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카드사의 음반 소매점 운영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전국의 음반소매상과 음반소비자들이 대기업의 LP(바이닐) 음반 판매 진출중단을 요구하는 최초의 시위를 열었다.

전국음반소매상연합회는 3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현대카드 측 매장 ‘바이닐&플라스틱’ 앞에서 집회를 열고 “현대카드가 음반소매점의 위기를 꾀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수익성도 없는 음반 소매 시장에서 스스로 명예롭게 물러설 것을 요구한다”고 호소했다. 부산, 대구, 경기 등 전국의 음반 가게주가 참여한 가운데 정의당 중소상공인부·문화예술위원회 및 음반소비자들이 함께했다.

▲ 전국음반소매상연합회는 7월3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현대카드 측 매장 ‘바이닐&플라스틱’ 앞에서 현대카드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들 주장에 동의하는 음반 소비자들과 정의당 중소상공인부·문화예술위원회가 함께 했다. 사진=손가영 기자

이날 집회엔 “LP 판매는 대기업의 일이 아니”라는 비판이 빗발쳤다. 김지윤 전국음반소매상연합회 회장은 성명서를 통해 “음반 문화 지원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굳이 대기업의 격에 맞지 않는 소매점을 개장한 이유는 대기업의 골목시장 진출에 따른 비난을 피하기 위한 편법이라 여길 수밖에 없다”면서 “거대 자본이 음반 시장에 존재하며 차후 그 능력을 발휘하게 되면, 그나마 몇 남지 않은, 나름대로 다양한 개성을 유지해 온 가게들이 단 몇 개월 만에 스스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카드가 ‘음반 시장 지원 및 문화 융성’을 거듭 취지로 밝히고 있는 데 대해 김 대표는 “그렇다면 소매점은 폐점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굳이 영세 음반점의 의심과 우려를 사면서까지 매장 운영을 고집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다.

연대발언에 나선 박창완 정의당 중소상공인부 본부장은 ‘밥그릇 싸움 아니냐’는 비난 여론에 대해 “세상의 생명을 지키는 것 중 밥그릇만큼 소중한 게 어디 있나. 밥그릇 악착같이 지켜야 한다”면서 “600만 중소 자영업자들이 너무나 어렵게 살고 있는데 대기업은 대자본답게 통 크게 놀았으면 좋겠다. LP 음반시장이 거의 고사까지 갔다가 복고바람타고 소생하려는 이때에 숟가락만 들고 나오는 건 매우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소매상들은 현대카드가 기존의 음반 전시·청음 공간을 확대 운영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현대카드는 지난해부터 LP 음반 만 여장과 음악 서적 3천여 권을 전시·소장하고 청음 공간 등 음반 체험 공간이 함께 조성된 ‘뮤직라이브러리’를 운영해왔다.

경기도 고양에서 ‘소리곳간R’을 운영하는 박정철씨는 “한국은 다른 나라에는 있는 ‘음반 아카이브’가 없는 나라다. 이런 것이 있으면 음반 시장에 참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음반의 역사, 제작과정, 유의미한 음반 비치 등이 갖춰지고 이를 체험하는 공간이 된다면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는 세계적 수준의 음반 아카이브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 집회 참가자들은 발언을 끝낸 후 주변 대로를 행진하려 했으나 집회신고서에 신고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제지를 당했다. 사진=손가영 기자

이날 자발적으로 집회에 참여했다는 소비자들은 ‘작은 음반 가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14살 때부터 음반을 모으기 시작했다는 김형우(27)씨는 “이건 부당한 경쟁이고 내가 사랑하는 걸 잃게 된다는 생각에 집회에 참여했다”면서 “작은 가게가 없어지는 건 음반을 못 사는 것 이상의 의미다. 가게를 찾아가고 주인과 얘기하고 음악을 고르고 듣는 것이 음악에 다 포함됐는데, 그게 다 없어진다는 것”이라 말했다.

음반 가게 단골이 돼 한동안 음반가게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최규승씨(24)씨는 “판매는 (소매상에) 경쟁이 안되는 분야다.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이라면서 “최악의 경우 이곳만 남을 수 있는데 현대카드 중심의 LP 문화가 만들어진다는 말”이라 말했다.

소매상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다. 현대카드 관계자는 이들 집회에 대해 “판매 철회 계획은 없다. 뮤직라이브러리 확장으로 변경할 계획도 없는 상황”이라면서 “턴테이블을 판매하는데 여기에 맞출 콘텐츠가 없으면 소비자에게 음반을 제대로 알릴 수 없다. LP를 판매하라는 고객의 요구도 있다. 젊은 층, LP를 모르는 층에 LP 음반을 알리는 등 LP 문화 저변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 밝혔다.

소매상연합회는 이 문제를 음반시장의 골목상권 침해 문제를 넘어선 문화산업 내 다양성 파괴 문제로 규정하고 정의당 중소상공인부와 함께 향후 대응을 계획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언론에 대한 극심한 불신도 확인됐다. 서울 중고 회현지하쇼핑센터에서 ‘리빙사’를 운영하는 이석현씨는 “어째서 언론은 현대카드 측 홍보 자료를 토씨 하나 안 바꾸고 그대로 받아쓰냐”면서 “우리 입장을 대변해달라는 게 아니다. 있는 현실 반영해주고 이쪽저쪽 다 확인해달라는 말”이라고 토로했다. 소매상들은 성명을 통해서 “현대카드의 소매점을 위해 홍보기사를 받아쓴 기자 중 우리 얘기를 단 한 번이라도 들어본 기자는 과연 몇이나 있었는가”라고 강도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 현대카드 매장 '바이닐&플라스틱' 인근에 위치한 까페 '테이크아웃드로잉'은 연대의 뜻으로 현대카드 사절 움직임에 함께 하고 있다. 테이크아웃드로잉은 건물주 가수 '싸이'의 일방적인 퇴거 요구로 한때 홍역을 앓았다. 사진=손가영 기자

음반 시장은 스트리밍 서비스 등장, 음원시장 확대 등으로 2000년대 이래로 급격히 축소돼왔다. LP 음반시장은 그중에서도 미미한 부분을 차지한다. 근래 ‘아날로그 열풍’ 등으로 LP 수요가 진작되면서 'YES24', '알라딘' 등 온라인 매장을 통해 대형 유통사가 부분적으로 진출한 바 있으나, LP 음반 시장은 음반산업이 사양산업으로 접어들기 전부터 소매업자 중심으로 유지·발전돼왔다는 게 업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현대카드의 골목상권 침해 논란은 음반 시장의 특성 때문에 더 붉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대카드의 골목상권 침해 논란은 지난 10일 현대카드가 중고·신보 LP를 판매하는 ‘바이닐&플라스틱’ 매장을 개장하면서 시작됐다. 음반 소매상인들은 즉각 반발했다. 대기업이 영세한 규모의 LP 음반 시장에 진출함으로써 그동안 소매상인들이 형성한 LP 음반 문화가 파괴되고 소매상의 생존이 위협받는다는 이유에서다.

대기업이 유통·판매 시장에 진출하며 중소 자영업이 위축됐던 상황은 대형마트와 재래시장, 대형서점과 중소서점 등의 갈등에서 확인된 바 있다. 음반 시장, 특히 LP 음반 시장은 영세한 규모와 제한적인 소비층 등의 문제로 중소 자영업자의 불안감이 더 심화되는 상황이다. 이들은 ‘판매 철회’가 아니면 우려가 불식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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