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에 대한 신문의 보도 방식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어떤 하나의 정답도 공식도 있을 수 없다. “하나의 정답을 찾던 시대는 지나갔다. 지금은 하나 아닌 수천 개의 정답이 가능한 시대이다”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정답이라는 것이 역사상 검열의 방식으로 진리를 독점하려는 독재권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는‘하나의 정답 추구’를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도덕적일 수 있다.

신문의 대중문화 보도 방식에 이 태도를 적용할 경우 우리는 수십개, 아니 수백 개의‘방식들’을 가질 수 있고, 또 그 방식들이 제각각 정당한 고집과 원칙을 가진다면 우리는 보도 방식 자체의 다양성에서 문화적 풍요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다양성 예찬에는 우리가 유념하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다. 무엇보다도 다양성은“아무거나 좋다”라는 무원칙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양성이 문화적 자원이 되는 것은 그것이 원칙의 다양성일 경우에 한해서다.

이를테면 파시즘, 인종주의 센세이션널리즘 같은 것은 원칙이 아니라 무원칙이며 다양성의 파괴이다. 모든 책임있는 신문매체가 보도 자료의 적합성 여부를 따지고 선택, 배제, 선별의 과정을 밟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무원칙주의가 신문의 모든 지면에서 경계돼야 한다면, 대중문화면이라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최근 몇 년, 특히 대대적 신문 증면과 함께 우리 신문들에게서 발견되는 가장 화려한 변화는 방송, 연예, 스포츠, 여가, 여행 등‘대중문화면’의 폭발적인 확대이다. 대중의 문화생활을 풍요롭게 할 지면이 많아졌다는 사실 자체에는 아무도 질투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이 폭발이 다양성의 폭발인가 아니면 다양성의 위축인가라는 점이다. 내가 보기론 그것은 아무래도 다양성의 위축에 더 가깝다. 보도 가치가 극히 의심스러운 잡동사니 기사들의 무원칙한 전시, 문화적 중요성과 가치에 대한 선별력의 빈곤, 대중적 취향에의 무분별한 추종주의가 거의 모든 신문의 대중문화면을 병들게 하고 있다.

우리 텔레비전 방송들이 시청률이라는 절대명령에 끌려 다닌다면 우리의 신문 대중문화면은 속악한 의미의‘대중주의’에 끌려 다닌다. 예컨대 신문이 드라마 등의 방송 프로그램을 기사화할 때의 보도 자세를 보면 방송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시청률’이 그 기준이다. 시청률 높은 것만이 신문에서도 보도 대상이 돼야 한다면 신문 역시 시청률의 노예를 면치 못한다. 시청률이 높다고 해서 반드시 저질의 것이 아니다. 신문이 유념할 것은 바로 이같은 선별과 안내, 보도와 평가이다.

대중문화면이 반드시 교육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문매체는 시민사회의 유지와 발전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이 점에서‘시민교육’이라는 이해관계를 대중문화면 구성의 정책적 원칙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 대중문화의 질이 한 사회의 정치적 성숙도와 직결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비자금 정국에서 드러난 우리 사회의 정치적 미숙성이 우리의 대중문화와도 깊이 관계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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