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갈리아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황선영님이 관련 기고를 보내주셨습니다. 후속 기고와 반론을 환영합니다. - 편집자주

메갈리안 해고 논란? 이건 여성혐오의 문제가 아닙니다 / 이선옥.
남성들이 "내가 언제 여성을 혐오했냐"고 묻는 이유 / 장슬기.
남성혐오라고요? 남 탓할 때가 아닙니다 / 이선영.
"넥슨 사태는 자본에 의한 페미니즘 탄압이다" / 김민수. 
"너 메갈이야?" 이 한 마디로 모든 걸 덮을 수 있나? / 김영환.
"메갈리아는 남성 혐오가 맞습니다"/ 박성호.
'페미나치'라고? 왜 ‘기울어진 운동장’을 못 보나 / 전지윤.
여성 78%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혐 범죄", 남성은 48% / 금준경.
남혐의 당위 인정하지만 혐오의 악순환 피할 수 없다 / 김시습.
반여성주의에 굴복한 정의당, 퇴행을 넘어 자멸로 가나 / 홍명교.
메갈리아 논란에 대해 알아야 할 8가지 불편한 진실 / 박가분.
여혐도 나쁘지만 남혐도 나쁘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 이정환.
메갈과 메갈4를 구분하는 것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 / 리 콜린.
나는 여성으로서 메갈리아를 거부한다 / 한혜수.
‘메갈리아 논쟁’, ‘불균형 시정의 불균형’에 빠졌다 / 한윤형
메갈리아가 실패했다고 말하기는 이르다 / 김성준
메갈리아에 대한 낙인과 배제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 황성필
미러링의 원조는 메갈리아가 아닌 일베다 / 박가분
'재기한다'는 건 도대체 무엇에 대한 미러링인가 / 최봉환

누군가 면전에서 나의 외모를 비하하는 말을 했다고 하자. 농담이든 아니든 이런 무례에 대해선 수많은 대응이 가능하겠지만, 어쩌면 "그러는 넌?" 이라는 짧은 말이 '입을 다물고 다시는 열지 않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수도 있다. 이렇게 짧고 강렬한 면박은 때에 따라 상당히 효과적이고, 사회생활에서 꼭 필요한 스킬일지도 모른다(나는 평소에 사람들이 좀더 무례하고 좀더 뻔뻔한 자아를 내면에 숨겨놓았다가 필요에 따라 끄집어 내는 게 좋다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이런 화법이 모두에게 공공연하게 권장될만한 것인가?라고 한다면 다른 문제가 된다. 외모 비하는 누구나 하지 말아야 할 무례한 행동이지 발화자의 자격을 따질 성질의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네가? '라는 어조의 반격은 그 상황에 맞물려 힘을 발휘할 수도 있겠으나, 상당히 제한적이다. 첫째로 그건 '외모는 평가의 대상'이라는 기준을 긍정하는 것이며, 다음으로는 상대방이 자신의 외모에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상당한 자신감이 있다든가, 때로는 상대방과 나의 사회적 관계에 따라 - 예를 들어 무슨 말을 들어도 반박을 꺼낼 수 없는 '갑'의 위치라거나- 처음부터 ‘한정된’ 대상에게만 쓸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위에 쓴 것은 여성 혐오의 문제와 그에 대항하는 방법으로서 페미니스트 선언이 새롭게 활기를 얻은 최근 이태 동안, 인터넷의 여론전에서 불거진 몇개의 의문점에 대한 하나의 예시이다.

다른 말들을 하기 전에 분명히 해야 할 지점은 있다. 지금 '페미니즘' 이라는 말이 논쟁적 주제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이 사회에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만연하고,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여성에게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약자들이 힘을 합쳐 차별과 억압에 반대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갈등의 증폭이나 문제가 아니라 발전이며 우리 모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게다가 이 문제가 공론의 장으로 튀어나왔을 때, 지난 세대 우리 모두가 공공연하게 합의한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지점들에 대해 얼마나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사고가 만연해있는지 새삼 확인하게 되면서 경악했던 순간들도 생생하다.

나는 운이 좋게도 페미니즘이 사회 문화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대에 20대를 통과했다. 가부장적, 전체주의적 사회가 주는 억압에서 제도적으로나 인식적으로 점차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품을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그때는 이십여 년이 지나 ‘그런 시절도 있었지’라는 회고로 다시 새기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평등이 나에게 손해가 된다면 거부할 수도..'라는 비열한 곁눈질이 어느 사이에 공론장에 파고들어, 적극적인 차별을 찬성하는 당당한 목소리로 둔갑하고 있었다. 이 파열음이 커지면서 여성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멸시, 차별, 부당한 책임 전가는 어느새 당연시되고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와 같은 단어는 저주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거기에 인터넷 환경의 발달이 여성에 대한 혐오를 축척하고 재생산하는데 큰 축을 담당했다. 나는 90년대에 나왔던, 인터넷이 젠더를 극복할 것이란 전망을 기억한다. 성별을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않는 인터넷에서 고정된 사회적 성역할을 뛰어 넘어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예측. 20년 사이 기이할 정도로 인터넷은 가부장적, 억압적인 사회의 질서를 확대, 재생산하며 현실은 이 같은 순진한 기대를 비웃고 말았다,

'된장녀, 김치녀'로 표상되는 여성 혐오, 성적 대상화라는 폭력을 피해 인터넷 세상에서 여성들의 목소리는 폐쇄된 공간을 찾아 들어가며 점차 움츠러들었다. 메갤의 출현과 그 '화력'을 지원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나타난 것이 이상한 게 아니라 이제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 이상한 것이었다. 그런데 표면적으로 나서지 않았을 뿐 늘 있었던 목소리들, 들리지 않았던 소리들을 생생하게 듣게 해 준 것 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놀라고 또는 분노하기까지 했다. 이 반응 또한 많은 것을 나타내고 있으며, ‘경악스러운 것’ 중에 한 가지다.

사실 '미러링'이라는 방법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상대방의 모순을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 그의 논리나 단어를 재배치 혹은 반전하여 전시하는 것은 일상적으로도 쓰거니와 소위 '키워'들에게는 상투적인 전법이다. 게다가 어떤 말들은 내용을 반박하기 앞서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는 것만으로, 즉 수치심을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것이 더 긴요한 효과를 낼 때도 있다. 거울은 있는 그대로를 비춰서 보는 사람에게 스스로 '알게' 한다.

또한 페미니즘은 그 자체로 ‘거울’의 역할을 갖고 있다는 것이 내 오랜 믿음이었다.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들이 겪는 부당함에 비추어 다른 약자들- 성소수자, 장애인,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강제로 탈락된 많은 계급적 약자들-의 처지를 서로서로 비추어 끌어올리며, 현실을 깨닫고 억압을 풀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런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메갈리아의 '거울'이 어느 한쪽으로만 먼저 기능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을 들었을 때,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인종주의와 계급차별의 뉘앙스를 거침없이 '페미니즘'에 접목시키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성소수자에 대한 비하를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정당화 하는 주장을 목격할 때, 지배와 피지배 계급의 억압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역전시켜 새로운 위계를 만드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단지 그것이 전복적인 농담의 영역이 아니라 진심으로 합리화하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당혹을 느꼈다는 것이다.

메갤과 메갈리안들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서, 이제까지 존재해왔으나 들리지는 않았던 목소리의 스피커로서 그 존재 의의가 있고 여기에 억압된 것들이 터져나오는 강력한 카니발로서의 기능도 겸하고 있다. 그러니 그 속에는 당연히 여러 층위들이 존재한다. 개중엔 메갤이 갖는 전복적 의미에는 관심이 없고 유희성 그 자체에 집중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문제는 어느 상황에서나 존재한다. 다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진짜 큰 문제를 빚은 것이다.

메갈리아가 사회적 현상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완결된 어떤 도식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어디에서, 왜 시작되었는지 나는 궁금하다. 그럴 필요성이 있는지도 궁금하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이야기를 할 때 그 속에 공론장에서 적절하지 않은 목소리도 있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메갈리아의 모든 것을 페미니즘의 성과나 온전함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어떠한 태도들이었다. 개인의 서사는 공적 발화를 거칠 때 다듬어져야 한다. 약자나 소수자의 입장이라고 해서 온전히 정의로운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메갈리아는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페미니즘은 해야 하는 것들은 있다. 대표적으로 맨 위에 제시한 예와 같은 것들이 있다. 메갈리아가 '개인의 입을 닫게'만드는 효과적인 전략을 연구한다면, 페미니즘은 '그것이 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가'를 제시해야 한다.

페미니즘이나 인권 문제, 성소수자 운동에 연대하기로 할 때 우리는 “그것이 공공선의 영역을 넓히는가?”를 중요한 설득의 근거로 삼아 왔다. 그것이 자칫하면 ‘일부의 이익’으로 몰릴 수도 있는 운동의 구호를 대중과 공유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노동에 대한 최소 임금이 확보된다면 내가 굶을 걱정이 없다. 장애인들의 이동권을 확립하는 것이 곧 나의 이동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가장 질 나쁜 범죄자의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라면, 당신의 것은 굳이 걱정할 필요도 없다.” 성별 간의 갈등 역시 서로 밥그릇을 뺏고 뺏기는 게임이 아니라, 공공선의 확장이라는 영역으로 볼 때 최소한의 설득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연대가 가능해진다고 믿는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사람들은 '진정한 페미니즘' 이야기냐고 냉소할지 모른다. 지금 이 시점에서 '진정한 페미니즘'이 어떤 의미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지는 잘 안다. 그러나 적대자들이 그 말을 오염시켰다고 해서, 우리가 그 말을 버려야 할까? 우리는 무엇이 진정한 페미니즘의 길인지 이야기를 계속해야 하고, 빼앗긴 말을 되찾아 와야 한다. 언어를 딱 잘라서 여기서 여기까지는 우리 편의 것, 저기서 저기까지는 적대자의 것이라고 계속 나누어 대다간, 우리의 가용 언어만 좁아질 뿐이다. 또 한편으로는, 최소한 이것은 전략의 문제일 뿐이라고, 본질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전략의 문제는 왜 중요하지 않은가? 대의가 확고하면 모든 방법이 자동적으로 정당화되는가?

이것이 '싸움'이라고 한다면, '싸움의 정당성'이 아니라 '싸움의 방법'이 쟁점화된 때는 도리어 적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질문이 발화자의 자격이나 의도의 순수함을 따지는 말들로 어느새 바뀌어 몇 사람의 입만 거쳐도 전혀 다른 이야기로 흘러가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문제는 메갈리아나 페미니즘이 갖는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인 집단 자체에서 아주 흔히 일어나는, 보편적인 문제였음에도 이것을 지적하는 말을 '여성이 하는 운동이라서 문제시하는 것이냐'로 '번역'되어 버리는 통에 문제의 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다른 이야기가 되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그래서 너는 이 운동의 대의를 의심한다는 말이냐'라는 질문만이 남았다. 이 운동의 정당성에 대해 의심한다고 전혀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이상하게도 이 질문은 모든 다른 지적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었다.

미러링의 방법이 갖는 한계는, 이 논쟁에 가장 최근 지점이기도 한 티셔츠 해고 논란 건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여성들은 혐오 표현을 일삼은 연예인의 퇴출을 요구했다. 허나 해당 연예인의 출연을 자제시키는데도, 혐오 표현에 대한 사회적 제재의 수준을 합의하는데도 실패했다. 이는 웬만한 압박으로는 기존의 보수적 분위기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것일 뿐, 메갈리아 또는 페미니즘의 방향성을 잘못 가져가서 실패한 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위의 사건에서 “혐오 표현에 대한 사회적 제재하는 수위”에 대해 논의와 합의가 오갔더라면, 뒤에 이어질 다른 사건들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소비자 운동의 방법을 접목시킬 때도 우려하는 지점이 있었다. 게임이나 기타 창작물에서의 성적 대상화와 여성 혐오를 질타할 때, "만일 더 많은 소비자가 성적 대상화/혐오 표현을 소비하겠다고 나서면 어떻게 할 것인가"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각 집단의 당위가 맞설 때 우리는 공공선의 영역을 기준으로 제시할 수 있다. "이는 소비자의 권리가 아닌 시민 윤리의 문제”였던 것이다. 허나 소비자로서의 당위를 내세우는 말들이 돌출되며 이 부분이 뒤로 밀려나는 동안, 똑같은 ‘미러링’의 방법을 내세우는 반격이 밀려왔다.

이것이 사회적 약자를 위한 투쟁이기에, 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공선이라는 말도 어떤 사람에게는 단지 멀게 느껴지는, 당위적인 말 몇 마디에 불과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존재의 안위에 바짝 다가선,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는 안전선일 수도 있다. 사회적 약자, 소수자일수록 직접적인 타격을 깊고 넓게 입을 수 있으며 회복조차 쉽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공공선을 '당장의 가시적 성과를 위해서는 조금 파괴할 수도 있는 성긴 울타리'로 보기에는 거기에 바짝 기대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피해는 아래로 흐른다는 것을 상기하고 나보다 아래에서 이 운동장을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까지도 '메갈'이나 '워마드'란 단어를 타깃으로 삼아 쌓이고 쌓인 구조적 모순을 회피하고 간편하게 면책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뻔뻔한 얼굴들을 직면하다 보면, 우리는 이 '싸움'을 더 크게, 오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분명히 든다. 공공선의 구축은 굴복이 아니라, 저항을 계속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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