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노태우씨가 80년 5월 광주에서 자행한‘학살’의 진상 규명촉구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던 많은 사람들이 5천억원 비자금 파문을 보고는 온 나라가 떠나갈 듯 분노의 목청을 높이고 있다.

체제 탓인가. 무자비한 폭력 앞에 죽어간 수많은 목숨보다는 역시 돈이 걸려서인지 비자금에 대한 관심과 분노가 압도적이다. 이제 비자금 보도가 지면과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가운데 12·12와 5·18은 보도 프로그램이 아닌 시청률과 상업성을 겨냥하고 기획된 드라마의 소재로‘전락’하고 말았다.

우리 사회의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는 이 문제가 현단계에서 드라마의 소재로 삼을 수 있는가의 적절성여부를 떠나 드라마 내용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 목소리들은 이상하게도 가해자 집단의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좌파세력의 음모, 현정권의 5, 6공세력 거세 음모 등이 거론되고 있으며 드라마에 대한 법적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표명되고 있다. 이 모두가 5·18로 대표되는 당시 정치군부의 쿠데타의 진실이 철저하게 규명되지 못하고 책임자 처벌이 유예된데 따른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생명보다 돈에, 역사적 사실보다 드라마에 대중의 분노와 관심이 쏠리고 있는 현실을 씁쓸하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의 분노와 관심에 비난을 쏟을 어떤 이유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무언가 흔쾌하지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시작된‘제4공화국’과‘코리아게이트’가 드라마라는 이유로 극적 상상력을 내세워 사실을 은폐, 과장하거나 왜곡시켜서는 안된다는 지극히 당연한 요구를 하고자 한다. 물론 아직 명백한 진상도 규명되지 않은 채 가해자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현실과 정치적으로도 지극히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이 소재를 드라마라는 형식으로 담는데 따른 무리가 존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울러 제작진들의 사실 취재의 한계와 무엇보다도 경쟁적인 시청률 싸움으로 인한 사실 왜곡의 가능성도 상존한다.

우리는 그러나 두 방송사의 제작진들이‘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는 무책임한 말로 그들의 엄중한 역사적 책무를 무책임하게 피해나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 그리고 적어도 이 소재와 관련해서는 극적 완성도보다 진실의 정확한 전달이 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받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또 이 두 가지가 서로 배치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모든 등장 인물이 실물로 나오고 있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드라마를 제작하는 행위는 사실에 충실함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아야 하는 의무를 지워주는 것이다. 법정에 세워져야 할 역사적 범죄가 현실 속에서는 사실상‘무죄’판결을 받은 채 극적인 재미의 대상으로 되어버린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보면서 우리는 제작자들이 드라마가 아닌 현실의 법정에 12·12와 5·18을 세우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고민해줄 것을 주문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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