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7일부터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이 ‘자전적 에세이’란 이름의 글을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다. 2013년 5월6일 발생한 성추행 논란을 “워싱턴의 악몽”이라 명명한 그는 자신에게 쏟아졌던 보도를 두고 “대한민국 언론과 그 언론의 뒤에 숨어있는 음해세력이 콜라보레이션 한 인민재판, 여론재판, 인격살인”으로 규정했다. 지난 5월 해당 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되자 본격적인 활동에 나선 셈인데, 자신을 왜곡보도 희생자로 포장하고 있었다.

수긍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예컨대 그는 “TV를 틀어보니 한 종편에서 아내가 통곡하는 소리가 그대로 보도되고 있었다”고 적었고, “내 집의 맞은 편 건물과 뒷동에서 망원렌즈로 집안을 들여다보고 촬영한 장면까지 보도됐다”고 적었다. “나의 자살설 보도를 스마트폰으로 읽으면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고 적기도 했다. 굳이 그의 입을 빌리지 않아도 당시 조회 수를 의식해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가 쏟아졌던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내가 언론계에 몸담았던 사실이 너무 부끄러웠고, 언론계에 34년간 있었던 걸 다 잊어버리고 싶었다”고 적은 대목에선 실소가 나올 수밖에 없다. 언론계 종사자들이야말로 윤씨가 언론계에 몸담았던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있어서다. 그는 1981년 한국일보 입사 이후 KBS·세계일보를 거쳐 1992년 청와대 정무비서실로 직을 옮겼다가 1993년 세계일보로 복귀했고, 1997년 이회창 캠프 부대변인을 맡았다 선거 패배 뒤 1999년 문화일보 논설위원으로 복귀했다.

▲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그리고 2012년, 채널A에 출연해 “안철수의 생각을 보면 한마디로 젖비린내 난다”고 말했던 윤씨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 수석 대변인이 된다. 그는 염치없이 정치권과 언론계를 옮겨 다닌 폴리널리스트의 상징적 존재로, 언론계의 수치였다. 윤씨는 2000년 문화일보 논설위원시절 자신의 칼럼을 “이회창 총재의 정치 보좌관이 작성해 올리는 보고서”라고 비평한 미디어오늘 기자에게 “말로 해서는 안 될 X”, “네 인생 힘들어질 거다”라는 폭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이처럼 수치스러운 전력에도 불구하고 윤씨가 언론의 과도한 취재열기로 사생활 피해를 입은 대목은 일부분 공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윤씨는 8일자 글에서 자신의 처지를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연결 지으며 논란을 자초했다. 윤씨는 “언론에 의해 철저히 무너진 패자로서 새삼 노 전 대통령을 향해 동병상련의 정이 들었다”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고 싶다”고 적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2009년, 6월5일자 문화일보 칼럼에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열기를 두고 “황위병이 벌인 거리의 환각파티”라고 적었던 인물이다.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의 비망록에 따르면 2013년 길환영 당시 KBS사장이 윤창중 성추행 논란을 톱뉴스로 다루지 말라고 요구한 대목이 등장한다. 이는 물론 청와대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윤창중씨는 청와대 입김에 의해 주류언론으로부터 사건의 파장에 비해 상당한 비호를 받은 셈이다.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명박정부 검찰권력과 언론권력으로부터 받았던 ‘정치적 탄압’과는 결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러나 이 같은 윤씨의 ‘궤변’은 언론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공소시효 만료와 함께 등장한 윤창중의 자전적 에세이가 담은 메시지는 단순하다. 자신은 죄가 없으니 재기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검찰이 한국 정부의 외교관 면책특권을 고려했을 가능성이 있고, 공소시효 만료는 영구미제를 뜻하지 죄가 없다고 판단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무엇보다 여전히 냉담한 국민여론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까지 피해여성에게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나는 살아남아 언젠가 내 손으로 이 쓰레기 더미를 치우고야 말겠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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