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옥님의 기고 '메갈리안 해고 논란? 이건 여성혐오의 문제가 아닙니다'와 관련, 독자 이선영님이 반박 기고를 보내주셨습니다. - 편집자주

왜 지난해부터죠?

이선옥의 말에 따르면, “이번 사태는 어느 게임 사이트에서 우연히 돌출된 성별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지난해부터 여성혐오를 주제로 벌어진 많은 문제들이 응집되어 터져 나온 필연적인 결과다.”

모든 사회적 문제는 역사적 맥락을 지닌다. 이선옥의 말마따나 우연은 없다. 이번의 사건들도 마찬가지일 터이며, 따라서 지금 시점으로 이어지는 사태들의 역사적 변화 과정을 추적하고 분석하는 것은 틀림없이 의미있는 작업이리라. 그런데 이선옥이 제시하는 ‘역사’를 살펴보며, 우리는 뭔가 하나 특이한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선옥의 역사적 기억은 왜 꼭 지난해부터 시작하는가?

남-녀의 성과 관련된 문제의 역사는 길고 길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와 동일하다. 4만년 전 구라파의 크로마뇽 인들까지 논하지는 않더라도, 보자, ‘왜 단군할아버지가 이 끔찍한 연교차와 습도를 자랑하는 한반도에 터잡으실 때부터’가 아닌가?, ‘종법제도가 강화되기 시작한 조선 후기부터’가 아닌가?, ‘인쇄기술과 언론제도가 도입된 구한 말부터’가 아닌가? ‘인터넷에 성차별적 표현이 만연하기 시작하던 90년대 후반’이 아닌가?

최소한 일베의 등장이나, ‘김치녀’ 같은 표현들이 넷상에서 무분별하게 쓰이던 시점이 기억의 기준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뭔가? 이 역사들은 왜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가?

‘지난해에서 올해’까지가 아닌 역사들을,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메르스 갤러리 출현 이전’의 역사를 이선옥은 마치 그리스도교 창조론자들이 백악기의 트리케라톱스 화석을 바라보는 그런 태도로 바라본다. 아니나다를까 이선옥은 위 인용한 단락에서 무슨 작년에 갑자기 빅뱅이 일어나, 혐오의 물리적 세계가 창조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선옥은 이렇게 앞의 시간을 뭉텅이로 잘라 내어, 특수한 서사적 효과를 창조한다. 이선옥의 서사에서 메갈리아, 소위 ‘넷페미니스트’들은 가해자이고, 기성 페미니스트들, 진보정당, 일부 작가들은 가해의 동조자들이며 또 다른 가해자들이다. 여기서 피해자들이 있으니 바로 그들에게 모욕당한 일부 남성들이겠다. 여기서 저 피해자인 남성들이 ‘동일한 보복’을 현재 가하고 있는 것, 그것이 이선옥이 사태를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다.

이선옥의 창세설화는 이러하다.

몸무게 100킬로가 넘는 거구의 남성 A와 50킬로를 겨우 넘는 왜소한 남성 B가 있다. 둘은 평소 서로 때리며 대화를 하는 습관이 있다. 어느 날 몸이 약한 B의 분노가 폭발했다.

B: 야, 때리지 마. 너무 아프잖아. 나쁜 놈아!
A: 너도 나 때리잖아. 지금도 때리고.
B: 야, 니가 내 덩치의 두 배인데 이게 무슨 때리는 거냐?!

이선옥의 픽션은 논픽션보다는 훨씬 양심적이며 정직하다. 여기서는 딱히 약자를 가해자처럼 묘사하지도 않으며, 폭력에 따른 약자의 피해가 훨씬 더 클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 메갈리아 후원 티셔츠를 인증한 여성 성우에 대해 네트즌들이 항의를 제기하자 넥슨은 하루만에 여성 성우를 교체한다고 밝혔다. 사진=김자연 성우 트위터

이상이 이선옥의 빅뱅이론의 특수효과이겠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서 이선옥이 ‘작년부터’라는 칼날로 잘라 놓은 저 시간을 약간만 확장해 본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설화는 다음과 같이 다시 쓰여야 할 것이다.

몸무게 100킬로가 넘는 거구의 남성 A와 50킬로를 겨우 넘는 왜소한 남성 B가 있다. A는 B를 때리는 것으로 의사소통을 해결했다. 어느 날 몸이 약한 B의 분노가 폭발했다.

B: 어떻게 너 나를 20만년 동안이나 때리니? 역사책에 기록된 것만 쳐도 4천년이야.
A: 어라? 니가 감히 내게 주먹을 휘둘러?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더 맞아라!
B: 야, 때리지 마. 너무 아프잖아. 나쁜 놈아!
A: 너도 나 때리잖아. 지금도 때리고.
B: 야, 니가 내 덩치의 두 배인데 이게 무슨 때리는 거냐?!

여기서 이선옥이 등장한다.

이선옥 : 폭력은 나빠! 야, 너 B. 왜 폭력을 써서 싸움을 만드니?
B: 무슨 소리예요? 쟤가 무작정 때리는데 그냥 맞아요?
이선옥 : 네가 먼저 때렸어. 내가 작년부터 봤는데 네가 먼저 주먹을 휘두르더라?
B: 작년에요? 내가 계속 맞다가 겨우 반항하기 시작한 게 작년인데요?
이선옥 : 아냐. 네가 잘못 생각하는 거야. 이 세계는 2016년 5월 29일 메르스 갤러리의 출현과 함께 창조되었어.

이선옥에 따르면 한반도의 혐오는 스즈미야 하루히, 아니 메갈과 함께 창조된 것이다. 아니, 아니, 혐오의 근원이 메갈리아이며, 다른 평범한 인간들은 그에 ‘동일한 방식으로‘ 저항할 뿐이다. 이선옥에게 메갈리아는 악의 창조주 데미우고로스이다. 지금까지 나온 모든 공식적인 기고며 논평 중에 이렇게까지 메갈리아를 과대평가하는 주장도 없을 것이다.

메갤 미러링 하세요?

이선옥의 주장들 중 경청할 만한 부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에 관해서나 논리적으로나 완전히 파탄상태인 글 속에서 간신히 헤엄치고 있는 그런 지푸라기들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회는 망했고 ‘스끼다시’조차 별로지만 커피는 맛있는 그런 횟집이라고나 할까.

앞서 살펴보았듯 이선옥은 4차원의 시공간을 뒤틀어 메갈리아를 문제의 원흉으로 지목했다. 이 법정에서 이선옥은 재판관이 되어 메갈리아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고 있다. 하지만 시간의 굴레 밖의 관찰자에게는 장대한 시간의 끝에 간신히 메갈리아가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여기서 메갈리아를 자기-정당화하는 바로 그 논리가 등장한다. 곧, ‘우리는 당한 것만큼 갚아주는 것이다’.

천지창조의 문제는 여기서도 좀 심각하게 드러난다. 어째서 남성에 대한 여성의 보복은 정당하다고 일언반구도 말하지 않으면서, 어째서 그 반대에는 ‘똑같이 행동했으니 괜찮아 데헷’이라는 변명이 장식되는가? 남성이 보복으로 때리는 건 괜찮고 여성이 보복으로 때리는 것만 나쁜가? 법률도 먼저 원인을 제공한 사람을 정당방위자로 인정해 주지는 않는데 말이다. 이선옥은 둘 다 똑같은 ‘혐오’라고 말하면서 대접에는 천지차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이선옥과는 달리 그 혐오는 똑같지 않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남성의 혐오와 여성의 혐오에 역시 다른 대접을 요청할 것이다.

메갈리아 사이트의 ‘공격적인’ 글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남중생을 바라보는 여우의 솔쯕한 심정’ 같은 것은 남초 사이트의 패러디고 풍자다. 여기에서 멈춘다면 저 소위 ‘미러링’은 봉산탈춤 같은 일종의 가면극에 그친다. 하지만 ‘한남충 다 죽었으면’ 같은 주장들은 실제의 감정의 표출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으며, 단순한 풍자로 여기기는 어려워진다.

적대는 풍자보다 확실히 더 문제적이다. 메갈리아의 후반으로 갈수록 - 메갈리아 사이트(http://megalian.com/)는 현재 거의 죽은 곳이나 다름없고, 관리도 제대로 안 되는 상태이다 - 풍자보다는 적개심의 솔직한 표현이 더 지배적이었다. 풍자는 어지간하면 용인하여야 하겠지만, 적대도 그러한가? 그리고 적개심은 ‘혐오’인가?

이선옥은 여기서 혐오의 정의에 대한 이중적 기준을 보인다. 일상생활에서 혐오란 그저 적극적으로 싫어하는 감정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성혐오, 외국인 혐오, 장애인 혐오, 또는 그에 대한 혐오발언을 이야기할 때의 혐오란 그런 단순한 의미와는 다르다. 실제 약자/소수자 집단에 대한 현실적 공격이나 차별을 예정하는 발언이 곧 혐오다.

앞서 말한 두 혐오는 다르다. 그리고 여성은 남성에 대해 전자의 혐오는 할 수 있어도 후자의 혐오는 할 수 없다. 어떤 발언에 있어 발화자의 정체성과 위상은 그 발언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a. 한신-아와지 대지진이 일어난 1995년의 전북 익산에서 어느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TV를 보며 일본인은 다 죽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b.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1923년의 동경에서 어느 일본인이 죽창을 들고 무성치경파찰음 つ를 발음하지 못하는 조선인들을 색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두 발언 다 감정적인 혐오를 가지고 있으며, 실제 대상들의 죽음까지 아마 바란다는 점에서 동일할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으로는 전혀 동일하게 평가할 수 없다. b의 경우는 약자에 대한 심각한 공격과 차별을 낳을 것이지만, 노인 양반들께서 a를 아무리 떠든들 실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드러나는 혐오 a는 차별선동의 동의어가 아니지만 드러나는 혐오 b는 차별선동의 동의어이다. 이 부분의 차이점은 명확하며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물론 사람은 서로 미워하면 안 된다는 부처님 말씀을 할 수도 있으며, 그것은 때로 인정될 만한 주장이다. 그리고 증오의 습관이 화자를 망가뜨린다는 심리학적 제안도 내놓을 수 있으며 그것도 타당하다. 그리고 좀 더 중요한 것으로, 남성 일반에 대한 비-차별적 혐오 a가 남성 특수에 대한 차별적 혐오 b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인데, 이선옥의 글에서도 이 부분이 허술하게 지적되긴 한다.

“메갈리아에는 성차별을 반대하고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내용과 남성 일반과 장애인, 성소수자, 노인 같은 사회적 약자를 혐오하는 표현이 공존한다.“

즉 메갈리아에서 차별로 이어지는 혐오가 존재했다면 그것은 장애인-남성 혐오, 성소수자-남성 혐오, 노인-남성 혐오, 저소득층-남성 혐오라는 것이다. 남성 일반은 혐오-차별의 대상이 될 수 없지만, 다른 소수자성을 가진 남성 개인은 혐오-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메갈리아 사이트에서도 극심한 논란을 낳았던 논제이다. 혐오b의 일반적 양상을 하나하나 제거하기 시작하면 혐오a는 단순한 감정으로 표백되고, 위의 식민시절에 유년기를 보낸 반일 노인네들처럼 실상 전혀 무해한 것이 되고 만다.

물론 이선옥은 메갈리아의 이런 논쟁과 생각의 갈림들은 간편하게 무시한다. 영지주의자에게 하나의 창조주-악마가 필요했듯, 이선옥에게도 단일한 메갈리아가 필요하니까. 그리고 이선옥은 주장한다 - 혐오는 모두 폭력이며 폭력은 나쁘며 메갈리아는 폭력이다. 여기서 이선옥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심리적 표현일 뿐이며 그 사회적 결과는 철저하게 몰각된다. 이것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일까? 하지만 어차피 이선옥은 이 문제를 손바닥 뒤집듯 뒤집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남충은 적개심으로 기인하나 차별적 발언이 아니다. ‘소추소심’이나 ‘성기 크기 비하’ 로고 따위는 차별적 발언은 둘째치고 무슨 적개심에 기인한 것인지조차 불명확하다. 하지만 어떤 남성을 ‘병신’이라고 부른다거나, 게이 남성을 ‘똥X충’이라고 부르는 행위는 장애인 또는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나중의 혐오들은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질 것이며, 관찰자는 ‘봐라, 저 부분이 일베와 같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곧 메갈리아는 당했던 것만큼 갚을 수가 없다. 차별선동인 여성혐오에 대응하는 남성혐오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대응하는 남성혐오가 존재하는 것처럼 관념하고 그에 대한 동해보복을 감행하면 무엇이 되는가? 바로 차별선동으로서의 여성혐오이다. 이게 너무 억울하다는 남성분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억울하면 약자로 태어나든가! 그런데 상대적 강자인데도 그렇게 억울한 ‘프로불편러’ 분들이 상대적 약자로 태어나서 겪는 억울함을 어떻게 참아내겠는가?

손에 들고 있는 도장은 뭔가요?

앞서 말했듯 이선옥은 메갈리아가 단일한 혐오사이트라는 판결을 시도한다. 이것은 경우에 따라 - 물론 메갈리아에 불리한 쪽으로 - 그때그때 정의를 다르게 내리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차라리 박가분이 이 점에서는 솔직한 편이다.

반면 이선옥은 성차별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다 다릅니다’라는 말로 잘게 자르기를 시작한다. 물론 천지창조 이전부터(유감스럽지만 나무위키에 그 이전 날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증오선동에 열을 올리던 장동민 추종자들이나 넥슨에 성우교체를 요구하던 겜덕들이나 작가와 난투중인 웹툰 독자들이나 정의당 당게에 우글우글한 당원 ‘아재’들의 깜냥은 다 다를 것이다. 이선옥은 이들이 내세우는 입장이 저마다 다르다며 곧 그것 때문에 성차별주의자들로 같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사과는 빨갛고 바나나는 노랗고 포도는 푸르딩딩하니 셋 다 과일로 같지 않다는 주장과 다를 바가 없다.

여기에 이선옥은 메갈 싫어하는 여자도 일부 있다는 이야기를 덧붙인다. 이것은 그이의 글에서 유일하게 사실적인 증명이리라.

이선옥은 그러면서 현재 싸움이 진영과 진영간의 이분법적 다툼으로 격화되었으며, 다양한 의견 개진이 막혀 있다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물론 이 주장에는 타당성이 있다. 한국의 일상적인 풍경이라 어디에 갖다 붙여도 그것은 대체로 맞는 말이니까. 이선옥의 메갈 조각모음은 이런 취지와는 정반대의 수행이지만 말이다. 자신의 말마따나 ‘비판은 사실에 기반해야 하지만, 반대로 가상의 적대를 만들어 부추기는 모습’인데, 역시나 탈-조선은 어려운 법이다.

이선옥의 노력을 자신이 메갈리아라고 생각하는 일부 일부 일부를 모아 단일한 통합사념체 같은 것을 만들어보려는 행태로 정리할 수 있겠는데, 여기에는 좀 특징적인 면이 있다. 일단 페이스북의 메갈리아4를 보자.

페이스북 메갈리아는 처음에는 메르스 갤러리 풍자글들의 저장소로 기획되었는데 - 디시에서는 운영진이 이른바 ‘광역삭제’를 하기 때문이다 - 거듭된 페이스북의 제재로 새로 페이지를 만들며 뒤에 번호가 붙었다. 처음부터 이 메갈리아 페이스북 페이지는 풍자에만 호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메갈리아에서 공격적인 표현이 득세하자 노선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이선옥이 ‘팩트폭격’ 운운하는 캡처 화면은, 자세히 살펴보면, 메갈리아4 페이스북 운영자가 메갈리아 사이트에 가서 표현에 수위가 있어야 함을 논하는 내용이다. 이미 그 시점에서 페이스북의 메갈리아4 페이지는 풍자글도 거의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선옥은 메갈리아의 ‘혐오’라는 것을 뭉뚱그려 비판하며 그것을 절대악으로 몰지만, 정작 혐오표현 또는 혐오로 의심되는 표현까지 점차적으로 내버린 메갈리아4는 혐오사이트로 관념한다.

대체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말 표피적인 혐오에 - 즉 말하는 ‘싸가지’ 없음에 - 격렬히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그이가 비판하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예의바르게 행동하면 칭찬이라도 해줘야 할 일 아닌가? 그런데 이선옥은 주장한다 - 작년 A라는 곳에서 너는 싸가지없는 욕설을 했으니, 오늘 B에서 하는 너의 예의바른 행동도 전부 싸가지없는 짓이며, 너는 혐오종자다.

낙인찍기도 이런 낙인찍기가 없다.

이 논리를 그대로 일관하면 낙인이 안 찍힐 사람이 없다! ‘맘충’을 사용할 것인지 투표를 붙였던(심지어 사용에 찬성하는 쪽이 더 많이 득표했다!) 오늘의유머 유저들은 이제부터 아무리 정상적으로 행동해도 영원히 혐오종자이며, 일베인들이야 뭐 답이 없고, 극한의 진영대립 속에서 험한 말만 오가는 이선옥의 마음 속 소돔의 광경이 진정 우리의 현실이라면, 지금 ‘참전’해 있는 인간들은 싸그리 다 혐오종자가 끌려가는 지옥에 가야 하리라.

이선옥의 주장의 악질적인 점 하나는 ‘싸가지’의 문제를 혐오와 차별의 문제와 뒤섞는다는 점이고, 더욱 악질적인 점 하나는 그 중에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특정한 누군가만 콕 찍어 혐오종자의 딱지를 붙이려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싸가지의 대법관이다. 남들더러는 낙인을 찍으면 안 된다면서, 정작 자기는 상대방의 이마에 도장을 찍으려 혈안이다. 메갈리아가 뭐가 그렇게 미우신가? 그런데 이선옥의 모호한 분류법에 따르면 이것도 ‘혐오’다.

스피넬인데요?

이선옥의 엉성함의 끝에 등장하는 것은 대중,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주체로서 호명되는 대중이다. 앞서 메갈리아4의 경우도 그런데, 메갈리아의 이름, ‘그곳이 작다’는 로고(앞서 말했듯 이것은 어떤 의미의 혐오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리고 정반대의 상황을 지적하는 과거 메갈리아 사이트 글 캡쳐, 이런 것들을 줄줄이 늘어놓은 끝에 등장하는 최종 근거란 ‘대중이 그렇게 생각해’다.

물론 이선옥이 옳게 지적하는 한 가지를 인식할 필요는 있다. 공적으로 발화할 때는 대중이 잘 알아들으며 오해를 사지 않는 표현을 사용할수록 좋다는 것이다. 이것은 운동이나 정치의 전략론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에 그치지 않고 대중을 주체로 호명하기 시작하면, 엉성한 당위론과 더불어 논리전개가 산으로 갈 공산이 큰데, 이선옥의 이 글이 대표적으로 그렇다.

이선옥이 글 초엽에서 메갈리아 비판자들을 다 다르다고 가지치기를 했지만, 대중의 심정은 또 이상하게 모이고 모여 단일한 대중-인격체로 재탄생한다. 그 ‘대중’은 남성혐오와 여성혐오를 같게 보며, 소비자운동의 정당성은 사유하지 않고 행태의 유사성만 보며, 메갈리아 사이트와 페이스북의 메갈4를 동일하게 관념한다.

이건 좀 괴상한 이야기이다. 요새의, 흔히 하는 말로 ‘화력’을 보면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명하는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이선옥의 주장이 타당하게 적용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다수성은 네티즌들 중에서도 또 일부에 불과하다. 다수 네티즌들의 조부모님 세대는커녕 부모님 세대 정도만 가도 메갈리아에 대한 인식은 0에 가까우며, 까놓고 말해서 네티즌들도 문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는 부류는 어쨌거나 소수이다. 애초에 넷상에서 이루어지는 의견 대립에서 어느 편을 대중이라고 획일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진영과 진영의 극단적인 대립 같은 것을 말해서는 안 된다. 권력자만이 차별선동으로서의 혐오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본다면, 여성을 차별하는 성차별주의자들이 다수파로서의 행패를 부리고 있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하다.

이선옥은 대중을 계속 호명하며 그것을 메갈리아, 기존 페미니스트, 진보정당, 작가와 대립시킨다. 대중은 앞서 말했듯 상상된 것이다. 따라서 이선옥의 주장은 지금 시점의 여론의 압력에서 다수의 편에 있다는 어떤 자신감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자신감으로 이선옥은 자신이 진리의 편에 있음을 선포한다. 이것으로 이선옥의 대법관직 수행은 인민재판의 성격도 아울러 가지게 된다.

앞서 논했듯 이선옥의 주장은 논리적 흠결과 사실의 오류가 지나칠 정도로 많으며 도저히 정당한 주장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이의 글에는 좋은 점들이 말했듯 있기야 있지만 그것들을 찾기 위해서는 식후에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차분하게 지난 문장들을 떠올려 보는 여유가 필요하다. 이선옥의 주장이 단지 그이가 소환하는 대중과 비슷하다고 해서, 이선옥이 메갈리아나 페미니스트들이나 진보정당, 작가의 사상에 지적질을 할 권리가 생기는가? 물론 지적질을 할 권리는 있다. 하지만 그런 표현의 자유는 대중의 지지와 아무 연관 없이 개인에게 주어지는 권리다. 그리고 상대편에게도 그 지적을 한심하게 생각하거나 반박할 권리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대중은 옳은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내가 이런 류의 주장에 최대한 긍정할 수 있는 한도는 ‘장구한 역사의 흐름에서 볼 때 민중은 결국 옳다’이다. 대중이 정말 옳았으면,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았을 것이며 타블로의 학위는 없었을 것이고 문희준은 락과 메탈의 종교재판정(실상 배심원들 중 락덕후는 드물었겠지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을 것이다.

뭐 그건 그렇고, 이 대중을 소환하는 부분에서, 이선옥이 마지막에 열심히 주장했던, 공론장의 정체마저 좀 괴이쩍게 느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언뜻 공론장은 개인이 각자의 의견을 교환하며 옳고 그름을 따지는 장소여야 할 텐데, 이선옥의 논리대로라면, 따질 것도 없이 대중의 다수의견이 진리다. 어차피 다수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데, 오만한 소수파들의 잡다한 의견들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영화 “아가씨”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아가씨 : (귀걸이를 보여 주며)이렇게 새파란 사파이어를 본 적이 있니?
숙희 : 가만 보자... 사파이어가 아니고... 스피넬인데요?

하지만 이선옥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아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대중이 사파이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파이어가 될 테니까.

억울하십니까?

억울함은 일종의 불만감정인데, 주관적으로 응당 그렇게 움직여야 할 외부세계가 자신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개탄이다. 유명한 장동민 씨는 대략 이렇게 말하였다. “어머니가 깨워서 거실에 나가면 아침밥이 차려져 있을 것이라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화가 난다”. 뭐 화가 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장동민의 어머니에게 쏠리는 장동민의 불만은 정당한 불만이 아니다. 어머니는 굳이 장성한 장동민에게 아침밥을 차려 줄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대중적 불만 역시 마찬가지다. 가령 양차대전 사이의 독일인들은 부당한 전쟁 배상금, 대공황을 낳은 자본주의적 경제질서, 영국과 프랑스의 관세블럭으로 인한 수출부진 따위에 불만을 품고, 어떻게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불만이 유대인에게 쏠린다면? 집시족에게 쏠린다면? 성소수자들에게 쏠린다면? 내부의 적을 찾는 데 사람들이 혈안이 되어 있다면? 이것은 전형적인 희생양 만들기다.

앞에서 메갈리아를 혐오사이트로 판정할 수 없으며, 하물며 페이스북의 메갈리아4 페이지를 그렇게 판결하는 건 어림없다고 정리했다.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하게 논한 글이 있으니, 더 관심있는 분은 참조하시라. 링크 참조.)

더하여 메갈리아4에서 수행한 별개의 모금에 동참한 것, 그리고 그 동참자의 직업상 권리를 옹호하는 것까지 가면 이게 대체 메갈리아의 남성혐오라는 것과 무슨 간접적인 연관이라도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조차 불분명하다.

대체 이런 것들은 치밀하고 또 치밀하게 증명해야 할 문제인데, 이선옥에게는 어떤 기준도 없고 자기 또는 대중이 이렇게 상상했다는 변명뿐이다. 대한민국에서 언제 이런 사상검증이 자행되었는가? 거의 종북 연좌제와 비슷한 수준이다. 이선옥의 논리대로라면 북한과 통진당의, 통진당과 민노총의 연관관계를 대중이 상상하고 민노총과 콜트콜텍 사업장 노조원들의 관계 역시 같으니 콜트콜텍 사업장의 노조원들도 종북이다. 이런 수준의 주장은 이제 어지간한 보수지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물론 한국의 일반인들이 어떤 원한감정도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말하는 사람의 어리석음이리라. 그리고 어떤 원한감정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말하는 사람의 사악함이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괜히 생기지는 않았을 터이니까. 단지 우리는 그 원한감정이 정당한 것인지 판별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고, 우리가 이 사례에서 살펴본 바대로, 성우에 대한 원한감정에는 정당한 방향이 상실되어 있음이 드러났다. 결국 이선옥의 주장의 기반이란 논리와 사실이 아닌, 사람들이 응당 가질 법한, 그러나 섣부른, 길을 잃은 원한이라고 정리할 만하다.

여기서 우리는 지식인의 책무까지도 바라지 않는다. 올바른 시민이라면 분노를 정당한 방식으로 소모하도록 이웃을 설득해야 한다. 가령 메갈리아의 소라넷 폐쇄 운동은 정당했고 다수의 장애자 혐오, 일부의 성소수자 혐오는 잘못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선옥은 자신이 극렬히 비난하는 메갈리아 사이트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선옥은 단지 엉뚱한 곳을 가르키며 저들이 너희들을 모욕했다며 증오하고 공격하라고 선동하기 때문이다.

이선옥의 주장은 그것은 다수의 남성, 그리고 심지어는 일부 여성들이 겪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여지조차 빼앗는다는 점에서 특히 사악하다. 가령 이번에 드러난 웹툰작가들의 사례를 보자. 작가지망생이 인기있는 웹툰작가들을 선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되지 못한 자신에게 불만을 품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여기서 해결책은 자신이 웹툰작가가 될 실력을 갖추든지, 웹툰시장이 커지는 데 간접적으로 공헌하여 등용문이 넓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성과 인종과 학벌과 인맥을 가리지 않는 공정한 기회가 보장된다면, 그 해결책은 좀 더 분명할 것이다. 작가의 노동조건에 관심을 가진다면, 어쩌면, 작가들의 수는 더 많아질 수도 있다.

하지만 홍위병이 되어 자유사상에 물든 작가들을 조리돌림하거나, 시장 자체가 폭발적으로 멸망하기를 사주하는 것은 정상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그것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일 뿐. 이선옥은 바로 그런 무분별한 분노와 증오로 사람들은 인도한다. 이것이 극단주의다. 그리고 이선옥 자신이 말한 그 실천윤리의 타락이다.

이런 치명적인 문제가 산적해 있음에도, 앞서도 여러 번 지적했듯. 이선옥의 이번 기고에는 분명 새겨 들을 점이 존재한다.

메갈리아와 일부 인터넷 페미니스트들이 대체로 편협하고 내외의 비판에 공격적으로 반응했다는 점을 생각한다.

운동은 그 자체로 정의를 보증하지 않으며, 그 내적 논리를 더 충실하게 고민해야 했음을 생각한다(물론 이선옥의 주장대로 인터넷 페미니스트들이 ‘기준과 합의’를 도출하는 데 전혀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허술한 여혐 지적이 반론에 무너지기도 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라 - 대표적으로 샤이니 종현의 ‘뮤즈 발언’을 둘러싼 논쟁에서.).

그리고 진보정당운동이 대중에게 먹힐 만한 슬로건과 정책, 실제 활동을 수립하는 데 미흡했음을 생각한다.

이선옥은 자기의 글로 인해 내부 성찰과 공론의 장이 회복되기를 바란다고 글의 말미에 썼다. 나도 그것을 바란다. 과연 이선옥의 이 글이 신념윤리적, 실천윤리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아주 반-성찰적이고 반-공론적이지만, 공론의 장에서 유의미한 역할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독자가 좋은 점을 주목할 수 있다면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런 수준의 관대함을 이선옥의 글에 적용할 수 있다면, 잠들어 있는 메갈리아에게도 어떤 유의미한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그런 것들을 기대하는가? 나는 언제나 약간은 회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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