자들이 만들었지만, KBS 뉴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