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의‘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은 결과적으로 정부의 언론통제정책의 큰 가닥을 잡아주었다. 정부는 언론윤리위원회 소집에 불참한다는 답신을 보낸 언론사들을 각개격파하는 한편, 각종 특혜를 통해 언론사주들을 유인하는 양면작전을 펼쳤다. 비판적인 언론사에 대한 각개격파는 경향신문의 강제 공매처분으로 시작되어 조선일보의 코리아나 호텔 건축에 대한 상업차관 융자로 이어진다. 이러한 각개격파의 마지막 장을 장식한 것이 바로‘신동아 사건’이었다.

1968년 12월 6일 서울지검은〈신동아〉의 홍승면 주간과 손세일 부장을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하였다. 신동아 68년 12월호‘차관’특집과 이보다 두달 앞서 나온 10월호의〈북괴와 중소분쟁〉이라는 글 내용을 문제삼은 것이었다.

‘신동아 사건’의 발단은 12월호 차관에 관한 기사가 재벌의 비리와 정치자금 조성 등 박정권의 차관도입 상황 내막을 파헤친 데 있었다. 그러나‘차관’기사의 내용을 따져 보았지만 허위사실이 발견되지 않자 다른 꼬투리를 찾다가 들고 나온 것이 10월호에 게재된 조순승씨의 논문〈북괴와 중소분쟁〉의 한 구절이었다. 당시 미주리대 교수였던 조순승씨의 논문 중“45년의 남만주 빨치산 운동의 지도자 김일성과 그의 추종자들은 소련태생이고, 소련서 훈련받은 한국인들과 함께 소련점령군을 따라서 북한에 들어 왔다”는 구절을 문제삼은 것이었다.

이 구절 가운데 남만주 빨치산운동의‘지도자’란 번역이 문제가 됐다. 영어 원문이‘leader’였으므로 사실 번역 자체에 잘못은 없었다. 이 문제는 필화사건이 나기 전에 거론되어 신동아 11월호에“빨치산 운동의 지도자라고 번역한 것은 공비의 두목이라는 말의 오역이었다”라는 정정기사를 게재함으로써 일단락됐던 것을 새삼 문제삼은 것이었다. 구속된 홍승면 주간과 손세일 부장은 3일만에 석방되었으나, 두 사람은 신동아사건의 부당성을 사설로 반박한 천관우 주필과 함께 타의에 의해 사퇴하게 되었다. 또한 발행인 겸 부사장인 김상만이 발행인직을 내놓았다.

신동아사건과 관련하여 동아일보사사는“정부당국이 동아일보사와 관련이 있는 기업체에도 압력을 가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본보와 전혀 관계없는 삼양사와 경방 등에까지 물리적 압력을 가중시켰다. 이 두 업체의 소유주가 본보 발행인과 친척관계였음을 감안하여 간접적인 탄압을 가한 것이다. 심지어 본사 발행인 소유의 주식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였다. 즉, 1965년에 본보 발행인이 인수받은 양영회(養英會)주식의 포기를 은근히 종용하였다. 또한 신동아의 자진폐간을 종용하였다.”

이것은 동아일보의 굴복을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정부가 언론의 마지막 보루인 동아일보를 굴복시키기 위해 전력을 투구한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여하튼 이‘신동아 사건’을 마지막으로 언론기업은 완전히 권력에 굴복하고 말았다.‘신동아 사건’은 적어도 언론기업 또는 언론사주가 권력에 완전히 굴복하게 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신동아 사건’은 동아일보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매체에서도 보도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정치문제화되어 국회에서 한바탕 논란이 벌어졌지만 이 또한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적어도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필화사건이 일어났을 경우 언론계의 그 사실만큼은 신속하게 보도했었다. 이처럼 모든 언론이‘신동아 사건’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는 사실은 한국 언론계 전체가 권력의 언론탄압에‘백기’를 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신동아 사건’은 1969년의 3선 개헌을 관철하기 위해서 권력이 언론의 마지막 저항의 보루를 격파한 의도적 사건을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한국의 언론기업인들이 동아일보를 마지막으로 완전하게 권력에 굴복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신문의 편집·제작권이 기자들의 손으로부터 경영자의 손으로 넘어가게 됐다.

‘신동아 사건’이 국회에서 거론될 때 이것을 지켜보던 당시 편집인협회 회장 최석채는 모든 사태의 발단을 신문이 편집인과 기자의 손에서 떠났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런 시점에서 언론의 자유가 외부로부터 침해를 받는다는 사실은 2차적인 문제라고 보고 언론이 대동 단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노조결성과 신문사의주식을 사원들도 갖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국가 대 언론의 대결 구도가 이제는 사주 대 언론인의 대결구도로 전이되고 있음을 예리하게 간파한 것이었다.

1964년의‘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에서 시작되어, 경향신문강제공매처분과 조선일보의 코리아나호텔 건축에 대한 상업차관 특혜를 거쳐‘신동아 사건’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박정권이 비판적인 성향을 지닌 언론사들을 하나씩 각개격파함으로써 언론의 비판적 성향을 누그러뜨리는 과정인 동시에 언론사주들을 정부의 통제권 내로 유인하는 과정이었다. 최석채 당시 편협회장이 갈파하였듯이, 이제 언론사주와 언론인 사이의 대결구조로 전이된 언론계 상황은 1970년대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한 언론민주화운동이라는 제2라운드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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