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하 세종대 교수(일어일문학)가 검찰에 기소된 지난해 11월 서울 프레스센터와 일본 도쿄 프레스센터에서는 각각 기자회견이 열렸다. “공권력이 특정 역사관을 기반으로 학문의 자유를 억압”한 것에 대해 규탄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일본 지식인들의 성명서에 ‘제국의 위안부’를 높이 평가하는 부분이 있다. 단순히 ‘학문의 자유’ 문제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위안부 문제를 바라볼 때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지난 1995년 당시 무라야마 내각이 해결책으로 내놓은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한 인식이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범죄에 대한 배상 책임)’이 해결됐고, ‘도덕적 책임’만 남았다는 관점에 있는 이들에겐 아시아여성기금이 현실적으로 최선의 해결책이다. 지난해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역시 같은 관점에서 이루어진 외교 협상이다.

보통 아시아여성기금,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에 우호적인 학자들은 ‘제국의 위안부’에도 호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지난 11월 일본 지식인 성명을 주도한 와카미야 요시부미 전 아사히신문 주필이 대표적이다. 박 교수 역시 아시아여성기금을 ‘화해’의 중요한 수단으로 본다.

▲ 2015년 12월21일 와카미야 요시부미 전 아사히신문 주필의 조선일보 칼럼.

그는 지난해 12월21일 조선일보 칼럼에서 “우리가 박 교수를 평가하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려는 자세가 있기 때문이지 일본의 면책을 바라기 때문이 아니”라며 “한국에서 약 60명의 할머니가 ‘아시아여성기금’을 받았다는 사실까지 무시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금을 받은 할머니들을 강조했지만 실제 아시아여성기금을 거부한 할머니가 위안부 할머니의 두 배 가량 많다.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소위 ‘돈으로 때우려 했기’ 때문이다.

와카미야 전 주필은 지난해 12월10일 동아일보 칼럼 “할머니의 명예는 훼손됐을까”에서 “그(박 교수)는 언론의 자유를 외치면서 평화를 사랑했던 사람이었다”며 박 교수가 ‘이시바시 단잔 기념 와세다 저널리즘 대상’, 마이니치신문에서 준 ‘아시아태평양상 특별상’ 등을 받았다고 극찬했다. 또한 “위안부와 일본군이 ‘동지적 관계’에 있었다는 기술이 오해의 표적이 되고 있지만 그런 극한 상황에서는 좋든 싫든 미묘한 동지적 관계도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 2015년 12월10일 와카미야 요시부미 전 아사히신문 주필의 동아일보 칼럼.

와카미야 전 주필에 대해 길윤형 한겨레 도쿄 특파원은 “그는 박 교수의 저작을 높게 평가하고 한일 양국의 화해를 강조하면서도 위안부 문제가 일본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하는 국가 범죄인지 여부에 대해 언급을 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내에서 박 교수에 대한 옹호는 광범위하다. 작가 다카하시 겐이치로와 정치학자 스기타 아쓰시는 아사히신문에 서평을 통해 박 교수 책에 대해 호평했다. 지난해 11월 성명에는 여성학자 우에노 지즈코 도쿄대 명예교수, 고모리 요이치 도쿄대 교수(문학), 나카자와 게이 호세이대 교수(문학) 등 문학계 뿐 아니라 야스오 요시노리 전 교도통신 서울특파원, 와카미야 전 주필 등 언론인도 있다.

이들은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대체로 환영한다는 입장 내지는 특별한 반응이 없는 상황이다. 한 예로 아시아여성기금 이사를 맡았던 오누마 야스아키 메이지대 특임교수(국제법)는 “모든 위안부와 이들을 둘러싼 지원 단체, 한일 두 나라, 학자, 나아가 국제사회를 모두 만족시키는 진정한 해결 따위는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오누마 교수는 박 교수의 2005년 저작 ‘화해를 위해서’를 높이 평가했고, 지난해 성명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는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서도 일본의 일방적 승리라고 보면서도 향후 양국이 합의 내용을 잘 이행하길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일본 역사학계, 박유하 비판

아시아여성기금 이사를 지낸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역사학)는 아시아여성기금이 한국 위안부 문제해결의 최선책이라는 입장이다. 와다 교수는 일본 진보세력에 대해 “일본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는 것에 화가 났지만 (아시아여성)기금을 부정한 뒤 정부로부터 더 바람직한 조처를 끌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와다 명예교수는 지난해 11월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이는 박 교수에 대한 검찰 기소를 표현의 자유 침해로 보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보단 일본군과 위안부 할머니를 ‘동지적 관계’로 보는 박 교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박 교수는 일본군(혹은 정부)보다 위안부를 모집한 민간업자의 책임을 강조했다. 반면 와다 교수는 “민간업자가 맘대로 여성을 모은 것이 아니고 업자도 국가적 통제의 일부”라고 본다. 또한 조선인 위안부를 모집할 때 “‘나라를 위해’, ‘전쟁에 이기기 위해’라는 이데올로기적 설득이 있었을 것”이라면서도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조선인 업자일 수는 있지만 모집된 조선인 여성들에게 그런 인식이 있었는지 의문”이라는 입장이다. 즉 일본군과 위안부가 ‘동지적 관계’라고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와다 명예교수는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가능한 사죄를 작게 하고 감추되 미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으려는 아베의 전술에 한국 정부가 당한 것”이라며 “사죄가 불충분하지만 합의를 지렛대 삼아 아베 총리를 압박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고 했다. 지극히 현실주의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박 교수의 역사 인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는 박 교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일본 다수 역사학계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일본역사학협회, 역사학연구회 등 16개 역사학 단체는 지난해 “위안부 동원 과정의 강제성뿐 아니라 동원된 여성들이 인권을 유린당한 성노예 상태에 놓여있었던 것을 분명히 한다”며 “성매매 계약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배후에는 (식민지배 등의) 불평등·불공정 구조가 존재했다”고 밝혔다. 해당 성명에 1만3800여명의 역사학자가 참여했고, 일본 역사학자의 일반적인 의견으로 봐도 된다는 게 성명을 주도한 구보 도루 역사학연구회 위원장의 설명이다.

김규항·장정일 등 박유하 옹호

박 교수와 위안부 문제 인식을 비슷하게 하는 이는 칼럼니스트 김규항과 소설가 장정일이 대표적이다. 지난 5월 장정일은 “박유하 죽이기-정영환·이명원의 오독”이란 글에서 “박유하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학문적 논쟁을 하는 게 아니라 ‘박유하 죽이기’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엽적인 부분을 어떻게 독해했느냐에 대한 논쟁이다.

김규항은 ‘더러운 여자는 없다’는 글에서 위안부 할머니 첫 증언자로 알려진 고 김학순 할머니 이전에 1975년 자신이 위안부였다고 밝힌 배봉기 할머니의 이야기를 꺼냈다. 배 할머니가 종종 “일본군이 져서 분하다”는 말을 한 것을 두고 김규항은 “그는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됐고, 민족의식이 없었으며 자신이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한국 사회가 그간 ‘젠더 의식이 부족한 민족주의’ 관점에 따라 위안부 문제를 ‘순결한 조선 처녀가 일제에 겁탈당한 사건’으로만 이해했다는 지적은 김규항-박유하 등의 주장으로 논리 자체는 타당성이 있다. 실제 이 지적은 소녀상 세우기로 대표되는 정대협 운동방향에 대한 지적으로도 활용됐다.

박 교수 검찰 기소에 대해 성명을 낸 한국 지식인은 연세대 문정인 교수, 유시민 전 장관, 작가 홍세화, 김곰치, 화가 임옥상, 금태섭 변호사 등 각계 지식인 190여명이다. 하지만 해당 성명은 검찰 기소에 대해서만 비판했을 뿐 박 교수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다수 있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김규항의 주장에 대해 “배봉기 할머니 이야기가 한국 사회에 공명되지 않은 이유는 ‘순결한 조선처녀라는 위안부상’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들을 귀와 볼 수 있는 눈을 갖춘 ‘우리’가 부재했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김요섭 문학평론가는 “순결한 소녀로, 민족의 상처란 방식으로 위안부의 기억을 단일하게 만들었다는 정대협은 오히려 대다수가 침묵하고 외면한 미군위안소 문제를 공론화했다”고 반박했다. 그는 “오히려 주목해야하는 것은 한국의 위안부 문제가 전시 강간과 국가적 성폭력 공론화에 있어 선도적인 위상을 점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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