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옥님의 기고 '메갈리안 해고 논란? 이건 여성혐오의 문제가 아닙니다'와 관련, 독자 김민수님이 반박 기고를 보내주셨습니다. 미디어오늘은 논의의 확산과 발전을 위해 반론 기고를 환영합니다. - 편집자주.

사건의 전말

끔찍한 사건이 으레 그렇듯 사건의 발단은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넥슨이 운영하는 게임 클로저스의 신규 캐릭터 목소리를 녹음한 김자연 성우가 페이스북 메갈리아에서 제작한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개인 SNS에 올린 것이다. 그 후로 사태는 꽤나 빠르게 전개됐다. 만 하루만에 클로저스 측은 신규 캐릭터의 음성을 교체하겠다는 공지를 내걸었고, 여성의 목소리를 문자 그대로 짓뭉개버리려는 위협에 맞서 여러 페미니스트들과 많은 수의 웹툰 작가들은 김자연 성우를 지지하며 넥슨을 보이콧하겠다고 선언했으나, 남성우월주의자들은 김자연 성우에게 지지를 표명한 작가들의 목록을 만들고 이들의 작품을 보지 말자는 반동적인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한국웹툰산업협회 이사장은 메갈리아 유저가 용인되는 조직이라면 자신이 떠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쏟아냈다. 여전히 옳은 판단을 내리는 정당과 언론이 존재하기는 하나, 반동적인 세력의 메갈리아 혐오는 우려스러울 정도로 커져가고 있는 실정이다.

여성혐오적인 한국 사회, 잠재적 가해자인 한국 남성

우선 아주 기초적인 현실 분석부터 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여성혐오에 관한 논의가 작년 여름부터 이어져 왔지만 아직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사전에 규정된 의미를 떠나서 점차 한국 사회에서 그 의미를 확립해나가고 있는 여성혐오는 여성을 멸시하고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간혹 가다가 한국 사회에 여성혐오가 어디 있냐는 사람들이 (아직도!) 보이는데, 과연 이 사회는 여성을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고 있는가?

1. 영국의 한 경제 주간지가 발표한 유리천장 지수에서 한국은 OECD 국가들 중 최하위를 기록했고,

2. 여성의 임원 승진 비율은 남성의 20분의 1에 불과하며,

3. 애인에게 3일에 한 명 꼴로 여성이 살해 당하고 있으며,

4. 여성 노동자는 남성 노동자에 비해 63%에 불과한 임금을 받고 여남간 임금격차는 OECD 국가 중 1위에 달하는 등 통계 수치만 보아도 여성은 한국에서 결코 동등한 주체로서 대우받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교육부는 이성친구와 단둘이 있으면 성폭력이 발생하고, 여성은 좋은 배우자를 얻기 위해 외모를 가꿔야 하며, 여성이 데이트 비용을 내지 않아 데이트 성폭력이 발생하고, 거절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성폭력이 일어나고, 남성의 충동적 성욕은 당연하다는 후진적인 성 의식을 보이고 있다. 여성이 길거리에서 몸매 품평을 당하고 성희롱을 겪는 것은 예삿일로 치부될뿐더러, 취직하더라도 여성은 직원이 아니라 애 낳는 기계로만 취급받는다. 심지어는 단지 지정성별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대한민국의 중심지라는 강남에서 무참히 살해당하기까지 한다. 작금의 한국은 여성혐오 사회다. 이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여성혐오는 다른 것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숱하게 들어온 ‘남존여비’, 이것이 바로 한국 사회에서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왔던 여성혐오의 일종인 것이다. 지금도 예외는 아니다. 만일 이제는 여성혐오가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면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는 어째서 이토록 많고 그 이유에 대해 “여성은 신체적으로 연약하기 때문에 범죄를 당하는 것”이라는 인식은 어째서 이토록 팽배하겠는가? 여성이 연약하기 때문에 범죄의 피해자인 것이 당연하다는 것, 다시 말하면 여성에게 “그렇게 해도 되니까” 폭력을 가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한국이 여성혐오 사회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고, 또한 남성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여성혐오라는 구조는, 생물학적 성차와 무관하게 남성 젠더를 잠재적 가해자의 위치에 가져다 놓는다. 한국 남성 일반이 젠더 문제에 있어 잠재적 가해자라는 것은 우생학이나 생물학적 결정론에 기반한 것이 결코 아니고, 여남 간 젠더 권력 격차가 존재하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혐오가 작동하는 기제를 풀어 쓴 것에 불과하다.

메갈리아의 성격 규정

이번 사건을 평가하는 데 있어 가장 문제시되는 부분은 아마도 ‘메갈리아’라 불리는 집단의 성격일 것이다. 메갈리아를 페미니즘에 대한 낙인으로 사용함으로써 페미니즘 전체의 후퇴를 요구하는 남성우월주의자들은 메갈리아는 악 그 자체이니 이들이 제작한 티셔츠를 입어도 해고되어야 하고, 이렇게 부당한 대우를 받은 성우를 지지하는 사람들 또한 사회에서 매장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반동적인 언사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서는 메갈리아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이들을 메갈리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메갈리아라는 특정 사이트(www.megalian.com)에서 글이 올라오는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는 했지만, 이들은 그 뒤를 이은 커뮤니티들에게 미러링이라는 커다란 유산을 남겨주었고, 따라서 메갈리아의 가장 큰 특징은 미러링이라는 방법론이라고 규정해도 무리는 없다. 운동 방법론으로서의 미러링이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는지 검토한다면 이 분석을 메갈리아에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을 오랫동안 해온 사람이라면 남성중심적으로 구성된 온라인 공간에 얼마나 여성혐오적인 발언이 많은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 구체적인 예시를 구태여 들고 싶지는 않은데, 꼭 보고 싶다면 여성 연예인 사진이 걸린 네이버 연예기사의 댓글만 보아도 충분하다. 한국 사회에서 용인되는 그런 발언들이 여성혐오적이라는 것을 고발하기 위해, 메갈리안은 여성혐오 발언에 대해 그 성별만 뒤바꾼 패러디를 쏟아낸다. 바로 이것이 거울에 비춘다는 의미의 ‘미러링’인 것이고, 그 목적은 여성혐오 발언이 성별만 뒤바꾼다면 남성들에게 매우 폭력적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스스로 겪어보게 함으로써 한국 사회에 여성혐오가 만연함을 고발하기 위함이다. 여성혐오 사회에 미러링을 통해 메갈리안이 낸 균열은 해방의 공간으로서 기능하고, 이곳에서 우리는 혁명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미러링이라는 수단이 완전한 선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거울이 반사시키고자 하는 주된 축은 여남 간의 젠더 권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 만연한 다른 혐오들, 예컨대 성소수자 혐오, 노인 혐오, 아동 혐오, 장애인 혐오 등에는 민감하지 못하게 반응할 수 있고, 실제로 워마드의 분리 논쟁에서 보여졌듯 충분히 예리하지 못했던 미러링으로 이 사회를 구성하는 다른 혐오는 뒤집지 않고 소수자들에게 억압적인 방식으로 혐오발언을 재생산하는 사례가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메갈리아는 그들이 온전히 반사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여남 간 권력관계에 대한 미러링에 있어서는 결코 비판받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 소위 ‘남성혐오’라 불리는 그것들은 무차별적인 혐오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의에 가깝다는 말을 하고 있다.

메갈리아가 미러링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남성의 권리를 끌어내리는 방식으로 여남평등을 실현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메갈리아는 남성에게서 구타당하지 않을 권리, 강간당하지 않을 권리, 살해당하지 않을 권리를 빼앗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을 구타할 권력, 강간할 권력, 살해할 권력을 박탈시키려 하는 것이다. 그러한 권력이 남성으로부터 박탈될 때 비로소 여성혐오적 구조에 의해 남성에게 씌워졌던 잠재적 가해자라는 혐의가 풀리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의 목표이고, 따라서 여성혐오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대표적인 인물인 장동민의 하차를 요구하며, 여성에 대한 범죄를 미화한 맥심 잡지의 전량 회수를 실현시키고, “몰카 찍지 마세요”라는 광고를 지하철 역에 게시하며, 16년간 의지도 없던 경찰을 압박해 소라넷을 폐쇄시키고, 강남역 살인사건을 공론화시키고 피해자와 연대하는 메갈리아의 성격을 규정함에 있어 우리는 메갈리아가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집단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자본, 여성혐오, 그리고 넥슨

미성년자를 성희롱한 메이플스토리 2의 성우는 교체되는 데에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린 것과 비교하면, 이번 사건에서 하루만에 김자연 성우를 교체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비정상적으로 재빠른 조치였다. 혹자는 이전 사건의 경험으로 이번에 빨리 대처한 것이 뭐가 그리 불만이냐는 볼멘소리를 하지만, 이 사회가 여성혐오 사회라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성희롱은 그야말로 ‘사소한 일’이고, 넥슨이라는 기업의 이윤에 극히 미미한 타격만을 주기 때문에 느긋하게 처리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 이번 사건은 넥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급히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감히 여자가 권리를 주장한 무시무시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하루만에 성우를 해고하기까지 이른 것이다.

사실 여성혐오 혹은 여성억압은 계급사회에서는 매우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엥겔스는 그의 저서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그 어떤 위계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회에 잉여생산물이 생겨나면서 계급이 분화되는 동시에 여성에 대한 억압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류가 계급사회로 진입한 것은 못해도 수천 년 전의 일이니, 수천 년 동안 여성억압은 다만 그 구체적 형태만 바꾸어가며 존속해온 것이다. 현존하는 계급사회는 자본주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자본은 여성의 신체를 발견하고 그곳에 ‘여성’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사소한 신체적 차이를 인류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인 것마냥 부각시키고, 그것을 빌미로 여성이라 이름붙여진 이들에게 출산, 육아, 청소, 빨래, 요리 등의 대가가 지불되지 않는 가사노동을 전담시킨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자본은 사회적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피지배계급 남성에게는 여성에 대한 멸시, 여성에게는 자기혐오로 실현되는 여성혐오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만들어 피지배계급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게 된다.

아일랜드 출신의 노동운동가였던 존 도어티는 이렇게 말했다. “면 제조업에서는 여성의 노동을 남성과 차별하는 일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결과 이 부문에는 남자에게 생활 임금을 줄 수 있는 일자리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남성 노동의 가치를 산산이 무너뜨리기 위해 여성 노동을 격하하는 이런 지긋지긋한 관행을 뿌리 뽑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우선 과제가 되어야 한다.” 여성을 차별할수록 노동자 전체의 임금 수준도 하락하고, 따라서 이윤만이 그 운동 목적인 자본은 여성억압의 해소를 그다지 바라지 않으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운동에 있어 자본을 일시적으로 이용할 수는 있겠지만, 자본은 언젠가는 더 이상의 여성인권은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을 것이다.

한 사회를 지배하는 사상은 언제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 여성억압으로 이득은커녕 손해를 볼 것이 분명한 노동계급 남성들도 자연스럽게 여성혐오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이것이다. 클로저스 유저인, 사회에 의해 형성된 (그렇다고 이들에게 어떠한 책임도 물을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글 후반부 참고) 남성우월주의자들은 성우가 입은 페미니즘 티셔츠에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고, 유저들의 의식에 따라가기 위해 넥슨은 다시 여성혐오를 재생산하게 되었을 것이다. 얼마 전 크게 논란이 된 서든어택 2(이것도 넥슨 게임이다!)의 티저 영상에서 몸매가 부각되는 여성 캐릭터가 강남역 11번 출구에 등장하는 것만 보아도 넥슨이 여성혐오를 마케팅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넥슨이 페미니즘 티셔츠를 입은 성우를 교체한 것은 계급사회는 여성혐오를 부추기기 때문에 페미니즘은 지배계급인 자본가에게 그 자체만으로도 위협이 되기 때문이고, 여성혐오가 팽배한 게임 유저들로부터 외면받지 않기 위함이며, 따라서 이번 사건은 자신들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기획된 넥슨 및 자본에 의한 페미니즘 탄압이다. 넥슨이 김자연 성우와 선을 그었는데, 그가 앞으로 다른 배역을 맡아 녹음을 하고 돈을 벌 수 있을까? 이것은 단순한 성우의 교체가 아닌 해고와 마찬가지이고, 생산수단이 없어 노동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노동자인 김자연 성우의 목소리를 짓밟는 것은 곧 살인이다. 지금 넥슨은, 그리고 점차 넓은 영역으로 확대되는 메갈리아 혐오를 위시한 페미니즘 탄압은 여성 인권을 말하기만 해도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이나 다름 없다. 우리는 이러한 자본의 살해 협박에 맞서 페미니즘을 더욱 크게 외치며 메갈리아와 연대하고 투쟁해야만 한다.

누가 여남을 분열시키는가

누군가는 메갈리아는 그래도 대중을 분열시키려는 악이니 절대 연대하지 않으리라 다짐할지도 모른다. 혹은 메갈리아가 너무 과격해서 연대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메갈리아가 사방팔방으로부터 욕을 먹고 신상정보가 공개되어 살해 위협에 시달리면서까지 고발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여남을 분열시키는 것은 거울에 불과한 메갈리아가 아니라 대중 일반에게 스며들은 여성혐오다.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지들은 이번 사건을 이용해 페미니즘 이야기만 하면 메갈리아라는 낙인을 찍으려고 계획하고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탄압과 여성에 대한 억압이 심해질수록 노동자에 대한 착취도 증가할 것이고, 수천만 근로인민의 처지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이 탄압이 더욱 극심해지기 전에 우리는 서둘러 자본에 의한 페미니즘 탄압에 맞설 투쟁을 건설해야 한다. 그러나 여성혐오를 공기처럼 당연하게 느끼고 일상적으로 성차별적 발언을 하고 성희롱은 예삿일인 이들과 대체 누가 연대하고자 할 것인가? 지금 받는 임금의 63%만 받아도 만족할 이들에게까지 강요하지는 않겠다. 그렇지 않은 남성들은, 자신이 잠재적 가해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자신은 여성혐오자였음을 자각한 후에, 끊임없이 반성하고 자기검열하면서 탄압받고 있는 페미니스트들과 연대하고 자본주의라는 여성혐오적인 체제에 맞서자. 꼭 남성들만 반성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연대하지 않으면 우리를 착취하는 자본은 더욱 가혹해지리라는 것 뿐이다. 우리의 지적 게으름을 메갈리아의 탓으로 돌리지 말자.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