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6일 노태우씨의 구속 이후 온 국민을 분노와 경악에 휩싸이게 했던 비자금 정국이 김영삼대통령의 APEC 정상회담 참가, 민자당 당명 개칭, 김대통령의 5·18 특별법 제정 지시 등의 카드를 내세우면서 호시탐탐 국면 전환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여권의 의도대로 급랭하고 있다.

이에 따라 방송도 대선자금으로 까지 비화될 경우 현 정권에 엄청난 타격을 줄 비자금 보도량을 급격히 줄여 궁지에 몰린 민자당이 위기에 서 탈출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하고 있다. 이는 작위적인 3당 야합을 통해 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들의 가슴에 못을 박고 온갖 비리로 얼룩진 6공화국이 정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주도적인 역할을 한 김영삼 대통령의 부도덕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노씨의 비자금 사건을 노씨 개인의 치부를 위한 뇌물사건으로 왜곡, 축소함으로써 정치권과 재벌 사이에 얽힌 부패 구조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청산되기를 원하는 국민들을 우롱하는 언론의 직무유기라 아니할 수 없다.

노씨가 구속되던 16일까지 거의 매일 머릿기사로 올라 비자금 진상 규명에 외형상으로나마 모양새를 갖췄던 비자금 관련 보도는 노씨 구속 다음날인 17일부터 김대통령의 APEC 외유 기사에 밀려 출국부터 귀국까지 나흘동안 톱뉴스의 자리에서 내려지고 꼭지 수가 현격히 줄어 들었다. APEC을 기점으로 전 방송사가 일제히 발을 빼기 시작한 것이다.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국회에서 노씨의 비자금을 폭로한 지난 10월19일부터 근 한달 동안 뉴스 시간의 대부분을 할애하면서 열띤 취재 경쟁을 벌였던 방송사들이 이처럼 갑자기 꼬리를 내린 것은 노씨의 비자금 사건이 대선자금으로 번지는 것을 두려워 한 현정권의 지시를 충실히 따른 결과라고 민실위는 판단하고 있다.

비자금 사건 초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달려 들었던 MBC의 경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청와대의 미움을 사서 강성구 사장이 반공개적인 외압에 의해 사퇴 표명을 했다가 다시 이를 번복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일어났다.이로 인한 편집 간부들의 위축된 정서는 뉴스 편집에 그대로 반영돼 11월17일 KBS가 비자금 관련 리포트를 15꼭지 내보낸 반면 MBC는 리포트 11꼭지에 앵커멘트 3개로 줄여 방송했다.

18일 비슷한 분량을 보도했던 양사는 19일 MBC가 리포트 3개와 앵커멘트 1개, KBS가 리포트 7개와 앵커멘트 1개로 심한 편차를 보였다. 이러한 경향은 MBC의 강사장이 사퇴를 표명한 20일에는 더욱 심화돼 MBC가 비자금 관련 리포트를 5꼭지 내보낸 데 반해, KBS는 12꼭지를 방송해 MBC에 대한 정부 통제의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를 반증하고 있으며 권력이 기침만 하면 지레 수그러드는 언론의 기회주의적인 속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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